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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음은 낮음에서 비롯되느니” - 高以下爲基

기사승인 2018.10.01  19: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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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39

“옛날에 하나를 얻었다는 것은 하늘이 하나를 얻음으로써 맑고, 땅이 하나를 얻음으로써 편안하고, 神(사람)이 하나를 얻음으로써 신령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음으로써 가득차고, 만물이 하나를 얻음으로써 생겨나고, 제후와 왕이 하나를 얻음으로써 천하가 곧고 바르게 되었다. 이는 그것이 하나에 이르러서 그렇다. 하늘이 이미 맑지 않으면 장차 찢어질까 두렵고, 땅이 이미 편안하지 않으면 장차 버려질까(들춰질까) 두렵고, 신(사람)이 이미 신령하지 않으면 장차 말라질까 두렵고, 골짜기가 이미 가득차지 않으면 없어질까 두렵고, 만물이 이미 생기지 않으면 멸할까 두렵고, 제후와 왕이 이미 바르지 않으면 거꾸러질까 두렵다. 그러므로 귀함은 반드시 천함을 근본으로 하고, 높음은 반드시 낮음을 기초로 한다. 이럼으로써 제후와 왕은 스스로를 고아(고독한 사람), 과부(부덕한 사람), 쭉정이(가난한 사람)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천함을 근본으로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즐거움에 다다르면 즐거움이 없으니(그러므로 무리를 다 헤아리면 무리가 없다. 수레를 다 세면 수레가 없다.) 옥과 같은 구슬목걸이를 바라지 말고, 돌 같은 목걸이를 바라라.”
- 노자, 『도덕경』, 39장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候王得一以爲天下貞(正), 其致(至)之一(也). 天無以(已)淸, 將恐裂, 地無以(已)寧, 將恐廢(發), 神無以(已)靈, 將恐歇, 谷無以(已)盈, 將恐竭, <萬物無以(已)生, 將恐滅>, 候王無以(已)貞, 將恐蹶. 故(必)貴以踐爲本, (必)高(矣而)以下爲基. 是以候王自謂孤, 寡, 不穀, 此其(非)以賤爲本耶, 非乎. 故至譽無譽(故致數輿(與)無輿(與)) 不欲(琭琭)如玉, 珞珞如石

노자는 만물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구체적인 자연, 즉 하늘과 땅에서 관찰하고 있습니다. 38장에서 인의와 예가 혼란을 가져왔다고 주장한 노자는 자연의 덕이야말로 만물이 살아가는 기초라고 설명합니다. 천지신곡(天地神谷)은 자연의 덕이 없으면 그 활동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덕을 따르고, 무위(無爲)를 지킬 때 상하귀천이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위정자가 귀하고 높은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천하고 낮은 도가 근본이 되었고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은 옥과 같이 잘 깎은 인위적인 도덕을 원하지 않고, 돌과 같이 울퉁불퉁한 자연의 도를 원해야 합니다.

ⓒGetty Image

장자는 태고 때에 백성이 도를 따라 살던 지극한 덕의 시대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백성들을 스스로의 본성에 따라 길쌈하여 옷을 입고, 밭을 갈아 밥을 먹었는데, 이것을 同德이라고 한다. 새나 짐승과 함께 살며 만물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없어서, 모두 앎이 없었다. 그러므로 다같이 무지하여서 그 덕이 떠나지 않았다.”<장자 외편 마제> “사람이 비록 앎이 있으나 쓸 일이 없으므로 지극한 하나이다.”<장자 선성편>

길 위에는 신분도 없고 귀천도 없다.
다만, 길을 가는 자만 있을 뿐,
길 위에는 신분도 늘 자유로웠고,
그 길을 지도에 옮겨 놓을 꿈에 평생 가슴이 뛰었다.
-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중에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자와 같이 큰 울림으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흐름을 바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의 역사에서 모세와 엘리야처럼 하느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삶에, 지나온 삶이나 다가올 삶의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주거나 예수님의 삶을 암시 혹은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야훼 하느님의 뜻을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전하고 확실하게 심기 위하여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이 땅에 살면서 반드시 지켜야할 율법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아서 전해주었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야훼 하느님을 떠나서 해체 위기에 놓여 있을 때에 바알과 아세라를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와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남한과 북조선의 지도자들이 만남으로써 이 민족의 평화와 통일이 점점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회가 번영만을 위한 통일이 아니라, 남과 북의 모든 구성원들이 더불어 함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기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의 만남이 경쟁과 욕망에 물든 사람들이 공존과 협력의 도를 몸과 마음에 새기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걸음의 시작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산에서, 자기 삶의 정점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 대하여 자기와 함께 했던 사람(제자)들이 깨닫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바로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둘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하느님의 율법을 지킬 것을 선포하고 그렇게 할 때에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모세의 죽음은 죽을 때가 되지 않았지만,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었습니다. 야훼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 평등공동체를 만들어 갈 세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은 고난과 위협의 역사적 순간마다 새 시대를 향한 기다림의 근거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기다리는 근거입니다. 엘리야와 예수님은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시 지배자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었던 종교와 신앙에 도전하였습니다.
예로부터 모든 종교와 문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도전받아왔습니다. 이러한 욕망에 거스르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야훼 하느님의 역사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시작한 교회의 역사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삶의 한 부분인 이 순간을 내 삶의 정점으로 만들면서 예수님의 길을 향해 돌아서는 기회로 만들 때에,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삶의 정점에서”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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