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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워라”-虛其心實其腹

기사승인 2018.01.22  22: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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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03

“현명한 사람을 높이지 않아서 백성이 싸우지 않게 한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백성들이 도적질을 하지 않게 한다. 욕망을 일으킬 것을 보이지 않아서, 백성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의지를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한다. 늘 백성으로 하여금 지식과 욕심이 없게 하고, 지식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로 행한즉 다스리지 못할 게 없다.”
- 노자, <도덕경> 3장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使夫知不敢不爲而已也 則無不治

노자가 말하는 ‘말하지 않는 가르침’은 백성에게 명예와 벼슬의 이익을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장자는 전국시대 도덕의 실상을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송나라의 성문에 어버이를 잃은 자가 몸이 수척해져 있었다. 송나라 임금은 효자라고 하여 그에게 작위를 주고 장관을 삼았다. 그러자 그 마을 사람들도 모두 수척해져서 굶어죽은 자가 반이나 되었다.” 예법을 실천하거나 지식이 있으면 명예와 물질적 보상이 따르는 것을 알게 되자 그것을 얻기 위해 학문과 도덕을 닦는 풍조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한비자는 한 집 건너 병법에 관한 책이 있는 현실을 개탄하였습니다. 노자는 예법이 초래하는 당대 정치현실의 혼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인이 백성들의 배를 채우고 뼈를 튼튼히 하도록 다스리는 것은 백성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를 뜻합니다. 예를 잘 지키는 사람에게 이익과 벼슬을 주는 정치는 백성들이 서로 싸우고 도적질을 하게 할 뿐입니다. 노자가 知를 거부한 것은 백성이 무지몽매하게 살기를 주장한 것이라기보다, 그 당시 학문이나 도덕의 성격이 백성들의 심성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志는 자신의 의지입니다. 자신의 사상 체계가 완성된 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배울 수가 없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을수록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爲는 정치에 있어서 법입니다. 무위는 법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스로의 자율에 의해 움직입니다. 백성들이 모두 지식을 추구하려 하지 않고, 욕망의 대상을 알지 못하면 억지로 다스리지 않아도 잘 다스려 집니다.

지난 겨울 도심의 칼바람과 눈보라를 작은 촛불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이겨냈습니다. 이른바 촛불혁명으로 시작되었지만, 문재인 정부 안에는 여전히 적폐에 동조했던 정치꾼들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또한 문재인 정부는 촛불들의 염원인 적폐청산을 향한 길에 온전히 들어서지 못하고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특별사면에서 배제하였고,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구속하였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경제적 삶의 질을 의미합니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의·식·주는 물론, 공부 할 기회까지 크게 벌어진 현실을 체감한 청년들은 부모의 경제력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새로운 희망의 빛이라도 있으니, 포기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기대하면서 만들어 가야겠지요. 이명박근혜 정부보다는 조금이라도 말이 통하는 정부이니 그래도 기댈 수 있고 믿어도 되겠지요. 

“아무리 몸부림쳐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자정이 넘긴 길바닥에 앉아 / 소주를 마시며 너는 울었지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다시 / 올라오는 길밖에 없을 거라는 그따위 상투적인 희망은 
가짜라고 절망의 바닥 밑엔 더 깊은 바닥으로 가는 통로밖에 / 없다고 너는 고개를 가로 저었지
무거워 더 이상 무거워 지탱할 수 없는 한 시대의 / 깃발과 그 깃발 아래 던졌던 청춘 때문에
너는 독하디 독한 말들로 내 등을 찌르고 있었지 / 내놓으라고 길을 내놓으라고
앞으로 나아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데 / 지금 나는 쫓기고 있다고 악을 썼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이라는 
나의 간절한 언표들을 갈기갈기 찢어 거리에 팽개쳤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던지는 모든 발자국이 / 사실은 길찾기 그것인데
네가 나에게 던지는 모든 반어들도 / 실은 네가 아직 희망을 다 꺾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마저도 너와 우리 모두의 길찾기인데
돌아오는 길 네가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던 / 안타까운 나의 나머지 희망을 주섬주섬 챙겨 돌아오며
나도 내 그림자 끌고 오는 / 풀죽은 깃발 때문에 마음 아팠다
네 말대로 한 시대가 네 어깨에 얹었던 그 무거움을
나도 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고 /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도대체 이 혼돈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 너는 내 턱밑까지 다가와 나를 다그쳤지만
그래 정말 몇편의 시 따위로 / 혁명도 사냥도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한올의 실이 피륙이 되고 
한톨의 메마른 씨앗이 들판을 덮던 날의 확실성마저 / 다 던져버릴 수 없어 나도 울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말대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 / 그래 네 말대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네 말대로 무너진 것은 / 무너진 것이라고 말하기로 한다
그러나 난파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렇게 잠겨갈 수만은 없다
나는 가겠다 단 한발짝이라도 반 발짝이라도” <도종환의 시 “길”>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도적질을 하지 않고, 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세상을 향한 길.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울 수 있는 세상, 지식과 욕심이 없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향한 길은 사람이 사람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때 조금씩 열릴 것입니다. 함부로 하는 것보다는 함께 아파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에 그 길은 더 넓어질 것입니다.

“함께 아파함은 영적 변혁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목적 그 자체입니다. 다른 사람들, 모든 생명들과 함께 느끼는 것, 특히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은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다른 사람의 삶의 여건이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함의 경험과 실천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 기도보다 더 직접적인 길이 되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참여하여 그 경험을 함께 나누는 사람은 삶이 변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랑은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증거이며, 그 사랑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랑은 또한 만물을 소통시키는 성령의 통로이며, 서로 소통하여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게 하고,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하나의 의지로 묶어주는 끈입니다. 머리나 지식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짓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성령에 이끌리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성령에 이끌리어”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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