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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지만 소유하지 않고”-生而不有

기사승인 2018.03.12  23: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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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10

“넋(몸을 움직이는 기운)을 머리에 이고 하나를 품어 능히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기운을 모아 부드러움에 이르러 능히 갓난아기와 같을 수 있는가? 씻고 덜어내어 감감히 보아 능히 허물이 없게 할 수 있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무위(無爲)로 할 수 있는가? 하늘 문을 열고 닫는데 암컷이 될 수 있는가? 밝고 깨끗함이 사방에 이르러 능히 앎이 없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을 낳고 그것을 기를 때, 낳지만 소유하지 않고, 일 하지만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지만 지배하지 않는다. 이를 일러 현덕(玄德)이라 한다.”
- 노자, 『도덕경』, 10장 
載(戴)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以)爲乎. 天門開闔, 能爲雌乎. 明白四達, 能無(以)知乎.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부귀를 유지하려는 욕망이 있는 한 인위적인 수단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정치는 자신의 미망(迷妄)을 자각할 수 있는가? 앎이나 의도를 가지고 다스리는 정치는 결국 백성을 종처럼 부리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 정치는 재물과 벼슬을 구하는 바쁜 몸의 기운을 안정시킬 수 없습니다. 육신을 관장하는 넋(魄)과 마음을 관장하는 넋(魂)을 몸에 실어 하나를 품고 그 둘을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하나는 천지인(天地人) 모두를 포함합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자신에게서 누군가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워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그러한 지식이나 앎을 전수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다 배웠으면 떠나게 하라. 그를 지배하고 자신의 학설만을 고집하지 않게 하라. 그는 그 자체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길을 나의 길로 만들지 마라. 그의 길을 나의 길로 만들지 않는 것이 바로 그윽한 덕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계속 드러나고 있는 Me Too와 With You 운동은 촛불혁명으로 시작된 적폐청산의 흐름이고, 우리 사회의 성평등 의식과 젠더 감수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뿌리 깊게 암묵적으로 용인되었던 성폭력에 대한 적폐가 새로운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권력에 의한 성적 폭력에 숨죽였던 피해자들의 용기와 국민들의 마음이 소수의 특권층이 향유하였던 힘을 압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은 권력이라도 있는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묻고 성찰해야 한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무위(無爲)로 할 수 있는가?” 노자는 그렇게 묻고 대답한다. “낳지만 소유하지 않고, 일 하지만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지만 지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 내어 /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
​길이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 //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 신경림의 시 “길”

예수님 당시에 로마 황제로부터 받은 작은 권한으로 행해지던 갑질의 최고봉은 세리들의 세금 착취였다. 당시에 민중들이 내는 세금은 소득의 40-60%였는데, 그야말로 세금이 아니라 착취며 수탈이었다. 그 중에서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은 그 부담이 너무 무거웠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정정치 이념에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심각했다. 세리는 로마 황제와 유대 민중 사이에서 그들의 권한을 이용하여 부와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친구라고 한 사람들 중에 세리가 들어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를 헤아리는 것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작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성폭력 범죄자들의 처벌을 넘어서 우리 안에 성평등 지수와 젠더 감수성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 서로의 약함과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무었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세리들을 부르고, 따르는 그들과 함께 먹고,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따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름에는 이전의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따름과 함께 먹음은 삶의 과정입니다. 회개의 의미가 그렇듯이 따름과 함께 먹음은 이전에 자기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그 잘못을 떨쳐버리는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밥상에는 세리들도, 젤롯당원들도, 어부들도, 창녀들도, 죄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밥상은 열린 공동식사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닫혀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무리 속에 끼어들어 있지만, 함께 먹을 수 없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밥을 먹는 행동을 통하여 당시 유대 사회를 갈라놓고 차별하는 중요한 벽을 허물었습니다. 거룩함과 속됨, 정결함과 부정함, 정상과 비정상의 차별을 철폐하신 것입니다. 차별을 당하여 움츠릴 수밖에 없는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먹을 수 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거룩함(holiness)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함(wholeness)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느님 나라는 <이른바> 건강한 사람이나 의로운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병든 사람은 치유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죄인은 용서하고 용서받기 위해 함께 눈물 흘리는 공동체 속에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부름이 따름으로 응답하고, 함께 한 사람들과 한 상에서 먹음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갑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세리는 어떻게 밥상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나?”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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