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의 계보학㉒
▲박문수 소장은 6·25전쟁 가운데 자행된 학살을 대상으로 적의 계보를 확인하고 있다. |
6·25전쟁 전후로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적게는 30만 많게는 100만에 이르는 민간인이 희생되었다.(1) 가해 주체는 네 부류였다. 첫째는 적대 세력이었다. 소위 인민군으로 통칭할 수 있는 북한군이었다. 둘째는 국군과 경찰이었다. 셋째는 미군이었다. 넷째는, 첫째와 둘째 주체에 협력하거나 자발적으로 학살에 참여한 민간인들이었다.
나는 이 가운데 마지막 네 번째 학살 주체에 주목한다.(2) 학살이 일어난 지역으로는 경기도 남부와 충청남도 북부가 대상이다. 이 지역은 전쟁 중 전선(戰線)이 여러 번 오르내리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가 컸다. 그 탓에 적의 계보(系譜)를 잘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평범했던 주민들은 어떻게 서로 적이 되었나?
인간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평소와 달리 잔혹한 면모를 드러낸다. 이런 비극적 현실을 한국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현이 ‘전쟁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빼곤 모두 믿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6·25전쟁 때 이런 사례가 상당수 존재했다. 부부와 형제간에도 목숨 앞에서는 신의를 지키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물며 전쟁 전 사이가 좋지 않던 이웃끼리는 두말할 나위 없었다. 그러면 이 지역에서 같은 동네 사람끼리 왜 적이 되어 서로 죽고 죽이게 되었을까?
전선(戰線)의 잦은 이동
6·25전쟁은 여느 전쟁과 달리 전선이 여러 번 이동한 경우였다. 특히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북부는 이 전선이 여러 번 움직인 곳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한 달간은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쪽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 결과 경상도 일부를 제외하고 남한 전역이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3) 낙동강을 경계로 두 달여간 인민군과 유엔군이 격돌하는 동안 다른 점령지역에서는 공산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협조하지 않은 이들이 적대 세력에게 반동분자로 몰려 학살당했다.
1950년 9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인민군은 허리가 잘렸다. 퇴로가 막힌 인민군은 유엔군에 포로가 되거나 흩어져 게릴라가 되었다. 최정예 부대만 백두대간을 따라 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이다. 상륙작전이 성공하며 미군이 중심이 된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1951년 1월 초 한반도 허리에 해당하는 지역이 다시 인민군 수중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바뀐 것이다. 이후 몇 달간 유엔군이 거세게 반격하면서 전선은 다시 38도선 경계까지 밀려 올라가 그곳에서 정체되었다. 이후 2년간은 현재의 군사분계선 중심으로 전선이 고착(固着)되었다. 이렇게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북부 지역은 주인이 네 차례 바뀌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학살 발생 빈도가 높았고 피해자 규모도 컸다.
▲ 1948년 이승만이 이끄는 남한 정부가 서울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선포하자 북쪽 정부의 게릴라 지도자 김일성은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대한민국 통일을 위해 노력하던 북한군은 결국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국경을 넘어 남한으로 진격했다. ⓒhttps://korelimited.com/blogs/korelimited/6-25-the-forgotten-war |
주민 간 오랜 갈등
전쟁이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존 갈등이 전쟁을 통해 강화되는 경우다. 6·25전쟁 경험자들은 한결같이 이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이들은 평소 씨족 간 갈등, 지주와 소작인 간 갈등, 해방 후 좌우익 간 갈등, 주민 간 사적 원한이 깊었던 마을의 경우 학살 규모가 컸고 잔혹성의 정도도 심했다고 증언한다. 이는 전쟁이 새로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기존 갈등을 표면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흔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적의 계보
갑작스러운 일제의 항복 후 조선 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분할 점령하였다. 점령국 입장에서 조선은 자치 능력이 의심스러운 패전국 식민지에 불과하였다. 그러했던 터라 두 세력은 애초 조선을 자주 국가로 독립시킬 의사가 없었다. 그저 점령지역에 자신의 체제를 이식하여 두 체제가 만나는 ‘완충 지대(buffer zone)’로 삼고 싶어 했다.
1947년 말이 되자 유럽에서 시작된 냉전의 자장(磁場)이 동아시아까지 확산되며 조선 반도도 이내 냉전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1948년 한반도에서 체제를 달리하는 두 정부의 출현이었다. 이는 1945년 8월 15일 국토 분단에 이은 정치 체제의 분단을 의미했다.
남북의 독자 정부 수립은 해당 지역에서 다른 체제의 요소를 일소(一掃)하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 과정은 국토 분단 직후부터 진행되었다. 처음엔 남북 모두에서 여러 정파의 경쟁을 일정 부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북이 먼저 사회주의화에 속도를 냈다. 남은 이미 자본주의 체제였으므로 북의 체제를 따르는 정파와 세력을 정리하기만 하면 되었다. 남(南)에서는 이 과정이 더뎠다. 사회주의자들의 저항이 컸기 때문이다. 남과 북은 각기 다른 하나의 체제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반대 세력을 적으로 간주하여 탄압하였다.
북에서 탄압받은 이들은 계급 성분, 사회 성분이 좋지 않은 이들이었는데 반동분자로 통칭(通稱)되었다. 이들 가운데 1/3 정도가 6.25이전에 자진해서 월남하였다. 월남하지 못한 이들은 체제 저항 세력으로 남았다. 남에서는 미군정과 극우반공정권에 협력하지 않는 이들과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빨갱이’(6.25때는 부역자)로 통칭하며 탄압하였다.
이렇게 남북 모두는 체제 불만(불순응) 세력을 ‘적’으로 간주하였다. 이 적들 가운데 일부는 일찍이 처형하거나 투옥하였다.(4)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처음 1년간은 전선이 남북으로 오르내리고, 이후 2년간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정체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학살은 대부분 전쟁 직후 시작되어 1951년 3월까지 일어났다. 대략 8개월여에 집중된 셈이다.
미주 |
(1) 정부와 유족들이 추산하는 수치의 차이다. 정부는 30만 명 이하로 보려 하는데 학자들은 피해 규모를 30만 정도로 추산한다. (2) 미군은 두 번째 세력의 배후였다. 미국은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실질적으로는 이승만을 통하여 학살을 방조하였다. (3) 해군력과 공군력에서 크게 열세였던 인민군은 도서(島嶼) 지역을 점령하지 못하였다. 내륙의 깊은 산간 지역은 양측의 진격로에서 크게 벗어나 있어 전쟁이 일어난 사실조차 모르기도 했다. (4) 남한에서는 테러 형태로 나타났다. |
박문수(우리신학연구소장)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