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를 짓는 농부이야기 17
▲ 감나무에 달린 까치밥 ⓒ유대은 |
마을에 들어와 산지 7년 정도 되었다. 그 때부터 가을 추수 때가 되면 매년 쌀 20키로 한푸대를 말없이 놓고 가시는 마을분이 계신다. 처음에는 쌀농사 안 짓고 있으니 밥맛이라도 보라고 주셨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벼농사를 짓는 것을 알고 계시지만 여전히 한 푸대씩을 갖다 주신다. 감사해서 전화를 드리면 쌀이 없어서 주는 것보다 마을이웃이니 주는 거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유제’라는 말이 있다. 지역 사투리로 ‘이웃’이라는 단어다. 마을분들은 유제가 친척보다 더 가깝다고도 한다. 그만큼 자주 보고 만나고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옆집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유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본인 농지의 옆 땅에서 농사 짓는 사람도 ‘유제’다. 우리는 마을의 우데미(윗) 쪽에 사는데 이쪽에 이웃하는 분들이 우리 집의 ‘유제’다. 핸드폰이나 집가전, 수도 등 이상이 생겼을 때는 내가 가서 돕는다. 반대로 때가 되면 나에게 심을 씨앗도 주시고 밭의 뒷똘을 돌아봐 주시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얼마 전까지 인사하며 지냈던 두 유제 분들도 연세가 많으셔서 요양병원과 도시의 자녀댁으로 들어가셨다. 일구지 않는 밭은 금세 풀밭이 되었고 다니는 사람이 줄어든 만큼 마을 뒷길의 풀도 무성해졌다. 길쪽으로 넘어온 풀은 내가 예초기로 작업을 해보지만 이웃분들의 부재로 인한 마을의 풍경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올 9월 폭우가 내려 아랫논으로 방천이 났다. 논둑이 무너지면서 아랫논의 뒷똘을 막아버렸다. 삽으로 일단 큰 불은 넘겼지만 아랫 논유제이신 아재를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겨울에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자연을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겠냐며 본인이 장비가 있으니 정리하겠다고 하셨다. 추수가 끝날 무렵 논을 정리하러 가보았더니 논으로 포크레인이 들어갈 자리를 직접 정리하시고 방천난 논둑을 보수해주셨다. 농사가 마무리되면 과일이라도 사서 감사인사를 해야겠다.
농촌의 가을은 사람에게도 짐승에게도 풍성하다. 가을철이 되어 집집마다 있는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익어서 딸 때 쯤 보면 열매의 일부를 남겨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새들을 위해 남겨두는 ‘까치밥’이라고 한다. 과실을 한 개도 남겨두지 않고 모두 따는 집은 단 한 집도 없다. 모든 집들이 조금씩 열매를 남겨두어 새의 ‘밥’이 되게 한다.
새들을 위한 의미도 있지만 밀, 보리 등 맥류 파종시기와 맞아 종자의 소실을 줄여주는 효과도 있다. 새들과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의식이다. 그리고 고시레라는 말이 있다. 밭이나 논에서 참을 먹기전에 ‘고시레’라고 외치며 음식의 조금을 던지는 의식이다. 나 혼자 먹지 않고 베풀어 준 자연과 동물들과 감사하는 행위이다. 농부는 감사의 마음으로 던졌지만 때로는 배고픈 멧돼지가 논둑의 지렁이를 먹기 위해 파헤치는 행위를 줄여주는 역할도 한다.
학교에서 생태텃밭을 진행하면 가장 많이 만나는 분이 있다. 바로 학교 환경을 관리하는 주사선생님이다. 수업을 나가는 한 학교의 주사선생님께서 새로 오셨다. 생태텃밭의 의미를 잘 설명 해드리고 풀관리 하실 때 텃밭부분은 제초제 사용을 자제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리고 서로 관리하는 구역을 정해 일절 간섭을 하지 않기로 했다.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선생님께서 학교 텃밭 옆 빈 하우스에 노지에서 키울 수 없는 작물을 심으셨다. 역시 하우스라 무럭무럭 잘 자랐고 생태텃밭보다 먹을 것도 많았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만나 나에게 말씀해주셨다. 아이들이 필요한 만큼 따서 먹어도 되고 관찰도 하고 필요하면 가져가도 된다고 하셨다. 오히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배려를 많이 해주셨다. 학교 환경 관리 하는 일도 많으실텐데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을 보고 한번 더 배웠다. 주사선생님이 농사지으시는 학교하우스 안에는 둘둘말린 비닐봉지가 놓여있다. 남겨 놓은 ‘까치밥’처럼 필요한 누구나 수확해가시라는 선생님의 배려다.
농사를 통해 자연에서 얻은 지혜를 가진 촌부들의 생각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것은 열매 한 개도 남기지 않고 수확해 버리거나 오히려 다른 이의 노력 조차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게 지금의 자본주의 아닌가. 성서에서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삭을 일부러 밭에 남겨놓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장면이다. 그 배려는 되려 자신에게 좋은 영향으로 돌아온다. 마을유제분의 쌀 한푸대, 감나무의 까치밥, 논밭에서 들리는 고시레, 학교 하우스의 비닐봉지처럼 우리는 무엇을 남겨놓을까.
유대은(기장 총회사회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