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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을 통해 본 적의 계보학 (2)

기사승인 2024.12.18  0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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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계보학㉓

▲ 박문수 소장은 6.25 전쟁 당시 학살 과정은 적의 계보라고 정의했다.

다음은 학살 전개 과정이다. 이 전개 과정은 적의 계보이기도 하다.

개전 직후

인민군이 남진할 때 남에서는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명목으로 보도연맹원과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좌익 정치범을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 학살하였다. 이 피학살자들은 남(南)의 집권 세력에게는 진즉 제거했어야 할 대상이었다. 언제 이적 행위를 할지 모를 잠재적 적이었던 까닭이다.

남진하던 인민군은 지역 좌익과 함께 점령지역에서 남쪽의 반동분자를 학살했다. 이들은 이미 전쟁 전부터 혁명을 방해한 주역들이었거니와 살려두면 장차 적의 편에 설 것이 분명하므로 없애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들은 거추장스러운 적(반동)일 뿐이었다. 이때 희생당한 이들은 주로 군, 경찰, 공무원, 그들의 가족, 일제에 부역한 이들이었다. 이 시기에는 민간인들 사이에 사적 보복도 적지 않게 자행되었다. 전쟁 이전 갈등 구조와 ‘사감(私感)’이 ‘사형(私刑)’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수복(收復) 시기에 우익(右翼)이 보복 살인을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유엔군의 반격과 북진 시기

유엔군은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며 반격을 시작하였다. 상륙작전이 성공한 지 한 달여가 지나지 않아 유엔군은 압록강 국경까지 진격하였다. 남녘에 있던 미군과 한국군은 북상하면서 ‘지방 좌익과 함께 산으로 들어간 인민군’을 소탕하며 북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만든 52만 명의 부역자(附逆者) 명부를 기반으로 국군과 경찰은 점령하는 지역마다 학살을 시작하였다. 학살은 형식적 심사와 분류 작업을 통해 이뤄졌다. 이를 통해 52만 명 전부는 아니지만 이 가운데 상당 비율이 학살당했다. 특히 적극 가담자(통칭 부역자)들은 반드시 학살당했다.

이때 준(準) 경찰, 준 군사 조직에 가입한 마을 주민들이 부역자와 그 가족을 학살하는 데 관여하였다. 일부 민간인은 군경의 단순 보조 역할을 넘어 직접 처형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특히 적대 세력에 가족을 잃은 주민들과 평소 사감이 있던 이들이 부역 혐의를 받는 동네 주민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이때 희생당한 이들의 규모는 인민군에 의한 학살보다 몇 배나 컸던 것으로 확인된다. 인민군과 이에 합세한 지방 좌익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였다. 이렇게 한쪽은 희생에 대한 보복으로, 다른 한쪽은 다시 돌아올 때 방해가 될 세력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학살극을 벌였다.

중공군 남하 시기

1950년 10월부터 중공군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대규모로 증파된 중공군은 1951년 1월 공세를 시작하여 유엔군을 경기도 남부까지 밀어붙였다. 소위 이 ‘1.4후퇴’로 경기도 남부지역은 다시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 충청남도 북쪽 지역은 인민군에 점령당하지 않았음에도 미군과 국군은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부역자 가족을 학살하였다.

이 시기 다시 주인이 바뀐 이 지역에서는 국군에 협조한 이들이 처형당했다. 천안, 아산 지역에서는 국군과 경찰이 작전을 수월하게 진행한다는 명목으로 부역자 가족을 학살하였다. 이때 희생당한 이들은 대부분 부녀자였다. 10세 이하의 아이들도 많았다.

부역자 가족을 적으로 여겨 사형(私刑)에 나선 이들은 인민군 점령기, 후퇴기에 희생당한 이들의 유족이 많았다. 여기엔 불량배도 드물게 있었다. 사감이 있던 주민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모함으로 이웃을 죽인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중공군의 남하로 주민들 사이에 새로운 적이 만들어졌다.

▲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지인 마산 진전면 여양리 여항산 폐광(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https://jinsil.go.kr/KoreanWar/32.do

2차 유엔군 북진시기

1951년 2월부터 시작된 유엔군 반격으로 전선이 북상하며 수복된 지역에서 다시 학살이 일어났다. 공산군 점령 기간이 짧았던 데다 전황이 급박하여 1차 수복 시기보다 희생은 크지 않았다. 이 시기에도 보복을 명분으로 하는 사형(私刑)이 일어났다. 

이처럼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북부는 다른 지역과 달리 점령 주체가 여러 번 바뀌면서 양쪽 모두로부터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때는 물론 전쟁 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주민 간 갈등이 계속되었다. 전쟁 전부터 존재하던 갈등이 전쟁을 통해 증폭되었고 전쟁 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었던 것이다. 가까운 이웃 사이에 벌어진 갈등이었기에 후유증도 컸다. 이런 곳은 대부분 전쟁 이후 마을 공동체가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적극적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6.25전쟁 초기 8개월 동안 남북 양측이 서로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예로 들어 적의 계보를 구성해 보았다. 특히 마을 주민끼리 자행한 학살에 주목하였다. 그 결과 네 번이나 주인이 바뀐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북부 지역이 유독 학살 규모가 크고 잔혹성의 정도도 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살 규모와 잔혹성의 정도를 결정한 것은 전쟁 전부터 형성하고 있던 공동체의 상태였다. 공동체가 튼튼했던 곳은 피해가 없거나 적었다. 그만큼 전쟁 후에도 후유증이 적었다. 그러나 전쟁 전부터 씨족 갈등이 심했던 곳,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험악했던 곳, 주민들 간 각종 이해관계로 대립이 심했던 곳, 드물게 비이성적으로 설치는 사람이 있던 마을에서는 다른 곳보다 피해 규모가 컸고 잔혹성도 더했다. 그만큼 이런 곳은 전쟁 후유증도 컸다.

이는 평소 주민 간에 맺는 평화적 관계, 안전한 마을 공동체의 형성이 학살을 방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의 남북처럼 전쟁 후 화해를 시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애초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평소 ‘적극적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이유다.

박문수(우리신학연구소장)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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