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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릇은 늦게 완성 되고” - 大器晩(免)成

기사승인 2018.10.15  22:4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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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41

“높은 선비가 도를 들으면 그것을 힘써서 행하고, 중간 선비가 도를 들으면 그것이 있는 듯 없는 듯 하고, 아래 선비가 도를 들으면 그것을 크게 비웃는다.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말하기에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글이 있어 이르기를, 도를 밝히면 어두운 듯하고, 도에 나아가면 물러나는 듯하고, 도를 평탄하게 하면 치우치는 듯하다. 높은 덕은 막히는 듯하고, 심히 깨끗한 것은 더러운 듯하고, 넓은 덕은 부족한 듯하고, 건강한 덕은 구차한 듯하고, 진실을 정하면 바뀌는 듯하다. 큰 나라는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완성되고, 큰 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큰 모양은 형태가 없다. 도가 숨으니 이름이 없으니, 대저 도만이 일찍이 잘 시작하고 잘 완성할 수 있다.”
- 노자, 『도덕경』, 41장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而笑之, 不笑不足以爲道. 故書有之曰(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健(建)德若偸, (質眞若渝) 大方無隅, 大器晩(免)成, 大音希聲, 大(天)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始)且(善)成

도(道)의 모습은 일반적인 상식의 수준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더 높고 혹은 깊은 은밀함 속에서 도의 본래의 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을 상 중 하로 나누어 이야기 하지만 한 사람 안에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상 중 하 어떤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의나 예법이 없이 자연의 덕으로 잘 다스릴 수 있다는 노자의 말은 보통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선비들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예와 법 등 인위적인 수단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Getty Image

노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격언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말이 허황되어 보이지만 진실이라고 주장합니다. 높고 넓은 덕은 막힌 듯, 더러운 듯, 부족한 듯, 구차한 듯 보입니다. 이는 큰 나라는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완성되고, 큰 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큰 모양은 형태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자연 질서의 근본이 디는 도는 만물 속에 숨어 있어서 이름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주장한 인의와 예는 질서를 더 문란하게 했지만, 자연의 도를 따를 때에 끝을 잘 이룰 수 있습니다.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 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자연의 도가 막힌 듯, 더러운 듯, 부족한 듯, 구차한 듯 보이는 것처럼 예수의 십자가 죽음도 무의미하고, 어리석고, 연약하고,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임과 부활, 절망과 희망은 역설적 관계입니다.  부활의 역설이란 누구에게는 말도 안 되는 논리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꿈틀거리는 희망을 보게 하는 힘이 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거나 부활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에게 죽임당함은 그 자체로 끝이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죽임당함은 부활의 역설이고 부활은 죽임당함의 역설입니다.

큰 그릇은 늦게 완성 되니 조금한 사람은 그 과정을 잘 볼 수 없고, 그 과정을 모르니 결과 또한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반면교사로  예수의 부활도 예수의 삶고 죽음과 부활을 넓은 품으로 볼 때에 받아들일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도의 높고 낮음이나 예수의 부활을 잘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살아 있는 우리는 깨달은 만큼 자연의 도를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너와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고 살아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부활의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죽임의 위협은 더 이상 협박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어간 예수님을 보고 황망한 가운데 전의를 상실하고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당당하게 자기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제자들의 행동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였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신 일이 바로 제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이루면서 죽임의 위협 앞에서 겁에 질려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의 숨결(프뉴마)로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준 일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이 처음에 사람을 만들어서 그의 숨결로 살아 있게 되었듯이 예수님의 숨결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과의 만남이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참여의 영역이며 따라가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함께 하느님을 예배하고 예수님을 기억하는 바로 나와, 바로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며, 우리는 그 사건에서 큰 희망과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오늘 하루는 예수님이 부활한 그 이유에 의해서 더욱 가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교회 공동체가 만드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 속에서 또다시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는 삶은 나 자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된 삶, 진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영원한 삶, 영생이라고 말해왔습니다. 나 자신이 살아 있음을, 우리 공동체가 살아 있음을, 모든 생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그리고 모두가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부활하게 하는 삶이 바로 내가 부활하는 삶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이 시대의 아픔을 지고 가는 이웃들, 인간의 잘못과 탐욕으로 신음하는 모든 생명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를 통해서 증언되어야 합니다. 나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살 때에 나의 삶과 부활도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부활, 죽임 당함의 패러독스...”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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