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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가장 부드러운 것이” - 天下之至柔

기사승인 2018.10.29  20: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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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43

“천하에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에 가장 견고한 것을 추격하여 지나가고, 형체가 없는 것이 틈이 없는 것에 들어가니, 나는 이로써 無爲가 有益함을 안다. 말 없는 가르침과 함이 없는 이익, 천하에 여기에 (능히) 다다른 사람은 드물다.”
- 노자, 『도덕경』, 43장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無間,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能)及之(也)

말이 없는 가르침은 인위적 예법을 반대하는 노자의 말입니다. 함이 없는 무위는 예나 인의로 다스리지 않는 정치입니다. 노자는 무위야말로 백성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기는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물은 지나가지 못한 곳이 없다.”(왕필)

노자는 柔 弱 虛 微를 도의 특성을 말하는 표현방식이라고 합니다. “물은 바위보다 잘 달린다.”(78장) 견고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수용성과 포용성, 지금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성과 서로 다른 것도 인정할 줄 아는 포용성이 필요합니다.

ⓒGetty Image

고정관념을 가지고 세상을 자신의 고정관념에 맞추려고 하면 결국 세상에 뒤지게 됩니다. 나무의 뿌리는 단단한 바위를 뚫고 자랍니다. 그 뿌리가 바위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무의 뿌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부드러움이 단단한 바위를 뚫는 것입니다. 들어갈 틈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들어가는 것이 생명력입니다. 이것이 부드러움의 강함입니다.

길에는 노력이 있다. / 가고 또 가면서 밟아줘야 한다.
한 없는 반복의 노력속에 / 자연이 비껴준 곳이 길이 된다.
내 삶의 길을 위해서 / 나는 얼마나 걷고 걸었던가.
만들어진 편한 길도 좋지만 / 내 땀이 묻은 길은 더욱 아름답지 않을까?
내가 걸었던 발자욱이 / 아름다운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 오청환, “길”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견고한 것을 앞지를 수 있음은 그것의 포용성에 있습니다. 부드러움, 약함, 비어 있음, 미미함은 자기와 다른 것을 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것보다 오랠 수 있습니다. 굳이 말로 설명하거나 애써 행함으로 해명 않아도 부드러움에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습니다. 그 넓은 품은 경계가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습니다.

‘우리’라는 대명사는 말하는 사람 쪽만 가리키기도 하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상대편까지 모두 포함하여 가리키기도 합니다. 내가 속해 있는 무리를 나와 함께 부를 때 ‘우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라고 하는 그 말 속에는 공통적인 그 무엇을 전제하고 있으며, 또한 그 무리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우리’화는 개인의 자아정체감을 희석시키고 집단의 단순한 몇 가지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여 친구 혹은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증폭시킬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물론 공동체 의식은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면 배타성을 밑바탕으로 한 집단적 경계감에 몰입되어 자아를 상실하는 악순환은 언제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은 ‘너희’가 말하는 ‘우리’의 영역을 확대하라는 말씀이며, 닫힌 ‘너희’ 보다는 열린 ‘우리’가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면, “‘너희’가 ‘우리’라고 하는 그 속에 내가 있느냐?”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우리 속에 예수님이 있기를 바라지만, 예수님은 그 말 속에 구속되지 않으려 합니다. ‘너희’는 예수님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은 독점할 수 없으며, 예수님을 포함하는 제자들의 무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공동체 속에 예수님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순간에 예수님보다는 자기의 명예나 독점욕이 앞서면, 예수님의 너희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개개인이 ‘우리’라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올바른 관계입니다. ‘우리’라고 할 수 있는 관계는 확실한 연대의식과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나라고 하는 개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분명한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연대의식입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속에는 훈훈한 공동체성이 있으며, 또한 분명한 편 가르기가 있습니다. 편 가르는 ‘우리’보다는 함께 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는 그 ‘우리’ 속에 예수님이 있을 때에 함께 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편 가르는 우리, 함께 하는 우리”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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