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의 계보학㉚
![]() |
▲ 이혜숙 편집장은 기독교에 자정 능력이 없다는 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
이 귀중한 지면에 개인적 소견을 올리는 일은, 나로서는 크나큰 영광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여러분들의 좋은 글을 읽으며 내가 얻는 배움도 매우 크다. 비록 나는 개신교인이 될 수 없지만, 내가 깊이 신뢰하고 지지하는 목회자-신학자들이 가까이에 여러 명이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자랑으로 삼아 왔다. 나의 그 지인들이야말로 진정 훌륭한 종교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한편에서 이 나라를 최악의 시국으로 몰아가는데 앞장선 이들 또한 목회자라니, 그들의 언행이 커질수록 대다수의 선량한 개신교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안타깝다. 이웃 종교인으로서 내가 갖는 충정(忠情)에 기대어 감히, 몇 가지 소감을 솔직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미리 말하지만, 원래 나는 일상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평화주의자이다. 내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나의 유아기에 떼쓰거나 우는 일이 없어서 ‘바보인가’ 의심되었고, 학령기 사회생활에서도 누구와 싸워본 적이 없는 ‘순둥이’라고 했다. 그러나 불교를 학문하는 성인기에 이르러서 오히려 나는 시시비비가 늘었고, 심정이 격렬해지는 때가 많아졌다. 불자(佛子)라는 이름에 가당찮은 짓들을 종종 목격하는 탓이다.
그래서 한국불교계의 소위 대표 종단이라는 ‘대한불교조계종’이 잘못한 일들에 대하여 맹렬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불교단체의 임원도 맡아 왔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줄곧 나는 종교와 종교인 일반의 ‘올바름’을 탐구하고자 하는데, 일부 개신교도들의 행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다.
언제부터였는지, 서울의 광화문을 지나자면 누구나 ‘태극기-성조기-확성기’ 부대를 볼 수가 있다. 과거에는 어떤 분들의 여가활동이려니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무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나라의 장래에 미칠 영향력이 훨씬 커진 듯 느껴지기 때문에, 그 분들의 동태를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그 곳에 준비된 단상(壇上)에 오른 누군가의 말끝마다 참석자들이 “아~멘”으로 답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기독교인 집회일 것으로 짐작은 되는데, 괴상한 일이다. 자기네 교회에서 예배를 하지 않고 광화문까지 와서 공공장소를 예배당처럼 계속 독점하는 것은, 목회로 포장된 정치활동이고 시위(示威)일 터이다. 주위의 일반 시민에게는 해당 장소를 공유할 기회가 박탈되는 것이며 폭력적이기도 하다.
광화문과 같은 광장에 모여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나는 ‘아스팔트 신도’라고 부른다. 입가에 거품을 물고 거친 말투로 싸움질을 선동하듯이 진행되는 설교와 예배는 전혀 거룩하게 보이지 않는다. 아스팔트 광장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널리 유포되는 동영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언행이 시정잡배보다도 더 천박하던 그들은 목사-전도사들이라고 했다. 개신교단은 개별교회의 목회를 감독하는 기능이 없는가,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설교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목회자를 출교(黜敎)한 사건이 종종 보도가 되던데, 싸움꾼 패거리처럼 보이는 ‘아스팔트 목회자들’은 왜 계속 그 모양으로 그 자리에 설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보다 더 난해한 것은, ‘아스팔트 신도들’이 태극기와 함께 미국 국기인 성조기(星條旗)를 들고 나오는 이유다. 100년 전 미국에 세운 한국인 교회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내걸게 되었던 배경은 이해한다. ‘도적같이 찾아온’ 해방과 미군정(美 軍政)을 거치고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에 의존했던 우리나라에서, 교회일지라도 예외 없이 성조기 게양으로 환영을 표시해야 했던 정황도 이해될 수 있다(1).
![]() |
▲ 한국 주류 개신교의 극우적 모습은 이방인의 눈에도 흥미로운 점이다. ⓒReuters |
그러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온 세계가 알다시피 엄연한 자주독립국임에도 불구하고, 바다 건너 미국을 향해서 무엇을 바라며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것인지, 그 답을 알기도 전에 나는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스럽다. 나처럼 학문이 깊지 못한 이교도(異敎徒)의 지적에는 혹시 기분이 언짢으실 독자가 있을까 해서, 이 문제의 권위자인 故 리영희 교수의 오래 전 글을 아래에 인용함으로써 동조를 표시해야겠다.
“한국의 기독교가 지배 권력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체질도 문제일 것 같다. 일제 식민시대에는 일본천황 귀신인 신도(神道)의 신사참배에 굴하고, 이승만 시대는 그 야만적 통치를 찬성하고, 박정희 유신독재시대에는 그 폭력통치 권력과 유착하고, 전두환 살인정권의 ‘조찬기도회’로 바쁘고, 미국이라면 성조기 들고 나와, ‘아이 러브 유에스에이’를 합창하면서 마치 미국인이 된 듯이 황홀해 한다. 미국이 침략전쟁으로 전 세계의 규탄을 받아도 남한에서만은 예수교 신자들의 사랑을 받는다.”(2) |
위의 인용문에 마침 “한국 기독교가 지배 권력을 좋아하는 체질”이라는 언급도 나와 있지만, 그런 평가를 한마디로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시다시피 최근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아스팔트 신도들의 예배에 정치인들이 몰려간다. 심지어 막말대장 목사에게 어느 5선 국회의원은 ‘너무나도 존귀하신 목사님’이라며 깍듯이 90도 절을 했다.
그런가 하면 부산에서는 8명의 목사가 모여 ‘한국 공무원불자연합회’ 회장이라는 사람에게, 교육감 선거 후보자로서 승리를 기원하는 안수기도를 했다. 교육감 당선을 바라며 공공연한 불자에게조차 안수기도를 하다니, 그들의 기독교는 ‘권력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체질’이라고 평가되어도 무방하지 않은가. 정치-종교계가 사방팔방으로 끈적끈적한 유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이라서, 심히 걱정스럽다.
그런 목회자들의 경향보다 더 희한한 것은, 그들과 함께하는 아스팔트 신도들의 태도이다. 본래 개신교도는 아예 드러내놓고 정치지향적인 목회자들을 추앙하고 지지하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황당하게 느껴질 가짜뉴스 –대한민국 공산화· 중국간첩 등- 를 의심 없이 공유한다. 또, 신도들의 헌금 외에도 ‘공산화 막기 위해 알뜰폰 가입’ 등을 강권하는 영업자 목사에 대해서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모양새다.
그러나 신도가 주민으로서, 만약 이웃집 사람이 권하는 일이라면 초장에 의심하고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목회자와 그 신도들 사이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작동하고 있는가. 소위 “믿음”이라는 것의 정체가 여전히 궁금하다.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에 의하면, 종교는 인지혁명과 함께 등장하였고 그로써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말하게 되었다. 예컨대 사회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취약하기 마련인데, 거기에 종교가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안정을 가져온다. 사람들이 모여 공통의 신화를 믿고 그 공통의 믿음이 지속되는 한, 가상의 실재[허구]는 현실세계에서 힘을 발휘한다.(3)
그러므로 ‘아스팔트 신도들’이 작금의 허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현실세계는 그대로 고착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조심스럽게 덧붙이고 싶은 말은, 아스팔트 신도들이 “아멘”을 외치기 전에 각자가 품은 신념을 한 번 더 점검해볼 수는 없겠는가.
참고로, 불교는 원론적이나마 불자의 요건으로서 믿음[信]- 이해[解]- 실천[行]- 증득[證]의 전 과정을 유기적으로 통합한 신행체계라고 설명한다. 불교에 있어서 ‘믿음’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믿음과 아울러, 크게 의심하여 공부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불교신자라는 말 대신 불교행자라는 말을 선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이 순간도 아스팔트에서 목회자의 말끝마다 “아멘”을 외치고 있을, 어떤 개신교도들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미주 |
(1) 홍승표, 『태극기와 한국교회』 이야기, 2022, pp.318-345. 참조. (2) 리영희,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한길사, 2005, p.276; p.163, p.323 등 참조. (3) 조현욱 옮김,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8, pp. 48-59; p. 298 참조. |
이혜숙(불교평론 편집위원장)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