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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입으로 말하면” - 道之出口

기사승인 2018.09.03  2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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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35

“大象을 잡으면 천하가 향하여 가고, 향하여 가면 해가 없고. 편안하고 평안하고 태평하다. 음식과 음악이 함께 하면 과객이 모여든다. 도가 밖으로 나가면(그러므로 도가 말이 되어 나가면, 가로되) ‘담백하여 맛이 없고, 보아도 족히 보이지 않고, 들어도 족히 들리지 않고, 써도 족히 다함이 없구나!’”
- 노자, 『도덕경』, 35장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泰(太, 大).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故道之出言也 曰),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큰象은 4, 14, 21장에서 말하듯이, 자연계의 물질력을 조화하는 자연의 덕을 뜻합니다. 노자는 도를 좌우를 다 갖춘 大象이라 합니다. 도는 너무 커서 형상이 없기도 하고,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형상은 도가 각 사람에게 이해되는 모습입니다.

사람마다 大象이 다를 수 있습니다. 자극적인 노래와 음식이 흥을 돋우지만 도는 무미하고 담백합니다. 도가 항구적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바람은 맛이 없고 향기가 없습니다. 물은 무색 무미 무취합니다.

오색 오음 오미는 사람을 현혹합니다.<12장> 맛의 세계나 소리의 세계는 모두 감각적 세계의 일부 소산입니다. 사람은 음악과 음식에 대해서는 민감합니다. 자극적이고 맛이 있고, 취미에 맞는 음악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듭니다. 도의 말은 맛이 없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Getty Image

더욱이 도는 감각으로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고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담과 무미는 평범함 속에 있습니다. 담은 맑고 고요한 것이니 날뛰는 것이 없고 무미는 아주 맛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맛없이 맛있음의 폐단을 경고하는 것이며, 고요하여 날뛰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의 “새로운 길”

노자는 입으로 말해지는 도는 담백하여 맛이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충분히 경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의 모든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 중에서 자극의 세기가 큰 것에 익숙해져 있고, 그만큼 더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도를 보고 듣고 깨닫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맹물을 마시면서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때에 도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 자극이 없더라도 일상의 삶에서, 늘 보고 듣고 만나던 사람과 사물에서 도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되는 활동과 가르침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확장시키며, 그 나라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무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함께 참여한 무리들은 사건들 속에서 그 나라의 실체를 경험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 표징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그 요구의 이면에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이라면, 이미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 속에 그대로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들,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만일 이 세대가 표징을 받는다면.....” 하면서 말끝은 흐립니다. 이는 표징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한숨을 내 쉬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드러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이전에 행한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했던 많은 일들은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것이었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하여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일 이 세대가 표징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미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을 통해서 주어진 것임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하늘의 표징은 예수님의 활동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모습 속에서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또 요구하는 것은 하늘의 징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한 사람들과 일으킨 사건 속에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는 지배자들이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은 신비하고 경이로운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하느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오늘도 계속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닮고 예수님의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늘의 표징이 드러나고 널리 퍼져야 합니다. 이러한 드러남과 확장은 하느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그 나라의 도래를 막으려는 세력들이 꼼짝 못하게 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표징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 속에 있는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생명을 억압하는 세력이 크면 클수록 그 길의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고, 평화를 깨뜨리는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평화를 원하는 열망도 더욱 강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느님의 통치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하늘의 징조를 드러내면서 행동하는 사람들의 가치는 더욱 빛날 것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하늘의 표징을 행하며” 중에서” 中에서

이병일(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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