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애굽기 강해 38(출애굽기 34:4-7)
▲ 깨뜨린 돌판을 대신해 다시 돌판을 깎은 모세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Getty Images |
4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대로,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같이 깎았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는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으로 올라갔다. 5 그 때에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그와 함께 거기에 서서, 거룩한 이름 ‘주’를 선포하셨다. 6 주님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7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출3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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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사건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 두 가지를 꼽으라면 여러분은 어떤 장면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첫째는 뭐니 뭐니 해도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그 장면이겠죠. 하나님께서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그 장면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다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가고 이집트 병사들은 물에 잠기는 극적인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진짜 핵심은 출애굽기 14장 13절에 나오는 모세의 말씀입니다. 모세는 바다가 갈라지기 전에 백성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오늘 주님께서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보십시오.”
홍해 바다 사건의 핵심은 첫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의 눈 앞에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눈앞에 사건으로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진짜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증거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는 ‘바로 그 구원 사건에서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나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나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홍해 바다 사건의 핵심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의 결정적인 두 번째 사건은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산 아래에 있던 백성들은 좀이 쑤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뭐하고 계신가? 우리를 잊어버리셨나?’ 아론의 옆구리를 쿡쿡찔러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이 금송아지 사건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으로써 금송아지를 만들었나요?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시고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야훼 하나님을 더 이상 못믿겠다. 이제 그 하나님 버려버리고 금송아지 새로 섬기자’ 이랬나요? 아닙니다.
출애굽기 32장 5절 말씀에 아론이 금송아지 앞에 제단을 만들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키자.”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는 이제 야훼 하나님을 믿기 싫다. 다른 신을 섬기겠다’ 하고서 금송아지를 섬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안달이 났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서 참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지 못해요. 하나님의 시간표가 아직 안 됐는데 왜 아직 역사 안 하시느냐고 왜 눈앞에 안 나타나시느냐고 자기 자신을 왜 안 보여주시느냐고 조급했어요. 그래서 제멋대로 하나님의 모습을 만들고 ‘이게 하나님이다.’ 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내 앞에 하나님이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것이 금송아지의 정체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잘못된 신 우상인 금송아지를 섬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하나님이 내 입맛에 딱 맞게 등장해야 하는데 왜 안 나타납니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제멋대로 만들고 내 뜻대로 하나님이 내 앞에 내 옆에 있도록 강제한 사건이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과 금송아지 사건을 연결시켜 보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행하시면서, ‘너희는 가만히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지켜봐라’ 하셨는데,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고 잠잠히 있지 못하고 ‘지금 내가 원하는 이 때에,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딱 요렇게 하나님 왜 구원 안 해주십니까?’ 하고 제멋대로 하나님을 강제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을 잘 들여다보면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의 배신 사건입니다. 성경은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두 가지 사건이 계속 끊임없이 순환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데 백성은 배신합니다. 그래도 또 용서하시는데 인간은 또 등돌립니다. 또 자비를 베풀면 또 제 갈 길로 가버립니다. 이 끝없는 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야 하는가? 우리에게 던지는 성경의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데, 그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관점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의 관점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관점입니다만, ‘나의 구원, 내가 얻어야 할 구원, 내가 획득할 은혜’만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의 신앙이 왜곡됩니다.
다른 한편에 또 다른 중심축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은 항상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는구나.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죄짓는구나.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하나님께 반역했구나. 이것이 인간들의 잘못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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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사건에서 우리는 계속 모세를 눈여겨보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배신이 끊임없이 계속되는데 이 절망적인 순환을 끊을 수 있는 단초를 우리는 모세에게서 찾아보려 합니다.
금송아지 사건에서 모세는 어떤 신앙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첫 번째로, 자신의 화와 분노와 용서에 대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이나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옵니다. 얼마나 거룩해졌을까요?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충만해졌을까요? 얼마나 소망으로 들떠 있을까요? 거룩한 비전을 품고 마침내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제일 먼저 보게 된 모습이 무엇입니까?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나누기 위해서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만들고 흥청망청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십계명 증거판을 던져버려 박살내버립니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 그 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모세는 분노와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가 내 백성들을 심판하겠다 하실 때, 하나님을 막아섭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모세가 하나님을 달래는 양상입니다.
모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이것입니다. 잘못에 대해서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과 그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별개로 구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용서는 잘못 자체를 무마하는 일이 아닙니다. ‘별것 아니라고, 남들도 그런 일쯤은 다 하고 산다.’고 그렇게 얼버무리는 용서가 아닙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철저히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그 잘못한 사람의 처분에 있어서는 용서하고 품어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될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갖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에게서 등 돌리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 진짜 사랑을 할 수 있고, 이 마음이 있어야 진짜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사랑하지 못하고 진짜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억지로 하려니까 그렇습니다.
분노 자체를 억지로 가라앉히려고 하니까 없어지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억지로 달래려고 하니까 되지 않습니다. 분노는 가라앉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분노는 계속 불타올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가지고 사람을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모세는 하나님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에 무슨 시험이 있었습니까?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십니다. 금송아지를 섬기고 그 앞에 절했던 백성들은 다 심판해서 싹 없애버리고, 내가 너 모세만을 구원하여 너의 후손으로 가나안을 차지하고 큰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솔깃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나 혼자 누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게다가 좋은 명분까지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아도 싸지. 저들이 하나님을 배신할 때 나는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인데, 당연히 내 자손들이 복 받아야지’ 그렇게 정당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시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굽니까?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공정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한테 제안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래 마음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이런 말씀하시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고서 오히려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하나님의 시험을 이겨냅니다.
‘나의 바람이 무엇인가? 나의 생각이 무엇인가? 나의 목적이 무엇인가? 나에게 무엇이 이득되는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서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비추어 판단해 봤더니, 지금 이 제안을 하시는 하나님마저도 틀렸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장면에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배신하고 금송아지를 섬겼으니, 더 이상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수 없고, 너희들은 더 이상 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대신 처음 약속했던 가나안 땅은 너희들에게 주겠다. 다만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는 않겠다.’
백성들로서는 꽤 괜찮은 제안 아닙니까?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 심판받고 정죄당해 죽어 마땅한 지경인데 오히려 하나님은 처음 주시겠다고 하셨던 복을 다 주시겠답니다. 다만 우리와 함께 하지는 않으신답니다. 생각해보면 좀 괜찮은 처분인 것 같지 않나요? ‘이제 다 끝났구나’ 하는 판에, 복은 복대로 다 주시겠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최고의 시험입니다.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진짜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세상의 복락 누리는 게 은혜입니까? 대통령 되어서 최고의 권력 가져보는 게 복입니까?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가 되어서 내 멋대로 경제를 휘어잡아 보는 게 그게 최고의 복입니까? 남들은 꿈도 못꾸는 그런 쾌락을 누려보는 것이 복입니까? 자손들 다 잘되고 서울대 들어가고 판사 검사 되고 하는 그런 게 복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복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복을 걷어차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탄의 유혹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높은 곳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다 보여주고는 ‘너 나한테 절하면 이거 다 주겠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뭘하고 하십니까?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섬겨라.” 이렇게 사탄을 물리칩니다.
하나님의 이 시험 앞에서 백성들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백성들의 대답은 적혀져 있지 않지만, 모세가 백성을 대신해서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면 어떤 복이라도 누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다면, 로또 1등 당첨되는 것도 소용없고, 건강해서 100세 200세 사는 것도 의미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다면 내 자손들 잘되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얻고 그런 것도 다 소용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 하나님이 나와 함께해 주시는 것 나는 그것만 바랍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대신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바로 이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신앙을 꿈꿔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가’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구원사건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심판의 날 앞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는가? 성경은 모세를 통해서 배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을 보면 피조물이 이 세상에 모든 고난과 아픔과 허무에 굴복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롬8:19). 이 말씀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절망 앞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간절히 바랄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세요’ 이런 바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이 우리의 생각과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만 가지고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바울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이 땅이 구원 받는 것입니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세상을 구원하고 싶어도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구원도 이 세상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역할, 하나님의 자녀의 역할을 우리가 해야된다는 것을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구원받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면 되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나와 하나님 간의 일대일의 개인적인 관계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이웃과의 관계로 넓혀지고, 세상과의 관계로 확장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세상을 어떻게 만나고 내가 세상을 어떻게 대하고 세상을 어떻게 감싸안는가? 그것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바울은 설파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출애굽기 말씀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깨뜨려 버린 십계명 증거판을 다시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선언하십니다.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출34:6).”
하나님의 사랑의 정체가 뭘까요? 하나님의 자비로움의 정체가 뭘까요? 하나님께서 사랑이 많다는 것, 하나님께서 자비롭다는 사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진짜 정체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사랑의 사람이 되고 자비의 사람들이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의 진짜 핵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존재, 사랑의 존재가 되지 못하면, 백날 하나님이 사랑이셔 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자비롭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 혼자 자비로우셔 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시는 분입니다. ‘나 혼자만 거룩하다. 너희들은 거룩하든지 말든지 상관없다. 그저 거룩하면 구원해주고 거룩하지 않으면 심판하면 된다’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까? 하나님처럼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진짜로 알고 진짜로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사도는 분명히 선언하며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도 사랑의 존재들 되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