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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人)-지(地)-천(天)-도(道)-자연(自然)을 본받아야”

기사승인 2018.06.25  2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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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25

“섞여서 이루어진 물(物)이 있는데, 천지가 생겨나기 전부터 그러하니 고요하고 분란(紛亂)하도다! 홀로 서 있어 변하지 않고, 두루 다니지만 지치지 않는다. 이로써 가히 천지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글자로 말하면 道라고 하고, 그 이름을 억지로 말하면 大라고 한다. 크다는 것은 간다고 말하고, 가는 것은 멀리 간다고 말하고, 멀리 가는 것은 되돌아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도도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도 역시 크다. 세상에 큰 것이 네 가지가 있으니, 왕도 그 중에 하나이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 노자, 『도덕경』, 24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地)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도덕경』 25장은 道의 실상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도덕경』 전제가 도와 덕을 설명하고는 있지만 생활의 실례를 들어 비유로 설명한 것이 대부분인대 비해 25장은 그 형용하는 방식이 이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입니다. 25장이 파격적인 이유는 도에 대해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라도 설명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도를 설명함에 있어, 가장 기피한 사실은 도를 개념적으로 정의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방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그는 글자를 빌어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는 천지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 존재방식은 무언가 섞여서 혼성(混成)되어 있습니다. 혼성은 분열이나 분화 이전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미분화적 세계상은 동양사상의 기본적 골격을 이루고, 이 혼성에 대한 믿음이 동양의 일원적 사고의 바탕이 됩니다. 세계의 실상을 하나의 몸체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Getty Image

노자가 말하는 도는 현실 자연계에서 활동하는 도입니다. 노자는 1장에서 자신이 말하는 도는 도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항상 말하는 예나 규범의 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자연의 도는 명령을 내려도 주인이 없습니다. 도의 명령은 왜 그런지 모르면서 그렇게 되는 자연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는 자연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사람은 땅을 본받아야 합니다.

어느 날 하루는
여행을 떠나
발길 닿는 대로 가야겠습니다.

그날은 누구를 꼭 만나거나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서 좋을 것입니다.

하늘도 땅도 달라 보이고
날아갈 듯한 마음에
가슴 벅찬 노래를 부르며
살아 있는 표정을 만나고 싶습니다.

시골 아낙네의 모습에서
농부의 모습에서
어부의 모습에서
개구쟁이들의 모습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알고 싶습니다.

정류장에서 만나 사람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산길에서 웃음으로 길을 묻고
옆자리의 시선도 만나
오며 가며 잃었던
나를 만나야겠습니다.

아침이면 숲길에서
나무들의 이야기를 묻고
구름이 떠가는 이유를 알고
파도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저녁이 오면 인생의 모든 이야기를
밤새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돌아올 때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행복한 웃음을 띠겠습니다.
- 용혜원의 시 “어느 날 하루는 여행을”

노자는 왕과 땅과 하늘이 모두 이 자연 질서를 따르고 있으니, 저절로 그렇게 되는 자연의 도야말로 보편적인 질서라고 합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은 사람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 되었고, 따라서 사람은 도와 자연을 전혀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거라사의 광인처럼 자본주의적 이윤과 경쟁의 흐름에 미쳐 있는 모습입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자신을 스스로 파멸의 길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도와 자연의 본받고 따르는 사람을 제정신으로 돌아갔다고 말할 수 있겠죠. 한 사람 한 사람이 제정신을 차릴 때에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해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라사의 광인은 결코 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가는 그와 그 속에 있는 악한 영을 단수와 복수를 혼용하여 사용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악한 영에 의하여 비인간화 된 사람의 인격적 단편화와 분열상을 제시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비인간화 된 전체, 곧 집단적 환경적 삶을 대표하고 상정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마제국의 거대한 군사적 점령과 살육, 그에 수반되었던 경제적 착취와 수탈을 통해서 비인간화 된 삶의 모습입니다. 
거라사의 광인은 악한 영이 군대처럼 많은 수로 가득하여 제 정신이 아닌 사람,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던 사람, 무덤과 산에서 자기를 그렇게 만든 모든 것을 거부하고 원망하며 사는 사람, 마침내 자기 자신 조차도 이해할 수 없어서 자기 몸과 맘을 학대하며 상처를 내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그의 상태는 결코 그의 잘못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을 그 지역의 고통을 대표하고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의 학살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나와 우리의 모습과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개인적으로는 그 사람을 레기온의 더러운 영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사회적으로는 그 지역에 뿌리내린 로마 군단의 정치-경제 구조를 해체시켰던 것입니다. 해방케 하는 예수님은 한 개인을 온전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거라사의 그 이방인 도시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깨끗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람은 데가볼리에서 예수님이 그에게 한 일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고, 모든 사람이 놀랍니다. 그 사람의 일은 학살과 억압으로 숨죽이며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곳을 살 맛나는 땅으로 만드는 것이고, 모두가 미쳐 있는 세상을 제정신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이병일, 『미친 예수』 (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미친 세상, 무덤 사이에 살면서”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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