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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을 끊으면” - 絶學無憂

기사승인 2018.05.21  22:5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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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20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예’(라고 대답하는 것)와 ‘응’(이라고 대답하는 것) 사이에 서로 얼마나 가까운가? 선함(아름다움; 이라고 하는 것)과 악함(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 얼마나 서로 같은가?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를 (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荒唐(황당)하도다!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 / 뭇 사람들은 (양, 돼지 소를 제물로 바치는) 큰 연회를 누리는 것처럼, 봄날에 누각에 오르는 것처럼 화목하게 즐기는데,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갓난아기처럼 나타나지도 못하고 홀로 머무는구나!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고달프고 고달프구나! / 뭇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있으나, 나는 홀로 남겨져 있다. 나는 마음이 어리석은 사람이로구나! 사리에 어둡구나! / 세상 사람들은 밝고 밝은데 나는 홀로 어둡고 어둡다. 세상 사람들은 잘 살피는데 나는 홀로 답답하다. 나는 바다와 같이 맑구나! 그치지 않는 바람소리 같도다! / 뭇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쓸모가) 있다. 그러나 나는 홀로 고루하여 미련하다. 나는 홀로 다른 사람과 다르다. 그러나 나는 食母(식모)를 귀하게 여긴다.”
- 노자, 『도덕경』, 20장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美)之與惡, 相去若何.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人). 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如嬰兒之未孩. (儽儽)兮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飂兮若無止.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我(欲)獨異於人, 而貴食母

識字憂患(식자우환, 아는 것이 병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성인이 만들었다는 예법이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는 현실을 볼 때, 노자는 이런 인위적인 학문을 끊으면 예절과 명분의 혼란이 사라져 다스림에 근심이 없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학문을 익히는 동기는 마치 봄날 누각에 올라가거나 제상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학문을 통해 벼슬과 명예, 이익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지식을 가진 자에게 벼슬과 이익이 있는 한, 예법을 익히는 학문은 사람의 욕망을 일으킬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노자는 개탄하면서 자신의 결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노자는 예법을 배우러 다니지 않으니 스스로 외톨이라고 말합니다. 노자가 스스로 선택한 길은 어리석고 촌스러운 삶입니다.

심성을 어지럽히지 않는 이 길이 진정으로 자연의 질서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노자는 食母(식모)를 귀하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식모는 생명을 살리는 어미를 뜻하니, 만물을 기르는 자연의 도를 뜻합니다.

ⓒGetty Image

배움을 끊으라고 할 때는 배움, 즉 깨달음에서 얻어지는 희열보다는 도리어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겠죠. “학문은 날마다 더해가는 것이지만, 도는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도덕경 48장) 자기를 덜어내는 것을 마음공부라고 할 수 있는데, 노자의 마음공부는 단순한 도덕적 성찰이 아닙니다. 인식태도를 이해하고 나아가 전환된 의식을 통해 사물의 실상과 만나는 깨달음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도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정치가 벼슬과 이익으로 백성을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만들었다는 예법 또한 인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성인의 정치는 자연의 조화를 파괴하는 길이며 고통과 근심을 초래할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규명한 노자는 홀로 외로운 길을 걷는 결단을 내리고 食母를 지키고자 합니다. 자연의 도는 곧 만물을 낳고 기르는 식모와 같기 때문입니다.

모든 길이 열려 있습니다.
수많은 길이 있지만
내가 걸어가야 길이 되어줍니다.

아무리 좋은 길도
내가 걸어가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한 풀밭이 되고 맙니다.

막힌 길은 뚫고 가면 되고
높은 길은 넘어가면 되고

닫힌 길은 열어 가면 되고
험한 길은 헤쳐 가면 되고
없는 길은 만들어 가면 길이 됩니다.

길이 없다 말하는 것은
간절한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 유지나의 시 “길”

지방선거를 앞두고 크든 작든 공직에 출마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이력을 드러냅니다. 지역과 학력과 경력을 자랑하면서 스스로 그 일에 적임자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학력을 부풀려서 허위로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배움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근현대사를 보더라도 나라와 사회를 망친 사람들을 따져보면 많이 배우고 소위 좋은 학교에서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고, 그러므로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겠죠. 따라서 배움의 정도가 그 사람의 인격과 품성을 다 말해주지 못합니다. 배움을 내려놓으란 말은 배우지 말라는 의미도 되지만 배움의 이력을 자랑하지 말라는 의미도 됩니다.

살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가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형편에 따라서는 뿌려진 씨앗일 수도 있고 뿌려진 씨앗을 기르는 흙일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나의 생각과 행동이 사람과 모든 생명을 기르는 일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직해야 합니다. 마치 노자가 식모를 귀하게 여긴 것처럼.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사람 모든 생명에게 기쁜 소식인 것처럼.

“내가 “씨 뿌리는 사람” 사람이라면 하느님 나라를 향한 행동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니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실패를 하더라도 결실의 희망을 품고 계속해서 씨를 뿌려야 합니다. 모든 상황이 좋은 흙처럼 될 수 있도록 또한 길 가, 돌 위, 가시덤불을 제거해야 합니다. 내가 “뿌려진 씨앗”이라면, 단단한 길 위, 사탄의 유혹에 노출되기 쉬운 자리에 있더라도 유혹자의 빼앗음에도 견디어야 합니다. 뿌리를 내리기 힘든 돌 위에 떨어지더라도 뿌리를 깊이 내리려고 노력해야 하며,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환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또 다른 욕심이 생기더라도 물리쳐야 합니다. 내가 “씨를 받는 흙”이라면, ‘과연 나는 어떤 밭이 될 것인가?’ 하는 고민과 함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흙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기 위해 자기의 좋은 것을 다 씨앗에게 줌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좋은 흙의 역할입니다. 그것은 나를 희생하여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든, 뿌려진 씨앗이든, 씨가 뿌려진 흙이든 현실을 견디고 이기고, 결국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혹이 있다면 물리쳐야 합니다. 시련이 다가오면 견디어야 합니다. 욕심이 일어나면 풀어내야 합니다. 장애물이 있다면 넘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맺으려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항상 돌이켜 생각해야 합니다. 그 결실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 예수님이 목숨을 바쳐서 전한 복음이 아니라면, 그 모든 수고가 헛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 삶의 현실 속에서 모든 사람 모든 생명에게 기쁜 소식을 만드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열매 맺는 길이 될 것입니다. 나로 인해 내가 기뻐하고, 나로 인해 이웃과 동료들이 기뻐하고, 나로 인해 온 세상이 기쁜 소식으로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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