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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고 고요하게”

기사승인 2018.07.02  22: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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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26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라 하고, 고요함은 시끄러움의 임금(머리)이라 한다. 이러므로 군자는 종일 다녀도 무거운 수레를(수레의 무거움을) 떠나지 않고, 비록 영화로운 벼슬이 있어도 초연하여 편안함을 누린다. 어찌 만 수레의 임금이 몸소 천하를 가볍게 여기는가? 가벼우면 근본을 잃고, 시끄러우면 임금(임금의 자리)을 잃는다.”
- 노자, 『도덕경』, 26장
重爲輕根. 靜爲躁君. 是以聖人(君子)終日行, 不離(其)輜(甾)重. 雖有榮觀(環官), 燕處超然. 奈何萬乘之主, 而以身輕(於)天下. 輕則失根(本). 躁則失君

다석 유영모 선생은 도덕경 전체를 얼나(道)와 제나(自我)로 풀이했습니다. 다석의 해석대로 말하면 중정(重靜)은 얼나의 소산이고 경조(經躁)는 제나의 소산입니다. 무겁고 고요한 삶의 원리, 즉 도의 원리가 가볍고 조급한 인간적 자아의 원리를 통제하는 근본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무거운 수레는 옛날 임금이 행차할 때 수행하는 군사가 의식과 기계를 실은 수레를 말합니다. 임금이 행차하면서 늘 이 수레를 떠나지 않는 것에 대해, 노자가 성인의 행동양식으로 비유한 말이니다. 임금이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과 성인이 중대한 과업을 멀리하지 않는 것이 같은 맥락입니다.

ⓒGetty Image

옛날 중국에서는 천자는 일만 수레, 여기서 수레는 고대 전차를 가리킵니다. 일만 대의 전차를 움직일 재력과 힘이 있었습니다. 전차 일만 대면 움직이는 병력이 수십만입니다. 그 아래 제후는 천승제후 백승제후라고 했습니다. 만승은 천자의 존엄을 나타냅니다.

몸(體)이 가는 길(道)이 있고 마음(心)이 가는 길(道)이 있습니다.
몸(體)이 가는 길(道)은 걸을 수록 지치지만 마음(心)이 가는 길(道)은 멈출 때 지칩니다.
몸(體)이 가는 길(道)은 앞으로만 나 있지만
마음(心)이 가는 길(道)은 돌아가는 길(道)도 있습니다.
몸(體)이 가는 길(道)은 비(雨)가 오면 젖지만
마음(心)이 가는 길(道)은 비(雨)가 오면 더 깨끗해집니다.
몸(體)이 가는 길(道)은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오늘은 몸(體)보다 마음(心)이 먼저 길(道)을 나섭니다.
- 김철수의 “몸(體)과 마음(心)이 가는 길(道)”

한 사람에게 몸과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먹은 것을 몸이 움직여 취하고, 몸이 상하면 마음도 병들거나 마음이 상하여 몸도 병이 납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몸과 마음의 욕망을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뜻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도를 찾는 일입니다.

기독교에서 오래된 논쟁거리인 믿음과 행동도 둘이 아니면서도 때때로 구분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믿음이냐, 어떤 행위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죠.

지난 주 중에 삶의 근거지를 광주로 옮겼습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의 삶을 시작합니다. 환경과 분위기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다짐도 새롭게 해 봅니다. 도를 향해 가는 믿음의 길에서 무겁고도 고요하게 행동하면서 얼나를 따르려 합니다.

무겁다(重)는 것은 “소중하다(所重), 귀중하다(貴重), 거듭하다, 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조심하다.”라는 뜻이 있고, 고요하다(靜)는 것은 “조용하고 잠잠하다. 깨끗하다. 쉬다(休息).”는 뜻입니다. 저는 삼가면서도 깨끗하게 하는 일, 거듭하면서도 쉬는 일에 마음이 많이 갑니다.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행위입니다. 믿음을 표현하고 구원을 확증하는 것이 행함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행위이고 마가복음에서 그 행위는 따름입니다. 그 믿음의 행위는 무리들처럼 단지 모여들기만 하거나 따르면서 예수님을 떠밀면서 압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의 행위는 야이로처럼 예수님을 대상화 하여 간구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따름이 아닙니다.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 예수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행위는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나서는 주체적인 믿음입니다. 올바른 희망을 품고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때로는 겸손하게 예수님과 마주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평화와 건강함으로 자기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믿음입니다. 죽음과 같은 절망에서도 내미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일어서라는 말씀에 일어나서 행함으로써 부활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두 여자의 생명을 회복시켰습니다. 두 여자의 구원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에게는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것을 용납함으로써 그 여인의 병이 나음을 입었고, 열두 살에 죽은 여자 아이에게는 예수님이 직접 그 여자의 손을 잡음으로써 그 여자 아이를 살렸습니다. 사회적 통념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감금되었던 그 여인이 무리 속을 헤치고 나아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는 것은 그 무리와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병을 고쳐서 자신의 불결의 원인을 제거하실 수 있음을 믿지 않았더라면 그 여인의 행동은 무책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그 여인의 질병과 고통을 짊어지고, 그 여인의 부정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 앉음으로써 사회적 부정의 통념을 깨뜨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어서 장례를 치르고 있는 여자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생명을 살리는 일과 자신이 부정하게 되었다는 사람들의 인식을 교환합니다. 예수님은 부정하게 된다는 의식을 깨뜨리기 위해 스스로 오염되어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정결과 부정을 구별함으로써 사람을 차별하는 비생산적인 사회적 전통을 예수님은 과감히 무너뜨리고 삶의 온전성과 생명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샬롬을 실현하였습니다.
구원을 기다리는 일은 희망을 품는 것이고, 이 희망을 이루는 힘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믿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의 생명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생명의 근원을 나누는 일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믿음의 행위와 구원”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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