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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을 끊고 義를 버리면” - 絶仁棄義

기사승인 2018.05.14  22: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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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19

“거룩하다고 하는 사람(聖人)(의 말)을 끊고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智人)(의 말)을 버리면 백성이 백배 이롭다. 仁을 끊고 義를 버리면 백성은 효도와 자애를 회복한다. 교묘함을 끊고 이익추구를 버리면 도적이 있지 않다. 이 세 가지는 文物(혹은 法道, 禮義)이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소속이 있는 벼슬아치들은 바탕을 보고 순박함을 품고, 사삿일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하라.”
- 노자, 도덕경, 19장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此三者以爲文不(未)足. 故令(之)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성(聖)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도(道)의 원리가 꽃을 피우면 성(聖)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 성(聖)을 끊으라는 것은 거룩하다고 하는 생각 자체를 버리라는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공자의 핵심 사상인 인의(仁義)를 끊으라는 것은 어질다는 생각이나 의롭다는 생각을 버림으로써, 일체의 인위적인 생각을 떠나 자연스러운 무위의 도에 따라 행동할 것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인간이 본받아야 할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자연적인 것으로 들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상태에 대한 비유로 종종 투박한 통나무나, 아직 물들지 않은 누에의 흰 명주실 같은 소박한 상태를 들어 설명합니다. 소(素)는 바탕과 처음이나 흰 상태를 말합니다. 박(樸)은 다듬지 않는 통나무를 의미하기도 하고, 외모를 꾸미지 않으며 거짓이 없다는 뜻의 순박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박(樸)은 ‘퍽’하고 쪼개질 때의 소리를 음사한 글자인데, 단지 쪼개지기만 하고 아직 가공을 하지 않은 그대로의 바탕을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며 순박한 것을 껴안고, 사사로운 일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하는 세계야말로 우리가 지향해 가야 할 이상세계입니다.

ⓒGetty Image

이익(利益)을 탐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유혹받기 쉬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적 가치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이것입니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 이익(利益)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생명의 일부를 버린다는 것이고, 나눔의 시작입니다. 교사스러움을 끊는 것이 소극적인 행위라면 이익을 버리는 것은 보다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적극적인 것은 나눔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과 권력의 이익을 위하여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도적질을 정당화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토지강제수용과 재개발에서 자본은 합법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법도(法道)를 따르는 일이고 예의(禮義)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사람의 생명권과 한 평의 재산권이 존중되어야 하는 가치가 법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우리들 삶의 길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그 많은 길 중에 나를 살찌우는 길
그 길이 시인의 길이다
시인의 길도 내가 직접 뛰어야
도달할 수 있다
그 길을 가면서 혼자가도 되지만
선생님을 따라서 가면 더 좋을 것 같다
또한 선후배가 함께 가면 한층 더 좋을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 했다
가다가 목마르면 물도 마시고
길가의 목로주점에서 건배도 하며
쉬엄쉬엄 가자
저녁에는 시를 덮고 잠을 청하고
꿈속에서는 시를 안고 자자
매일 새벽마다 시와 입맞춤하고
시를 마시고 시를 비벼 먹으면
내 몸도 내 영혼도 포동포동 살이 붙을 거다

출발선에서 총소리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오늘도 시인의 길을 달리고 있다
입상보다는 완주에 목표를 두고
그 길을 뛰다가 걷다가 가고 있다
자국마다 축복이 쌓이길 바라며
- 정종복의 시 “시인의 길”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 당시의 로마제국과 결탁한 성전 지배체제에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모든 가치에 대해서 비아냥거립니다. 그들의 지배의식을 폭로하고 숨죽여온 민중들의 정당한 저항의식을 예수님은 수많은 비유를 통해서 밝히 드러내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모두 예수님의 비유일 수 있습니다. 그 일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복음의 역동성과 변혁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오랫동안 인(仁)과 의(義)로 정당화 되어온 모든 가치에 대해서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추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적대자들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고, 반면에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보는 것 보다는 그 내용을 알고 그 뜻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하고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들로서 하느님 나라의 새 가족의 일원입니다. 이들은 보고 들을 때 진리를 통찰하여 앎과 깨달음에 이르고, 끝없는 자기 갱신과 온전한 해방으로 삶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귀를 닫고 눈을 감으며 마음에 빗장을 지른 사람들입니다. 그 둔한 인식과 굳은 마음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참 진리를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해서 그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의 잘못(비리)을 인정하기 싫어서 깨닫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비유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하느님의 뜻,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발견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예수님의 비유는 성서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속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깨달은 하느님 나라가 미래의 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서 현재의 역사를 비판하는 힘으로 작용할 때에는 기존의 지배체제를 전복시키는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하느님 나라의 선취운동, 즉 미래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지금 여기로 앞당겨 오는 실천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를 잘 보고 들어서 뜻을 이해하고 깨달아서 예수님의 길을 따라갑시다. 우리 현실 속에 있는 비유들 속에 담긴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똑바로 보고, 그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일 수 없는 세상을 만듭시다. 우리의 마음을 열면 제대로 들리고 제대로 보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비유에 담긴 하느님 나라의 비밀”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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