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평화의 적, 무관심

기사승인 2024.04.26  02:45:24

공유
default_news_ad1

- 적의 계보학⑤

일상화된 무관심

차승주(강원대 통일강원연구원 객원연구원)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의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낯선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난민들, 억압과 차별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회적·경제적 약자들, 학대당하는 아이와 동물들, 이름 모를 이웃의 고독사, 인간의 탐욕으로 생존을 위협받거나 멸종 위기에 내몰린 동식물들에 대한 뉴스를 듣는 것은 꽤 오래 전부터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뉴스를 보고 들으면서 약간의 혹은 잠깐의 연민이나 안타까움은 느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특별한 책임이나 관심을 가지지 않고 무덤덤하게 다시 자신의 삶에만 집중하는 것도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곳곳에서 매일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고 부당한 일들을 당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이 같은 비극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친다. ‘무관심의 일상화’다.

무관심이란 모든 자발성과 이상, 책임감으로 만들어지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모든 믿음을 파괴하며 우리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책임감을 거부하게 만든다.(1) 진리에 대한 무관심은 회의주의를, 도덕에 대한 무관심은 도덕적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낳는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왜곡과 망각을 가져온다. 또한 동식물에 대한 무관심은 환경의 파괴를 초래하며 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로 연결된다. 무엇보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사람 간의 단절과 고립을 야기하여 일상의 평화를 위협하고 공동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특히 지난 10여 년간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무관심은 우리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익숙한 정서가 되었다.

무관심의 세계화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4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2016년 1월 1일)」를 통해 ‘무관심의 세계화’와 세계화된 무관심에 위협당하는 평화를 우려하며 “무관심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룩”할 것을 호소했다. 담화문 발표에 앞서 2015년 8월에 발표한 성명에서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는 “오늘날 무관심은 개인주의의 다양한 형태와 연결돼 있고, 평화 구현의 걸림돌이 된다”며 “무관심은 고립과 무지, 이기주의 등 타인에 대한 관심과 헌신의 부재를 야기한다”고 말하며 제4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주제를 ‘무관심의 극복과 평화 구현’으로 정한 배경을 밝혔다. 이 담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관심을 “상대주의와 허무주의 사상과 결합된 그릇된 인본주의와 실천적 유물론의 최악의 결과”라고 말하며, 이러한 무관심은 무엇보다도 자폐와 냉담을 야기하여 결국 하느님과 타인과 피조물과 평화를 이루지 못하게 우리를 이끈다고 설파한다. 특히 하느님에 대한 무관심의 소산인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개인과 공동체의 차원에서 무기력과 냉담으로 나타나고, 이는 불의와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의 상황을 조장하여 폭력과 불안으로 악화될 위험이 있음을 경고한다.(2)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한 2020년 10월 3일 반포한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을 통해 무관심은 아주 위험하고 잔인한 태도라고 경고하며 세계화된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책임을 촉구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4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2016년 1월 1일)」에서 바오로 사도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라고 권유하거나(로마 12,15 참조)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교회의 어려운 이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모금을 할 것을 권유한(1코린 16,2-3 참조)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연대와 자비의 문화로 극복해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3)

▲ Pelegri Clave, 「El buen samaritano」 (1839) ⓒWikipedia

무관심한 사람으로 살아도 괜찮을까?

그람시는 무관심을 “무기력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함일 뿐 진정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악(惡)은 항상 소수의 사적인 욕망과 열망, 그리고 이에 순응하는 군중에 의해 결정되고 조종되는데,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러한 문제제기와 제안에 대해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관심은 종종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보다도, 그리고 도시를 지키고자 하는 전사들의 뜨거운 충성심보다도 훨씬 방어가 잘되는 깊고 깊은 늪이 되어 우리 모두를 비극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그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고 외친다.(4)

루카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루카 10,29-37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커다란 곤경을 보고도 도움을 주지 않는 이들,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루카 10,31-32 참조) 이들을 꾸짖으셨다. 강도를 만나 쓰러져 위험 중에 있는 사람을 보살피지 않고 냉혹하게 지나치는 ‘사제’와 ‘레위인’의 모습(루카 10,31-32 참조)은 오늘날 ‘무관심’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우리들의 모습을 성찰하게 한다. 무관심은 위험에 처한 약자들의 존엄성을 보호하지 않고 방기하는 잔인한 태도이다.(5) 이와 같은 도덕적 차원의 무관심은 사회생활과 사회 정치 제도의 비인간화로 이어지고, 그에 따라 죄의 구조를 더욱 견고히 하게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566항)(6)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기

일상화되고 세계화된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루카 복음 10장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에게 무관심을 극복하고 고통을 주는 이 세상을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되는 것이다.(「모든 형제들」 67항)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고통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법을 배우라고 요청하셨다. 할 일이 많아 바쁘더라도 자신이 지닌 수단을 동원하여 타인의 상처를 돌보기 위하여 걸음을 멈추라고 요청하신 것이다. 우리가 무관심과 냉담한 자세를 넘어서서 쓰러진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을 일으키고 회복시켜 가는 ‘공동선’을 추구할 때, 무너져가는 공동체는 재건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고통 앞에서 무관심한 삶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모든 형제들」 68항)(7)

미주

(1) 알렉산더 버트야니 지음‧김현정 옮김, 『무관심의 시대: 우리는 왜 냉정해지기를 강요받는가』 (나무생각, 2019), 27.
(2) 최용택, “[세계 평화의 날 담화(요지)]”, 『가톨릭신문』, 2015년 12월 28일(https://www.catholictimes.org/271167); “내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주제는 ‘무관심의 극복’”, 『가톨릭신문』, 2015년 8월 18일(https://www.catholictimes.org/269324)
(3) 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홈페이지.(https://cbck.or.kr/Documents/Pope/402568?gb=title&search=%ED%8F%89%ED%99%94&page=2)
(4)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김종법 옮김, 『나는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 그람시 산문선』 (바다출판사, 2016), 27-32.
(5) 김평만 신부, “무관심에서 벗어나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범 따라야”,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04월 20일(https://news.cpbc.co.kr/article/822517)
(6)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간추린 사회교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4), 415.
(7) 김평만 신부, “무관심에서 벗어나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범 따라야”,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04월 20일(https://news.cpbc.co.kr/article/822517)

차승주(강원대 통일강원연구원 객원연구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