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 Gaspare Traversi, 「Job mocked by his wife」 (1750) ⓒWikipedia |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냐? 그를 위하여 사기를 치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세워주냐? 그를 위하여 싸우냐?(욥기 13,7-8) |
이것은 욥이 그를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욥이 생각하는 친구란 친구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를 편들어주고 지지하고 그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욥은 여기서 한걸음 더나아가 비록 이 친구가 통상적인 관념에 따라 하나님에게 징계를 당하고 벌을 받는다고 해도 이 친구 편에 설 수 있어야 친구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태도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아마도 수백 키로 이상의 거리를 달려 왔고 욥과 함께 일주일 동안 재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욥의 참담한 모습에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만한 친구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친구들이었는데, 왜?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욥은 재난으로 자식들을 잃었고, 가진 것을 다 잃었습니다. 아내만 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했을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물론 그의 말을 다르게 번역해야 합니다. “아직 당신이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으십시오.”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요? 여기에는 비난이나 조롱의 뜻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아직’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당신이 온전함을 잃기 전에’가 될 것입니다. 아내가 무엇을 걱정하든 아내의 염려가 느껴지지 않는지요? 욥은 이를 쓸데 없는 말 한다고 일축했지만, 아내는 무엇을 보았기에 그리 말했을까요? 그의 고통뿐이었을까요?
온전함은 이 상황에서 신앙적 온전함일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는 모든 것을 다 잃은 욥이 신앙적 온전함 마저 잃고 죽는 것을 염려한 것 아닐까요?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고 있다고 해도 신앙만은 지키기를 바라는 아내입니다. 그는 욥 자신이 모르는 욥의 변화를 읽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와 함께 아픔을 같이 하고 있으니 욥은 위로를 받고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에 사로 잡혀 아내의 말대로(?) 죽기를 바라지만 자기를 살려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창조 말투를 흉내내며 자기의 난 날을 저주합니다. 아내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아내의 반응은 언급되지 않지만, 친구들과는 달랐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현실이 무엇을 의미하길래 아내가 그리 걱정했던 것일까요?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도 하나님을 잃는 욥의 행동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고, 따라서 그가 죽는다 해도 그 죽음 마저 친구들에게 외면당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잃었는데, 거기에 하나님도 친구도 잃는다면,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아내가 지켜주고 싶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온전함, 그리고 하나님과 친구들!
그런데 친구들 앞에서 무장해제된 욥의 원망과 탄식으로 그것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은 자기들 앞에서 욥이 쏟아놓는 한풀이를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충고로 논쟁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격한 비난을 하는데까지 이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유없이 이렇게 무거운 벌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친구여서 넋두리하는 욥에게 이러한 친구들의 태도는 야속해도 너무 야속한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이 욥에게 그토록 큰 시련을 안겨준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있는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변호인이 된 것 같은 그들에게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최소한 이렇게 큰 벌을 받을 일은 하지 않았다는 욥이 자신들과 하나님을 속이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간격은 기나긴 논쟁을 통해 좁혀지기는 커녕 더욱 벌어지고 깊어져만 갑니다. 고난 이전까지는 욥도 친구들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 속에서 교리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고난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달은 그는 친구들처럼 말할 수 없고 그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있음을, 설명할 수는 없으나 악과는 무관한 고난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교리에 의해 재단되고 그에 따라 정죄당하고 죄고백을 강요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견디기 힘들었지만, 하나님 밖에는 그의 정당성을 입증해줄 이가 없는 답답하기 짝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이지만 그는 교리적 사고와 판단에 온 힘을 다해 맞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욥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에게 항변하고 하나님 뵙기를 청하는 '무례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친구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 내지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교리의 한계가 그들의 인식의 한계가 된 것입니다. 욥의 현실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외침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편드는 것은 고통당하는 자의 편에 서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교리적 사고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교리적 사고 밖에 있는 것들을 교리적으로 판단하며 배제하고 혐오하고 차별하고 정죄하고 억압을 정당화하고 지배를 공고히 하는 태도는 오늘날에도 여러 영역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자유로와지기는 끝까지 욥과 평행을 달린 친구들에게서 보는 대로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변호인 되기를 포기하고 대신 사람의 아픔을 보고 신음을 들을 수 있는 맑은 마음이 있으면 하늘이 기뻐할 것입니다. 교리적 사고를 덜어낸 비워진 마음을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희망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작고 지치고 고달파하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감동하는 오늘이기를. 사람을 중심에 놓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이날이기를. |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