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길” - 長生久視之道

기사승인 2019.02.18  19:04:00

공유
default_news_ad1

-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59

“사람(벼슬아치)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것은 곡식 거두는 일 같은 것이 없다. 대저 오직 곡식 거두는 일을 일컬어 일찍 익숙해진다고 한다. 일찍 익숙해지는 것을 일컬어 덕을 거듭하여 쌓는다고 한다. 덕을 거듭하여 쌓는 것은 곧 극복하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극복하지 못함이 없는 것은 곧 그 끝(한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끝을 알지 못함으로써 나라가 있을 수 있다. 나라의 어머니가 있음으로써 길고 오래갈 수 있다. 이를 일컬어 뿌리가 곁뿌리(근본)가 깊고 밑뿌리(기초)가 단단하다고 말하니, 길게 살고 오래 보는 도라고 한다.”
- 노자, 『도덕경,』 59장
治人事天莫若嗇, 夫唯嗇, 是謂早服, 早服 謂之重積德, 重積德 則無不克, 無不克 則莫知其極, 莫知其極, 可以有國, 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柢, 長生久視之道

노자는 벼슬아치나 위정자를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길을 농사짓는 일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 아니라 위정자를 다스리는 일을 말하고 있다. 농사를 지을 때는 자연에 일찍 복종하게 된다. 인위적인 자식을 써도 봄과 가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농사는 오직 땅과 하늘의 움직임을 따라 일을 할 뿐이다. 농사일을 하듯, 정치가 자연의 덕에 일찍 복종한다는 것은 덕을 두터이 쌓는 것이다. 위정자가 인위적인 지식을 쓰지 않고 자연에 복종할 때, 나라가 새로 일어날 수 있고, 장생불로의 길을 걸을 수 있다.

ⓒGetty Image

아낌은 언행을 신중히 하는 것이고, 안으로 삼가 신중하게 행하는 것으로 덕을 쌓는 것이다. 왕필은 아낌을 농부로 해석한다. 노자는 규범이나 병법이나 인위적인 지식을 쓰지 않고 위정자가 농사를 짓듯이 자연에 복종할 때, 나라가 일어나고 백성이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한다. 또한 마음을 담담하게 하고 천지의 운행에 맡기는 무위의 삶은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길이라고 한다.

예수가 거부했던 것은 어떤 종류의 종교였을까?
그것은 자화자찬하기를 즐겼던 바리새파처럼
자신들의 미덕을 거들먹거리는 모든 종교들이었다.
멋대로 판단하고 비난하며,
고통스러운 짐을 나누거나 덜어주려 하기보다,
쉽게 더욱 더 많은 짐을 지우려는 독선적인 모든 종교들이었다.
자신들의 지도자들만을 찬양하고,
그들을 치장하는 것을 자랑하며
그를 위해 값비싼 기념물을 세우는 모든 종교들이었다.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부자들을 이롭게 하는 종교,
버림받은 자들을 경멸하고 속세의 지배자들에게 아첨하는 모든 종교들이었다.
-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mann), “그리스도와 젊은 부자” 중에서

거의 모든 종교들이 영원한 삶이나 오래 사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도덕경은 신선도의 한 수련법으로 이해하고, 노자의 길을 오해한 사람들은 양생술로 불로장생 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덕경은 인위적 정치도덕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무위의 도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장자는 “위험한 길을 갈 때 사람이 하나라도 죽으면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길을 가듯이, 삶을 잘 기르는 길은 삶 전체를 통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종교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을 영생과 영혼불멸에 두는 사람들이 많다. 이른바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은 무엇이든지 의미가 없고 이 세상의 삶은 내세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더 많이 가지려고 너 높은 자리에 가려고 온갖 악하고 더럽고, 불의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행한다. 이는 예수님이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난했던 그 이유와 똑같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이 견고하게 쌓아올린 율법의 테두리와 정결례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기 문이다.

“왜 예수님으로부터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혹독한 비판을 받고 책망을 들어야 했을까요?
당시의 서기관들, 특별히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종교나 도덕적 의무 등 모든 것을 율법의 범주 안에 다 집어넣고 그 법을 지키기만 하면 그것이 곧 의(義)라고 판단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학자들의 사상을 가장 광범위하고도 논리적으로 전개시켜 바리새파 사상의 중심으로 끌어왔습니다. 바리새파는 모든 생활 환경과 관련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는지 밝히려고 노력함으로써 생활 전체를 통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전통을 보수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모든 불결을 제거하려는 성격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울타리를 친다는 의도로 만들어졌던 규정들은 점차 그것 자체가 하나의 원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구체적인 문제의 해답을 성서의 구절에서 일일이 찾으려고 애썼고 그렇게 무엇을 해야 옳은지 찾아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더 자의적인 해석으로 흘러 결국은 자신의 판단이 성서(하느님의 뜻)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의식상 정결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율법의 울타리밖에 있었던 이방인들과의 엄격한 분리를 가져왔고, 정결법에 대한 해석 때문에 사마리아인들과 분리를 초래하였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처럼 정결의 법이나 십일조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는 동료 유대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 자기들의 입장과 근접해 있던 예수님이, 어떻게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교제할 수 있었으며(마가 2:15; 누가 15:1-2), 어떻게 안식일 규정을 초월할 수 있었으며(마가 2:23-3:6), 정결의 계명을 무시할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의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율법의 외적인 준수만을 생각하고 마음의 정결을 모르는 위선자라고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더한 심판을 받을 사람”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