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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이기는 사람은 강하다” - 自勝者强

기사승인 2018.08.20  22: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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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33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밝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고, 자기를 이기는 사람은 (의지가) 강하다. 만족(분수)을 아는 사람은 부유하고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다. 그 있는 곳을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머문다.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다(죽을 때까지 중간에 목숨을 망치지 않는 사람은 수명을 다할 수 있다).”
- 노자, 『도덕경』, 33장
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知足者富, 勤(强)行者有志,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忘)者壽

남을 이해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남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자기를 둘러싼 편견과 선입견이 나와 남을 바르게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남을 아는 것이 智慧라면 자신을 아는 것은 밝음입니다. 밝음은 내성을 통해 얻어지고, 내성은 내면의 소리와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노자에게서 앎(知)은 智慧와 크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Getty Image

노자에게서 知와 智慧가 분석적인 이해와 지각의 차원이라면, 明은 세계와 자신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활연관통(豁然貫通)의 혜안입니다.

“항상성을 아는 것이 명이다”<16장>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람(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사람)은 밝지 못하다.”<24장>

노자는 자족의 비결을 지닌 사람은 부유하기도 하지만, 굳세게 행하는 사람은 뜻을 지닌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강함은 의지가 굳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이 부여한 소명인 천명을 알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지키는 자는 그 덕망이나 생명력이 오래 갑니다. 자신의 본분과 타고난 재능을 잘 발견하여 그 길을 가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문득문득 오던 길을 / 되돌아본다 /
왠가 꼭 잘못 들어선 것만 같은 / 이 길 //
가는 곳은 저기 저 계곡의 끝 / 그 계곡의 흙인데 /
나는 왜 매일매일 / 이 무거운 다리를 끌며 / 가고 있는 것인가 //
아, 돌아갈 수도 / 주저앉을 수도 없는 / 이 길.
- 이영춘의 시 “길”

남을 언뜻 이해할 수 있는 작은 지혜를 가질 수는 있으나, 진정한 자기를 깨닫고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기를 깨닫는 일이라면 자기 속에 있는 온갖 부정성의 소거, 즉 마음을 청결하게 한 연후에라야 하느님의 참 밝음(明)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하느님을 안다는 것과 통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순복하는 일이 진정 자기를 극복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거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길이요, 자기 자신을 이기는 길입니다.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不忘의 길은 자기를 아는 自知로부터 시작하여, 자기를 이기는 自勝의 단계를 거쳐, 自足을 통한 자기자리를 지키는 것(不失其所) 곧 하느님이 부여한 천명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고 자기를 이기고 자기에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려면, 먼저 똑바로 보고 듣고 제대로 말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한자의 거룩할 성(聖) 자에서처럼 점점 더 귀와 입을 크게 여는 것입니다. 또한 제대로 듣고 더 올바르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를 여는 것입니다. 더 넓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똑바로 보고 듣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허위사실과 거짓을 강요하고,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사람들을 호도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치료합니다. “파따!”(열려져라!) 무거운 짐에 눌린 듯한 한숨과 함께 터져 나온 외침으로 그는 이제 귀가 열려졌고 혀가 풀려져서 똑바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열려져라!”하고 말한 것이나 열리고 풀리는 동사는 모두 수동태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는 것은 상호작용입니다. 자기만의 노력만으로는 제대로 보고 올바르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은 자기만의 생각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소통 속에서 그러합니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도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속성은 변화입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죠. 그 변화가 어느 방향을 향하느냐에 따라서 성장이라고 할 수도 있고, 퇴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어느 순간까지는 몸과 마음이 함께 성장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몸은 늙지만 마음은 더욱 성장하고 지혜로 충만해 집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이 자라면서 더 많이 듣게 되고, 더 많이 보게 되고,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더 올바르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를 여는 것입니다. 더 넓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제대로 듣고,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깊은 성찰을 계속합시다. 예수님의 길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든 오늘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현실에 관한 것이든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기까지 스스로 삼가고 노력합시다. 사회적으로는 역사와 현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도록 눈과 귀를 활짝 열어 놓고 느낍시다. 모든 것을 분명히 보고 듣고 알 때까지 나를 돌아보고 역사와 현실을 숙고합시다. 그리고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예수님의 길을 따라갑시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귀가 열려지고 혀가 풀려져서” 中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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