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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담백하게” - 恬淡爲上

기사승인 2018.08.06  22: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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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31

“대저 (좋다고 하는) 병기일지라도 상서롭지 못한 도구이니, 만물은 더러 그것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도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담당하지 않는다. 군자는 평상시에는 왼쪽을 바라고(중요하게 여기고) 병기를 쓸 때에는 오른쪽을 바란다(중요하게 여긴다). 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도구이니, 군자의 도구가 아니다. 부득이 그 도구를 사용하려면 고요하고 담백하게(욕심 없이 공정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기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니, 그것을 좋다고 하는 자는 살인을 즐긴다고 하는 것이 옳다. 대저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에 뜻을 얻지 못하리라. 좋은 일에는 왼쪽이 주관하고, 흉한 일에는 오른쪽이 주관한다. 편장군은 왼쪽에 자리하고, 상장군은 오른쪽에 자리하는데, 이것은 상례로써 거기에 자리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을 죽이니, 슬퍼하고 아파하고 울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싸움에 이겨도 상례로써 거기에 자리하라는 것이다.”
- 노자, 『도덕경』, 31장
夫唯(佳)兵者, 不祥之器,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以得志於天下矣. 吉事尙左, 凶事尙右,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言以喪禮處之. 殺人之衆, 以悲哀泣之, 戰勝 以喪禮處之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상대방에게 不德과 不義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주나라 武王은 은나라 紂王이 폭군이며 부덕하다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악과 불의를 물리친 의로운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전쟁에 이기고는 아름답다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노자는 이것을 살인을 즐기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악을 물리친 것이라는 판단은 곧 자기와 상대방을 각각 선과 악으로 판단한 오만한 태도입니다. 노자는 부득이할 때 무기를 사용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는 시비판단을 버린 맑고 고요함(염담)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태도는 전쟁을 합리화할 뿐, 생명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Getty Image

동양에서 방위를 논할 때 왼쪽은 동쪽을 의미하고 오른쪽은 서쪽을 의미합니다. 임금이 남쪽을 향해 좌정할 때에 좌측은 해가 뜨는 동쪽이며 陽적인 것으로 하늘과 생명, 혹은 남성적인 것으로 비유되고, 우측은 해가 지는 서쪽으로 陰적인 것, 곧 땅이나 죽음 혹은 여성적인 것으로 비유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평상시에는 생명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좌측을 귀히 여긴다면, 전쟁 때에는 병기로 죽음에 처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우측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부득이한 경우에 군사를 동원하지만 그것도 희생자들을 생각하여 우측 곧 죽음을 애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요하고 담백함에는 평화와 안녕이 있지만, 전쟁은 살육과 보복의 소용돌이를 일으킵니다. 전쟁은 온갖 슬픔이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전쟁에 패했을 경우는 그 피해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비록 승리한다 하더라도 희생자가 있게 마련이므로 그 승리를 기뻐하거나 즐거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 내어 /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
​길이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 //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 신경림의 “길”

전쟁은 어떠한 명분을 붙이더라도 분명히 흉한 일입니다. 노자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어쩔 수 없이 하려거든 “고요하고 담백하게”(욕심 없이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칼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전통과 제도를 강요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제도나 오랫동안 그 문화권에서 지켜온 전통일지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때에는 “고요하고 담백하게”(욕심 없이 공정하게) 해야 합니다.

유리는 안의 세상은 물론 바깥세상까지 다 비춥니다. 그 앞에서는 모두 투명해집니다. 그 유리의 한 면에 금이나 은을 칠하면 거울이 됩니다. 그 거울에는 오직 나만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가끔은 타인을 잊고 삽니다. 내 기준에 맞아야 옳고 나와 다른 의견을 적대시 하곤 합니다. 그러나 내 것이 소중한 것처럼 타인의 것도 소중합니다. 내 내면의 저 깊은 곳까지 두루 돌아볼 수 있는 거울도 필요하고 서로를 투명하게 비추는 유리도 필요합니다. 나만 보는 내 중심의 감옥을 떠나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어울려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사람의 전통으로 바꾸는 일은 바로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들 자신까지도 속박시키는 힘이 되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까지 억압하는 악한 숨결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전통과 제도를 상대화시키고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파기시켜 버림으로써 그것으로 인해 소외되고 억압받았던 민중들과 이방인들이 그 새로운 구원의 조직 속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로 대표되는 기존 사회의 특권자들이 신앙과 전통의 이념 아래,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민중을 착취하는 엄청난 악을 은폐하고 있음을 폭로할 뿐 아니라 “거룩”이라는 미명으로 배타주의에 빠져 버린 사회적 구조 그 자체를 비신성화해 버립니다.
인간의 전통과 제도는 하느님의 계명을 대신하는데, 인륜을 저버리면서 종교를 빙자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전통과 제도를 넘어 ‘인간’을 찾는 데 있습니다. ‘마음의 신앙’, ‘마음의 종교’는 하느님을 잘 섬긴다고 시위할 것도 없이 사람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가장 진정한 태도란 성서와 하느님의 계명 속에 있는 인간 사랑의 정신을 구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은 항상 상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둘은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삶에 적용하고 판단의 근거로 삼는 사람이나 정황에 따라서 다릅니다. “하느님의 계명의 기초는 항상 동일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브루너의 말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한 판단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의 정신인 사람과 사랑, 생명과 평화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함께 어울려가는 세상’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입술의 종교냐, 마음의 신앙이냐” 中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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