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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는 어질지 않으니” - 天地不仁

기사승인 2018.02.05  21: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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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05

“하늘 땅은 어질지 않으니, 만물을 (제사 때에 쓰고 버리는) 풀강아지처럼 여긴다. 성인은 어질지 않으니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 하늘과 땅의 사이는 다만 풀무와 피리와 같구나! 비어 있으나 구부러지지 않고, 움직일수록 세차게 (바람 소리가) 나온다. 말이 많으면 자주 곤궁해진다. 中을 지키는 것(가만히 있는 것; 마음에 간직하는 것)만 못하다.”
- 노자, 『도덕경』, 5장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만물은 象에 의해 자연에게서 생명을 얻지만 다시 소멸하여 천지로 돌아갑니다. 노자는 이 소멸의 자연작용을 不仁으로 표현합니다. 반대로 仁은 씨앗이나 생명을 뜻하는데, 노자는 공자에게서 비롯되는 유교적 핵심 개념인 仁의 문제까지도 단번에 허물어뜨립니다. 仁에도 자연스럽지 못한 인위적인 측면이 있다면 과감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성인도 백성을 대함에 있어서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마음에 따라 어진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편파적인 치우침 없이, 또한 지나침도 없이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에 따라 자비로운 행위를 할 뿐입니다. 道의 궁극적 단계는 일체의 인위적 행위를 넘어선 자연스런 행위로서 인간과 자연이 도에서 하나 되는 경지를 말합니다.

만물은 태어남(仁)과 소멸(不仁)이 있으며, 활동과 휴식의 순환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자연의 질서를 무시하고 仁을 내세워 백성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자연은 인간뿐만 아니라 천지 만물을 공평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어질지 않다고 합니다. 무심한 천지를 억지로 어질다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인은 어질지 않은 사람입니다. 즉 뭇 사람들을 똑같이 여길 뿐입니다. 똑같이 대하고 그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예와 법 등 옳고 그름을 따지는 규범적 지식으로는 상호 반대되는 자연의 활동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천지와 자연의 흐름을 보면 인간의 역사는 참으로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는 역동적이고 진리를 향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일들을 먼 훗날에 찬찬히 곱씹어 보면 ‘아! 그랬었구나!’ 하면서 인과의 맥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가 어질지 않을지라도 지금 우리는 길을 가고 있고, 가야만 합니다. 단지 그 길을 어떤 가치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 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의 시,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먼 훗날에도 가치 있고 정당하다고 생각되면 힘이 들더라도, 당장 고통과 아픔을 당할지라도, 자존심이 상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그 길을 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어이 그 길을 가야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길을 여럿이 함께 간다면, 그 길을 가는 길벗들이 많아질수록 조금은 짐이 가볍고 덜 힘겹겠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고, 예수의 얼굴을 닮으려고 하는 것은 의기투합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꿈꾸고 실현하려고 했던 것에 기본적인 동의가 있기 때문에 따르고 함께 하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보다는 ‘함께 가자!’ ‘함께 갑시다!’라고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함께 가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합니다. 어떤 사안에 대하여 회의나 토론할 때에는 치열하고 자기주장이 확실하지만, 그 속에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신뢰가 있습니다. 저만치 앞서간다 싶으면 한숨 돌리며 기다리고, 조금 늦었다 싶으면 서둘러 따라갑니다. 또한 서로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인정하고 힘을 실어 줍니다.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이 예수님이 걸으셨던, 가려했던 길인지 아닌지를 반복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와 우리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이 예수님의 얼굴을 닮아가는 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은 예수님을 뒤에서 따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공동체로 모인 우리들이 함께 할 일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 (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함께 갑시다!” 중에서

이병일 위원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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