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주석, 시민사회운동의 길을 열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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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에 눈이 먼 박정희는 자신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을 강제로 징집해 군에 입대시켰다. 황주석 선생도 그렇게 강제징집 당했다. ⓒ황주석기념사업회 제공 |
시간을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 중요한 일은 바로 군대 생활 3년 동안 일어났다. 내가 군대에 입대한 해가 1971년 3월이었다. 바로 1971년에 박정희 정부는 소위 반정부 학생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을 모두 잡아다가 강제로 군대에 입대시키는 소위 강제징집 위수령을 발동한 해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학생운동 탄압을 위해 1971년 10월 각 대학에 위수령을 내려 학생 1,800명을 연행하고 그중 160명을 제적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26일 제적 학생 30여 명을 강제로 징집해서 군대에 입대시켰다. 그리고 그 학생 중 상당수를 프락치로 이용해 운동권 조직을 색출하는 데 이용하는 만행을 잔행하였다.(출처:진실화해 위원회 자료)
바로 그 시기에 군대 생활을 하던 나는 내가 속한 부대에서 강제 징집된 2명의 운동권 학생을 만난다. 한 병사는 한국신학대학 학생 황주석이었고, 또 한 병사는 서울대학교 학생 장상환이었다. 황주석이는 바로 내가 속한 소대에 배치되었다.
나는 당시 일등병이었고 그는 나보다 4개월 정도 늦게 입대한 이등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군대에서 병사 간 한 계급, 4개월은 그 위계가 엄격했다. 그래서 나는 늘 황 이병! 하고 불렀고 그는 내게 김 일병님하고 깍듯이 존칭을 썼다. 사실 그는 49년생이었고 나는 50년생이니 그가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위였다.
우리 소대원 대다수가 시골에서 입대한 저학력자였고, 오직 우리 둘만 대학생 출신이었으니 약간의 동질감이 생겼고 그래서 둘이는 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보초를 서는 시간이면 우리는 일부러 둘이 한 조에 들어갔고 보초를 서는 한두 시간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는 무서운 박정희 군부독재 시대라 우리는 민감한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지만, 그때 나는 그가 위수령으로 입대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우리 둘은 1974년 봄에 제대하였고, 둘은 복학해서 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주석이가 나를 찾아왔다. 우리 둘은 찻집에서 반갑게 만나 묵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는 내게 그때도 김 병장님(제대할 때 내 계급)이라고 불렀고, 나는 여전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내게 이제는 제대했으니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말도 트고 지내자고 제안했다. 나는 웃으면서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그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석이는 나에게 교회에 같이 다니자고 제안했다. 나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교회에 다녔던 경험도 있고, 서울에서 다양한 친구들도 사귀고 싶었던 터라 흔쾌히 ‘그렇게 하자’라고 대답하고 몇 주 후부터 그를 따라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에 있는 서울 성남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차차 알게 된 사실은 주석이는 이미 군대에 가기 전부터 기독 학생 운동권(KSCF) 지도자급 학생이었고 그런 연유로 강제징집까지 당했었다. 소위 의식 수준이 대단히 높은 운동권 학생이었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강원도 영월군 출신의 순진한 대학생이니 새로운 기독 학생 운동권 영입 대상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와 함께 성남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그 후 나의 인생 항로를 정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주석이는 제대 후 그가 다니던 창현교회를 그만두고 서울 성남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성남교회는 신종선 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셨다. 신 목사님은 후덕한 성품을 지닌 목사님이셨고 대학생들과 청년들에게 무척 잘해 주셨다. 우리는 성남교회 대학생부 활동을 하면서 교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성남교회는 송창근 목사님이 세우셨고, 한국신학대학을 운영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시작한 비교적 진보적 교회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바로 문익환, 문동환 형제 목사가 소속되어 있는 교단이고 서남동, 박형규, 안병무 등 세계 진보 신학계 내로라하는 신학자들이 소속된 교단이었다. 그래서 학생 운동권 대학생들 여러 명이 주석이 권유로 성남교회를 찾아왔고 그들도 대학생부에서 활동하게 된다.
당시 성남교회는 대학생부에 지도교수를 한 명 두어 대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나는 교회 다닌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성남교회 대학생부 회장이 된다. 아마도 운동권 출신 대학생들은 드러나게 일하면 안 되니까 나를 회장으로 추대했던 것 같다. 그리고 부회장은 이화여대를 다니고 있는 홍미영이었다.
회장이란 직책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늘 붙어 다녔던 직책이라 어색하지 않게 받아 드렸던 것 같다. 그때 내가 회장으로 일하던 우리 대학생부 지도교수는 후에 한국신학대학교 총장이 된 주재용 교수님, 황성규 교수님이었고 그들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교수님들이었다.
우리 성남교회 대학생부는 매주 토요일 모여서 지도교수와 신학 공부를 하였다. 내가 처음 접한 신학서는 ‘인간화(부광석-브라이덴 슈타인, 연세대학교 교수, 독일인)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한 신학적 기본 지식과 더불어 소위 신신학이라고 불리던 진보적 신학-민중신학, 희망신학, 해방신학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 현실과 사회현실을 신학적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다. 나는 주재용 목사님과 1년에 걸쳐 매주 토요일 신학 공부를 하면서 가슴 뛰는 경험을 한다.
사실 나는 강원도 산골에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변변한 입시교육을 받아보지도 못했고,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인생에서 경제생활이 중요하니 경제학과를 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 대기업 사원이 되어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살아야 하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대에서 황주석을 만났고, 그로 인해 성남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교회를 다니면서 민중 신학자들을 만났고, 주석이를 비롯한 기독 학생 운동권 선후배들을 만나면서 내 인생 항로가 100% 뒤집혔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곧 노동 현장으로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된다.
대학교 4학년 졸업기가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진로에 관해 당시 성남교회 지도교수님이었던 황성규 목사님께 상의를 드렸다. 황 교수님은 자기보다 안병무 교수님이 잘 조언해 주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안 교수님을 소개해 주셨다. 그래서 안병무 교수님을 찾아가 내 진로상담을 하였다.
그때 안병무 교수님은 나에게 “자네나 나나 우리는 이미 지식인이라네, 그러니 참 노동자가 되기는 어려우니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하면 어떻겠나?’라고 조언해 주셨다. 마침 그 무렵 성남교회 신종선 목사님이 성남교회 사회관(사회복지사업체) 총무직을 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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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징집 당한 황주석과 만난 필자는 그 이후 학생운동과 시민사회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황주석기념사업회 제공 |
당시 성남교회 사회관은 공식 어린이집 한 반과 ‘거리의 아이들(구두닦기, 컴팔이 등)을 모집해 초등학교 기초과정을 가르쳐서 정규학교에 진학시키는 지역사회학교(약 60명 정원)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며칠 고민하다가 성남교회 사회관 총무직을 받아드렸다. 나는 총무 일을 시작하면서 기존 사업뿐만 아니라 서울지역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노동야학을 개설하였다.
1979년 어느 날 주석이와 신대균 등 몇 명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나에게 ’지금 YH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로 가 농성 중인데 이 사건을 지원해야 한다면서 성남교회 사회관이 지원본부 사무실 역할을 좀 해 줄 수 있겠냐고 제안하였다. 나는 그 일이 당시 정국에서는 나와 교회에 위험한 일이라고는 생각했으나 선뜻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였다.
그 후 황주석, 신대균, 이원희, 권순갑(YH 노조 부위원장) 등은 매일 우리 사무실에서 YH 노조 투쟁을 지원하는 대책회의를 했다. 당시 우리 사회관은 남대문경찰서에서 불과 수백 미터 내에 있었으나 끝까지 들키지 않고 YH 노조 투쟁을 지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때 에피소드 하나는 어느 날 주석이가 날 부르더니 ‘준식아, 큰일이다. 사실 내가 최순영(YH 노조 지부장) 씨 하고 사귀어 왔는데, 순영 씨가 지금 임신 중에 경찰서 감방에 구속되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라고 하였다. 나는 아무리 무서운 세상이지만 경찰들도 임신부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을 거라고 위로해주었고, 다행히 최순영 씨는 얼마 후 석방되었다. 그 후 둘은 결혼을 하였고, 그때 그 아이가 바로 지금 황민재 군이다.
나는 3년 후 성남교회 사회관 총무 일을 마치고 황주석, 이창식, 신대균 등과 함께 한국YMCA 간사가 되었다. 당시 한국YMCA 강문규 총무는 한국YMCA를 혁신하고자 기독학생운동권 출신들을 YMCA 간사로 영입하였다. 그렇게 나는 한국YMCA 간사로 일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YMCA 속에서 ‘사랑의 형제단’이란 노동자 모임을 만들었고, 노동조합 지도자 교육 등을 진행했다. 조희부, 정찬용, 민인기, 유희영 등 몇 명은 농민운동을 지원하였다.
나는 2004년 2월에 YMCA 간사직(당시 안양YMCA 사무총장)을 퇴직하고 이수민 목사님이 설립한 (사)세계선린회 사업국장 일을 시작하였고, 아시아지역 가난한 이웃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다문화센터인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관장 일, (사)아시안프렌즈 설립 등 평생 ‘인간화 운동’을 하면서 살게 된다.
내가 인생을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황주석이라는 친구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주석이 내 친구였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내가 살아온 인생도 자랑스럽다. 이제 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이웃이고, 사회적 소수자인 ‘노인’을 사랑하면서 ‘노인 인권운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김준식(세종시니어시민포럼 회장)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