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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물이 바다로 가듯이” - 猶川谷之於江海

기사승인 2018.08.13  18:4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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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32

“도는 항상 이름이 없어서, 비록 통나무처럼 작을지라도 천하에 누구라도 신하로 삼을 수 없다. 만약 제후나 왕이 그것을(그렇게) 지킬 수 있으면 장차 만물이 스스로 따르고, 천지가 서로 화합하여 감로를 내리고, 백성은 명이 없이도 스스로 고르게 된다. 제도를 시작하면 이름이 있는데, 이미 이름이 있어도 대저 장차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멈출 줄 앎으로써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 비유컨대 도가 천하에 그렇게 있는 것은 시내와 계곡 물이 강과 바다로 가는 것과 같다.”
- 노자, 『도덕경』, 32장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候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天地相合, 以降甘露, 民莫之令而自均,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 可以不殆.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도나 하느님은 여러 가지 은유로 표현됩니다. 노자에게서 도는 谷神, 현묘한 암컷(6장), 하나(抱一), 부드러움, 암컷(10장), 천하의 어머니(25장), 통나무, 갓난아이, 무극(28장)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 다양한 은유의 근저에는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자연이 자리하고 있고, 그 자연의 운행박식 혹은 존재방식은 억지로 함이 없는 무위가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통나무는 분할 이전의 원초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 통나무를 잘 다루는 자가 비로소 성인이 됩니다.

천하를 마음대로 지배하겠다는 욕망은 폭력과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무력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만물이 스스로 도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도는 마치 그릇을 만들기 전의 원목과 같이 이름이 없습니다. 나무로 물건을 만들면 물건의 모양을 칭찬하지만, 아무도 원목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Getty Image

이렇게 도는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는 비록 작지만,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왕이 신하를 부리듯 도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제도를 시작하면 군신부자장유의 이름이 있으나, 멈출 것을 알아야 위태롭지 않습니다. 이름에 따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도를 따라 멈출 때 위태롭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스리는 것은 도가 인간과 만물에 부여한 자연적 조건, 즉 자연의 명령을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이 길은 인간 자신의 자연적 조건을 이해하는 지성의 길입니다. 노자는 당시의 격언을 인용하여 자연의 도를 이해하는 것이 천하가 복종하며 천지의 조화를 얻는 길임을 강조합니다.

마음을 씻고 닦아 비워내고 / 길 하나 만들어 가리. //
이세상 먼지 너머, 흙탕물을 빠져나와 /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한, /
아득히 흔들리는 불빛 더듬어 /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가리. //
이 세상 안개 헤치며, 따스하고 높게 / 이마에는 푸른 불을 달고서,
- 이태수의 시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관계를 막는 벽은 이름을 지키려고 하면서 생겨났습니다. 이름이나 명예나 제도 등 사람이 만든 것이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싸우게 합니다. 이러한 갈등의 관계를 넘어서려면 자기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존재하게 하는 자존심이 심하게 구겨지고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은 자연 속에서 도를 품으려 하는 사람의 숙명입니다. 시내와 계곡 물이 강과 바다로 가는 것과 같이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내려놓는 과정을 통하여 존재들 사이의 벽은 스러질 것입니다.

적폐청산의 기치를 들고 출발한 정권이 이제 촛불민심을 서서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차기 정권 획득을 위해서 싸우면서도 인민들의 평화로운 삶을 위한 일들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정치적 권한을 물 흐르듯이 사용할 때에 인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자신들의 욕망을 멈출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민의 뜻을 따르는 것이 도를 따르는 것이고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딸의 귀신들림을 치유해 달라는 이방의 어머니,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모욕을 그대로 받아 안고 마치 자기가 개라도 된 것처럼 말합니다.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하는 여인의 말은 예수님의 전통적인 관념을 바꾸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개로 취급된 이방 여인의 놀라운 말씀(로고스; 믿음이 아니라)으로 빵이 자녀에게서 개에게로 넘어갑니다. 자녀의 빵이 개에게 넘어가듯이, 생명의 빵이 이방인에게 그리고 여성에게도 넘어간 것입니다. 여인의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하여 예수님의 활동은 새로운 지평을 얻게 되었으며, 인종과 이념과 역사와 종교의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방 여인의 사랑과 용기로 예수님 안에서 같은 인간으로, 하느님 나라의 주체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대 땅에 있는 무리나 이방 땅에 있는 무리나 똑같이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생명의 빵을 먹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자기 안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품으려는 활동이 없었다면, 십자가에서 양쪽을 하나 되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활동 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바다를 건너서 생명의 빵으로 양쪽을 똑같이 먹였습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시로페니키아 여인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뿐만 아니라 오늘 나의 삶 속에서 나와 남을 가르는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그만큼 노력도 해야 합니다. 노력뿐만 아니라 때로는 억울함이나 창피함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개처럼 생각되어지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벽을 허물기 위해 애쓰다 보면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을 당했던 것처럼, 자기를 너무나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향을 두루 다니면서 가르침을 멈출 수 없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진정한 공동체를 향한 벽 허물기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경계를 넘어서 담을 허물고 함께 하는 대동세상을 열기 위함입니다. 갈라지고 분열된 세상, 갈등과 혼란을 부추기며 힘으로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세상, 굶주리며 생존의 위협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서 그 벽을 허물고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시로 페니키아 여인처럼, 예수님처럼 서로에게 힘을 주며 함께 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너와 내가 주인이 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경계를 넘어서”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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