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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않고” - 驟雨不終日

기사승인 2018.06.11  23:3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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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23

“자연은 말이 없다(드물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않는다. 누가 이것(회오리바람과 소나기)을 이렇게 하는가? 천지이다. 천지도 오래 주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인간에게 있어서랴. 그러므로 도를 따라서 일하는 사람, 道者는 도와 함께 하고, 德者(덕을 따라 일하는 사람)는 덕과 함께 하고, 失者(도와 덕에 어긋나서 일하는 사람)는 실과 함께 한다(그 둘을 잃어버린다). 도와 함께 하는 사람은 도도 역시 그를 얻어 즐거워하고, 덕과 함께 하는 사람은 덕도 역시 그를 얻어 즐거워하고, 도와 덕에 어긋난 사람은 어긋남 역시 그를 얻어 즐거워한다. <믿음이 부족하면 불신이 있다.>”
- 노자, 『도덕경』, 23장

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于(於)人乎. 故從事於道者, 道者同于(於)道. 德者同于(於)德. 失者同于(於)失. (故從事而道者同於道. 德者同於德. 失者同於失.) 同于(於)道者, 道亦樂得之. 同于(於)德者, 德亦樂得之. 同于(於)失者, 失亦樂得之. (同於德者, 道亦德之. 同於失者, 道亦失之.) <信不足焉, 有不信焉>

자연은 말이 없습니다. 노자는 표현되어지는 언어의 세계보다 표현되어지지 않는 침묵의 언어를 더욱 중시하고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자주 곤궁해진다. 중(中)을 지키는 것(가만히 있는 것)만 못하다.”<5장> 천지는 만물을 낳고 키우고 모든 일을 처리해나가면서 말이 없습니다.

공자가 예를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혼란, 즉 실덕(失德)이 일상적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의 입장에서는 예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자는 인간이 혼란한 것 또한 회오비바람이나 소나기처럼 오래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실덕이라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실덕은 도가 낳는 자연적 현상이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공자는 낮잠을 자는 제자 재여(宰予)에게 “썩은 나무에 조각을 할 수가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성인의 도를 배워야 올바른 사람이 된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 보면, 휴식은 게으름입니다. 그러나 노자는 휴식 자체가 자연활동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죽음이 나쁜 것인 줄로만 알지 죽음이 곧 휴식인 것을 모른다.”<열자 천서편>

ⓒGetty Image

삶(生)은 생명(生命)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자연이 명령하는 것과 같아서 따르지 않을 때 고통이 옵니다. 노자는 자연질서를 근거로 사람의 혼란(失德)을 성찰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덕과 실을 이해하라고 합니다. 실덕이 자연의 도임을 이해할 때, 예법이나 형벌 등 인위적인 수단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덕과 함께 하는 자는 도가 그 사람에게 덕을 주며, 실덕과 함께 하는 자는 도 또한 그 사람에게 실을 줍니다. 도가 베푸는 덕과 실은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덕과 실이 도의 자연적 질서라는 노자의 말은 도가의 고유한 관점입니다.

마음을 씻고 닦아 비워내고
길 하나 만들어 가리.

이세상 먼지 너머, 흙탕물을 빠져나와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한,
아득히 흔들리는 불빛 더듬어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가리.

이 세상 안개 헤치며, 따스하고 높게
이마에는 푸른 불을 달고서,

이태수의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손오공이 아무리 날뛰어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도(道)를 따르는 것만 못합니다. 하늘과 땅이 행한 것도 하루를 가지 못하는데 사람이 행한 것은 얼마나 가겠는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행한 것이 영구불변하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소나기가 하루 종일 내리지 않고, 회리바람이 잠깐만 지나가듯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작은 씨앗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땅 속에서 죽은 것 같은 씨앗의 미래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씨를 뿌리는 일이다. 믿음은 암담한 현실에서도 희망의 빛을 보는 것이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보는 것이다. 믿음은 세상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고, 믿음은 절망의 상황에서도 신의 약속을 또렷이 듣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씨는 벌써 세상에 뿌려졌다. 지금은 실패하는 것 같으나, 종래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확이 있다. 믿음은 땅 속에 죽어 있는 씨에서 미래의 생명을 보는 것이고, 그 매장된 씨앗에서 생명의 약동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민중들의 삶은 겨자씨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싹이 나더라도 푸성귀처럼 작고 연약해서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나 하나조차도 감당하지 못해서 떠돌아다니는데 나에게서 어떻게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소위 지도자들의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비아냥거립니다. ‘너희들이 세상을 품고 구원할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백향목처럼 덩치 큰 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고 생각하지만, 너희들의 허위의식은 이미 하느님의 뜻을 떠나 끝없는 욕망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니 너희들에게서는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만한 가능성도 이미 없다.’ 반면에 예수님은 의기소침해 있는 민중들에게 한없는 위로와 힘을 줍니다. ‘새들이 깃들일 만큼의 큰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은 너희들처럼 작고 보잘것없이 보이는 사람들이다. 너희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 운동이다.’
겨자 나물이 넝쿨이 되어 덤불숲을 이루었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넝쿨은 그 뿌리가 무엇인지 모르게 서로 얽혀 있습니다. 연약하지만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새들이 그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동체의 끈끈함이 살아 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것은 서로 연대할 때입니다. 오히려 지배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똘똘 뭉쳐 연대합니다. 어떻게든 반격하고 만회하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때로는 테러나 암살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러한 위협과 실제적인 협박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연대입니다. 생명과 평화를 지키고 이루기 위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겨자풀과 백향목”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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