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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교회 아카데미, 한국교회 존재이유를 만든다

기사승인 2018.11.03  15: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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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교회 아카데미 준비하는 이정배 교수를 만나다 2

이정배 교수의 이야기에 의하면 작은교회 아카데미 밑을 흐르는 신학은 세상을 통해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미시오 데이”(Mission Dei)였다.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 맞서고 구조를 바꾸는 일에 기본이 되고 있는 책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학화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책들이 교회에서 사유되고 전해질 수 있는 교회 구조의 틀바꿈이었다.

면죄부만큼 타락한 오직 믿음으로만

여기에 이정배 교수는 아무도 마시지 않는 크고 멋있는 한강물 같은 교회가 아니라 작지만 마시기 위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교회를 위해 작은교회 아카데미를 진행하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 자폐증, 치매, 방종이라는 세 가지 죄를 걷어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는 희망없다고 강한 어조로 논증했다.

““오직 믿음”이라는 것이 개신교에서는 중세 면죄부만큼 타락했어요. 왜냐하면 바깥에서 아무 짓이나 하고 교회에 들어와도, 믿습니까, 아멘, 하면 구원을 주는 교회는 “오직 믿음”이라는 것을 면죄부 같이 사용해요.”

이러한 부패가 오히려 개혁의 당위성을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부패를 부패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교회는 어쩌면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개혁과 탈을 지향하는 작은교회운동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작은교회 아카데미를 이야기 하며, 이정배 교수는 힘주어 말한다. “일단, 믿고 와 보라.”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기자에게는 자신감으로 읽혔다. 작은교회 아카데미의 분명한 지향점을,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을 안겨 주는 점이겠거니와, 전면에 내세운 자신감 말이다.

교회와 교회 개혁은 목회자만의 몫이 아니다

- 교단을 막론하고 70, 80년대 그리고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우스갯소리가 있잖아요. 민중교회는 여기 있는데 민중은 여의도에 있다. 민중교회 시절에도 그냥 편하게 와서 교회에서 주는 위로를 받고 싶은데 민중교회 강단에서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잖아요. 사회구조가 워낙 힘든 시절이었으니 고민해야 되고 세상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메시지가 주를 이뤘는데, 작은교회운동을 하는 교회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그런 구조는 같지 않나 싶습니다. 작은교회운동이 민중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작은교회한마당을 했을 때 목회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교우들이 같이 나와서 작은교회운동을 하는 다른 교회들도 많이 봤거든요. 그러면서 작은교회운동에 관련한 100여개의 교회들을 봤어요. 그리고 5년 동안 작은교회한마당을 하면서 계속해서 했던 이야기가 목회자들만 참여하지 말자, 교회 교우들도 함께 참여하라고 독려했어요.

이번에 작은교회 아카데미도 목회자만 참여하지 말고 한 교회에서 목사와 교우들이 같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목회자와 아내, 그 교회에 신학생이 있으면 신학생도 같이 참여하라 하는 것이죠. 지금까지는 목회자들 끼리, 교우들 끼리 모여서 뭘 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이 문제는 목회자와 교우들이 함께 와서 함께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작은교회 아카데미에 참여하는 교회의 수가 적어도 괜찮으니 한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우들, 그리고 신학생들도 같이 오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죠. 함께 변화의 기운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 한국교회의 타락의 주요한 원인 중에 하나를, 종교개혁의 원리였던 “오직 믿음으로만”에서 찾고 있는 이정배 교수의 일성은 고민의 지점으로 다가 왔다. ⓒ이정훈

제가 평생 샌님처럼 학교 안에만 있다가 생명평화마당이라고 하는 곳엘 처음 나가 보니 적성에도 안 맞는 것 같고, 몸에도 안 맞는 소리도 쳐야 되고, 거리에서 설교도 해야 되고, 몸에 안 맞는 옷을 계속 입고 있는 것처럼 어색한 것이 많았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 나와서 복음주의 진영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에큐메니칼 진영은 목회자 혼자는 의식 수준이 저만큼 가 있어, 근데 교우들의 사고는 별도로 움직여, 물과 기름처럼. 교우들은 목회자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목회자는 혼자 소리쳐, 그러니 목소리에 힘이 없어.

복음주의 진영은 생명과 평화에 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 목회자와 교우들이 같이 움직여요. 목회자와 교우들이 같이 움직이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더라구요. 힘이 있더라구요. 에큐메니칼 진영의 목회자 혼자의 능력과 생각은 뛰어나, 근데 교우들의 뒷받침이 안 되고, 교회 가면 교회 맞는 설교해야지 바깥에 나오면 교회의 언어가 되지 못하더라구요. 그런데 복음주의 진영은 언어가 일치되는 경향이 있더라구요.

그러면서 왜 에큐메니칼 진영의 교회는 그러지 못할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언어를 교회 안에서는 왜 철저하게 뿌리내리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이번에 작은교회 아카데미에 참여할 때는 한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우들이 같이 참여하라고 한 것이죠. 같은 언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죠. 변화하는 구조를 같이 만들어야지 목회자 혼자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죠.

사실 민중이 있는 곳에서 민중교회가 되어야 하죠. 5번의 작은교회 박람회를 통해서 목회자들과 교우들이 함께 행사를 만들고 꾸미고 하면서 작은교회운동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에서 되어 있어서 아마 작은교회 안에는 “작다”라고 하는 가치를 공유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겠나 싶어요. 민중교회와 민중신학 시대와는 조금 다른 버전 업데이트가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모임이 그렇게 한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우들이 같이 오는 모임이 되었으면 좋지 않겠나 싶어요.

- 작은교회운동 현장에 계속 계셨는데요, 그런 작은교회운동을 하고 있는 교회들 중에 정말 다르구나 하는 교회가 있으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지금 여기 교회”가 있어요. 담임 목사는 사례를 안 받고, 그 근처에 있는 유치원 버스 운전 하면서 먹고 살고요. 목회자는 장로교에서 대학을 나오고 감리교에서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다시 장로교에서 목회를 하고 있어요. “지금 여기 교회”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들었던 보험을 다 깨버렸어요. 복음적으로 한다면 지금 여기서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거다, 미래를 위해서 지금 투자하고 그런 것 보다, 지금 나의 보험은 나의 교우다, 이런 생각으로 보험을 깬 것이죠.

지금 여기, 현재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교회

그 교회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밥도 먹고요, 예배를 드리면서도 와인도 마시고요, 그렇게 자유로우면서도 생활에는 철저해요. 보험이라는 것이 미래를 위해 몇 십만 원씩 그렇게 쌓아두는 것이잖아요.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겠다, 이런 결심으로 보험을 깨는 것이죠. 내가 아프면 교우가 있지 않느냐, 이런 결속력을 가지고 생활하고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더라구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눈물이 나더라구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같은 신앙을 갖고서 소는 물을 먹고 우유를 내는데 누구는 물을 먹고 독사처럼 독을 내는 거 아닙니까. 지금 대형교회들은 물을 먹고 독을 내고 있잖아요. 감동이 되는 교회들이 굉장히 많아요.

- 저희 에큐메니안에 두 주에 한 번씩 칼럼을 내주시는데 이번 10월 달에는 강도 높게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들을 써 주셨습니다. 특히 지난 10월 넷째 주 글에서는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공모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책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평소에 교수님께서 책의 어려운 언어들을 굉장히 정제해서 소개해 주셨는데, 이번에는 강도 높은 언어들을 그대로 전해주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독자들의 반응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교수님의 글을 대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희 에큐메니안의 독자들이 나름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임에도 그런대, 일반 교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겠구나 하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한국교회가 지금의 구조를 깨려면 자본주의와의 대결이 필수불가결해 보입니다. 어떨까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래서 이런 책을 소개할 때도,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생각하면서도 그 가치를 이야기 하고 싶으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 나를 다독거리고, 나를 치열하게 비판하려는 게 첫 번째 의도이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책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죠.

늘 하는 말이지만 카톨릭은 뭐냐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화한 것이 가톨릭이다. 그러면 개신교는 뭐냐, 개신교는 자본주의를 낳았지만,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기독교화 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기독교를 자본주의화 했다고 봐요. 로마화 된 가톨릭을 비판하고 나온 게 개신교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 시대의 또 한번 종교개혁은 자본화된 교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이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역사를 24시간으로 나눈다면 자본주의는 11시 59분 47초의 생겨난 건데 그 짧은 시간 내에 생겨났는데 자본주의에 모두 매도된 것이죠. 하지만 지금 자본주의는 위기에 빠져 있어요. 자본주의가 한계에 와 있어요. 자본주의 멸망할 지경에 와 있어요. 빨리 둘레로부터 빠져나오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죠.

그 자본주의가 영구히 갈 것이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와 있다는 건, 비정규직을 만드는 것만 봐도 될 것 같아요. 자기 이익이 줄어드니까, 이익을 확대하려고 쥐어짜고 쥐어짜고 하는 거 아닙니까.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2.0도에서 1.5 도로 IPCC(UN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가 기준치를 내려잡았잖아요. 2.0도 가지고도 미래가 없다는 거 아닙니까. 환경문제에 관해 가장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곳이 IPCC인데 1.5도 내려잡은 것은 굉장히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에요.

건강한 자본주의를 위한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

그런 문제들 속에서 자본주의 자체가 큰 위기에 빠졌는데 자본주의가 한꺼번에 멸망하게 되면 또 큰 문제잖아요. 그러니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기능이 가능하려면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들어와야 하잖아요.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들어와서 자본주의를 순화시켜 가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싶어요. 한국 교회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방향조차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요. 그 점에서 저도 많이 자신이 없고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그 가치를 좀 담아내야 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고 있어요.

제가 지난 번에 소개한 『위험한 자본주의』의 저자가 아시아적인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기독교 역사라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와 개신교의 운명은 같다고 비판한 것이죠. 자본주의라는 것이 철저하게 하나님과 분리한 개인주의 기독교에 기초하기 때문에 단순히 기독교가 공동체주의를 선호한다고 말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기독교 갖고 있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인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이야기는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절대적인 원리에요. 그런 기독교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 앞에서 그런 차원에서 글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죠.

제가 다음 번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에 대한 글을 소개하려고 해요. 이 책 내용이 뭐냐면 임시정부를 우리의 국가나 정부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면 임시정부 안에 이미 사회주의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 해요. 이동희 같은 사람들의 사회주의가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이에요. 여운형에 의한 사회주의 구성원들이 임시정부 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죠. 임시정부를 인정한다면 사회주의도 인정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몽양 선생이 기독교인이에요, 평양신학교 출신이에요. 몽양 선생의 기독교적인 면모는 하나도 부각이 안 되었는데, 몽양 선생의 좌우합작론 같은 것들은 굉장히 기독교적인 영향인 큰 것들이거든요.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김구 선생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몽양 선생이라고 생각해요. 기독교 안에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와서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자본주의도 살고 해요.

제가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서 일제 36년간 침략을 받았을 때 우익 그룹과 기독교 그룹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만 알았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다 불온시 하잖아요. 그들이 겪었던 고통 속에서 그들이 했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역사는 굉장하잖아요. 그걸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죠. 그것도 우리 역사 속의 일부인데, 그 점을 기독교가 받아들이면 자본주의에 대해 기독교가 비판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신앙이 달라질 수 있는 계기도 된다고 봐요.

-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너무 개인화되는 서구 사회에 건강한 공동체주의를 이야기 했기 때문에 서구 사회가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억압당했던 사회에서 기독교가 오히려 개인을 강조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급격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시 공동체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수용될 수 있을까요?

역사라는 것들이 돌고 돌고 하는 부분이 있어요. 지금 의외로 우분투라는 개념이 많이 회자되잖아요. 사실 이 개념이 북아프리카에서 출발한 개념인데, 우분투라는 개념이 없으면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는 유일신을 강조하고 기독교 전의 헬라주의라는 것도 제우스를 최고의 신으로 강조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 속에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이 논리가 나올 수가 없어요. 유대교와 헬라철학 배경 안에서 예수께서 활동을 하셨잖아요. 근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예수가 하나님이다, 이거는 유대교로 안 되고 헬라철학 가지고도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북아프리카 사회에서 I am because we are, 우리이기 때문에 나다, 나와 우리가 같다는 이야기에요. 그 사유 속에서 삼위일체라는 틀이 나온 거에요. 삼위일체 교리는 모두 터툴리안 같은 북아프리카에서 활동한 교부들이 만든 거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I am because we are라는 것은 함석헌 선생님의 씨알 개념과 같은 것이에요, 부분과 전체는 같은 것이라는 사상이죠. All for one도 있지만 One for all도 있는 것이죠. 도덕경에 따르면 양이 극대화 되면 음을 위해 자리를 내주고, 음이 극대화 되면 양을 위해 자리를 내주고 하는 도자반지동(道者反之動)이라는 가르침이 있듯이 개인주의가 너무 극에 이르니까 여기 저기서 공동체를 부르짖고 있잖아요.

복음주의 진영의 한 목사가 주도하는 공동체 모임에 가 보면, 300개 이상의 공동체가 모여요. 7명이 모인 공동체, 6명이 공동체, 또 그거보다 더 큰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 등, 그만큼 어떤 책의 제목처럼 다르게 살기로 결정하는 욕망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 같아요.

교회 만큼 자주 모이고 결속력 있는 곳이 없는데, 교회가 그런 공동체에 대한 요구와 열망을 좀 받아 들여서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운동으로 탈바꿈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의 추세고 당분간 큰 흐름은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흐름에 교회가 반응하지 못하면 몇몇 대형교회는 남을 수도 있지만 공동체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는 교회들은 사라질 것 같아요.

- 작은교회론 책도 나왔는데요, 기존의 교회론과의 차이점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한국적 작은교회론을 하면서 세 개의 “탈”(脫)을 이야기 했어요, 탈-성장, 탈-성직, 탈-성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탈성장은 한 마디로 말하면 성숙이라는 것이에요. 성숙이라는 것은 본질을 찾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교회의 세 가지 죄. 자폐증, 치매 그리고 방종

솔직히 물어 볼게요, 초대교회로 돌아 가자고 목회자들이 말하지만, 돌아가고 싶은 사람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어요, 허울 좋은 구호 뿐이지, 만약 돌아가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하고, 내려놓고, 그렇게 해야 되는데, 실제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 없어요.

▲ 한국교회의 세 가지 죄를, 자폐증, 치매, 방종에서 찾고 있는 이정배 교수 ⓒ이정훈

작은교회운동은 본질을 회복하자는 것이에요. 예컨대 한강 물이 아무리 멋있어 보이고 크고 해도 그 물 먹겠다고 고개를 숙인 사람 없어요, 아무도 마시려고 하지 않잖아요, 너희나 마시라고 욕이나 하죠. 하지만 강원도 산골에 계곡물을 보면 고개 숙이고 마시고 싶잖아요.

한국적 작은교회론은 우리가 다시 한번 그런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 싶다, 사람들이 먹고 싶은 물이 되고자 하는 것이죠. 아무도 마시지 않는 한강물 같은 교회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지금 “오직 믿음”이라는 것이 개신교에서는 중세 면죄부만큼 타락했어요. 왜냐하면 바깥에서 아무 짓이나 하고 교회에 들어와도, 믿습니까, 아멘 하면 구원을 주는 교회는 “오직 믿음”이라는 것을 면죄부 같이 사용해요. 그런 기독교가 아니고 자기가 맺는 열매를 통해서만 자기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교회가 되어야죠.

성령의 원리도 그런 것이잖아요, 바람이 부는 것은 나뭇가지 흔들리는 것을 봐서 알 수 있듯이 성령도 그와 같다, 자기가 맺는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기독교, 오직 성령과 평화로만 이루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먹고 싶은 물이 되고 싶고, 그럴 때 목회자가 자부심을 갖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고, 길을 가다가 길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신앙의 삶이죠. 길만 믿는다고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에요. 이런 자부심이 작은교회론이 갖는 기존의 교회론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죠.

저는 한국교회를 세 가지로 비판합니다. 얼마 전에 방한 한 미국의 존 캅(John Cobb) 교수가 쓴 『영적 파산』(Spiritual Bankruptcy: A Prophetic Call to Action)이라는 책이 있어요. 우리는 무슨 일을 생기면 미국 교회를 보지만, 그분의 눈에는 미국 교회가 영적으로 파산 했다고 보거든요.

저는 영적 파산이라는 말대신 좀 전에 말씀드린 자폐증에 걸렸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에 치매에 걸렸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잊어버린 자기 출처를 잊어버린 영적 방종이죠. 그리스도의 이름을 써 가면서 온갖 방종, 방탕한 짓을 다하는 이 세 가지 죄를 벗겨내야 하는데, 어떻게 벗겨 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이제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자폐증에서 벗어나는 교회, 열려진 교회, 요즘 나오는 말로 하면 마을교회도 될 수 있겠죠. 영적 치매를 벗겨내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처음 교회가 어떤 교회냐 하는 문제를 고민하죠. 그리고 영적 방종, 경건의 모양만 있지 능력은 하나도 없는 교회, 한마디로 말하면 자본주의에게 먹혀 버린 교회, 자기들의 이익으로 만들어 버리고, 자기들 속에서만 모든 게 가능하고, 그 외에 모두 배타 하는 교회, 그런 교회에서 벗어나는 것이죠. 열린 구조의 교회가 되자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목사도 존재론적인 차이가 아니라 하나의 역할일 뿐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죠. 목사도 이미 교단들에서 이중직, 삼중직 다 허용했잖아요. 삶을 책임 못 지니까 허용한 것이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가 청지기다, 존재론적으로 다르다, 이런 말을 할 수 없잖아요. 내몰린 지경이 되어 버렸거든요. 이런 상황 속에서 성직에 대한 문제도 하나의 역할 문제로 보자는 것이죠.

지금 교회는 방주가 아니라 야전 조각배고 그런 것이 가능하고 작은 교회들이 바로 그런 역할을 세월호 사건을 통해 여실히 보여 줬다고 생각해요. 그런 모습들이 교회이지, 대형교회들은 공룡처럼 존재하겠지만, 그런 곳은 교회가 아니죠.

- 작은교회 아카데미가 2년 4학기제라고 하셨으니까, 각 학기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인가요?

첫 학기는 탈성장을 주제로, 두 번째 학기는 탈성직을 주제로, 세 번째 학기는 탈성별을, 그리고 마지막 학기는 이 세 개의 탈을 유지·지탱할 수 있는 성서적 토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해요. 예를 들면 탈성직을 이야기할 때는 함석헌 선생의 씨알 사상을 살펴보려고 해요. 함석헌 선생의 씨알 사상이 얼마나 평등한 겁니까, 우리가 한국적 교회론을 이야기 하고 탈성직을 이야기할 때 씨알 사상만큼 좋은 사상이 없거든요.

또 하나, 기독교 전통에서는 성직자 개념만 있지 수행자 개념이 없어요. 종교 중에 수행자 개념이 없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어요. 목회자들은 모두 수행자에요. 자기들이 갈고닦아야 하는 수행자에요. 기독교 목회자는 하늘이 준 것을 모두 담고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잖아요. 하지만 목회자는 수행자여야 해요. 수행 개념의 중요성, 수양 개념들이 탈성직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들이죠. 

탈성장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조현 기자의 책을 읽지만, 그때 탈성직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양희송의 세속 성자라는 책을 가지고 이야기 하려고 해요.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세속에서 성자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이냐를 고민하려는 것이죠. 

탈성별을 이야기할 때는 완전히 페미니스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메리 데일리부터 기독교 재건의 여성신학적 기초 등을 통해서 기독교를 바라볼 때 여성신학은 어떻게 바라보느냐도 살펴보려고 해요. 이런 책들과 함께 여성공동체 분들 모셔서 이야기도 듣고 할 거에요.

그리고 성서적 이야기를 할 때는 구약, 예수, 바울 등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죠. 성서들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보려는 것이죠. 

- 이런 꿈을 꾸시고 행동에 옮기시면서 참 기쁘시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10년 하고 나니 힘에 벅차죠. 후학들이 학진에 연구비 받으려고 글을 쓰지만, 이런 곳에 글 쓰는 것은 논문 평가 받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봉사 잖아요. 후학들이 해 주면 좋겠는데 현실이 또 그렇지 않고, 이런 일을 좀 뒷받침 해 주는 후학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이거 하면 얼마나 오래 하겠어요. 2년이면 이제 우리가 물러나야 되는데, 이걸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후학들이 생겨나고 해서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지역 작은교회 아카데미가 진행될 수 있기를

계획되어 있는 2년간의 프로그램까지 진행해 보고 잘 되어서 정기 교육 프로그램처럼 고정되었으면 해요. 그리고 평가를 잘 해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하나의 허브 역할을 했으면 해요. 앞으로 2년 동안은 시행착오가 많을 거고 또 여러가지로 피드백도 많이 들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염려하신 것처럼 너무나 현실에서 동떨어진 이야기를 제대로 강의를 잘해줄지도 걱정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걱정도 많아요. 하지만 한 번 내질러 보겠다, 다른 곳과는 차별점을 가지고 한번 해보겠다, 그런 마음 가지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 어떻게 보면 2년의 기간이 시험적인 기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작은교회 아카데미를 진행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이게 잘 되면 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지역에서 요청하면 지역 아카데미를 진행하는 것이죠. 우리는 3박 4일을 하지만, 지역에서는 1박 2일 프로그램으로 축약을 해서 각 지역에서 강의를 해 주는 거예요. 이 지역에서는 탈성장, 다른 지역에서는 탈성직, 이런 식으로 해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죠. 

- 좀전 이야기 나눴듯이 지역에서 작은교회한마당 하듯이 지역에서도 작은교회 아카데미를 진행한다는 말씀이군요. 정말 2년이라는 기간이 중요하군요. 그리고 책들 면면이 참 좋은 책들이라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분들도 꼭 읽었으면 좋겠고 프로그램이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수적인 진영에 계신 분들이 좋다고들 해요. 자신들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책들이라 좋다고 평가는 하는데, 문제는 40명 모으기가 쉽지 않아요. 11월 11일이면 방학도 아니고 목회자들 중에서 이중직에 있는 분들은 일도 해야 되는데 올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나 그런 걱정 생기네요.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한테 부탁하는 것은 주변에 뜻이 있는 분들이 계시면 아름아름 추천해서, 물론 외부적으로 홍보는 다 했는데 홍보했다고 오는 거 아니잖아요, 한번 가 봐라, 이렇게 좀 돼서 첫 학기 40명 좋은 분들이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모인 사람들끼리 아래 위에 구조가 아니라 서로 이야기 하고 부대끼면서, 뭔가 의미를 찾으면, 이번에 참석한 사람들이 2학기 때 설교도 맡고 새벽기도 맡고 그렇게 진행할 생각이에요. 이렇게 되면 참여도가 높아질 것 같아요. 어쨌든 믿고 와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작은교회 아카데미가 이제 2년의 첫 여정을 시작한다. 성공적이라는 말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작은교회 아카데미가 지향하고 있는 것들을 두고 볼 때, 참석 교회와 참석자 수로 결정될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면죄부 때문에 개신교가 생기도록 타락했던 중세교회만큼 악화일로에 있는 한국교회가 여전히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작은교회 아카데미는 성공한 것이 아닐까!

작은교회 아카데미는 선착순으로 40명을 모집하게 된다. 참가비는 10만원이고, 참여를 원하는 분들은 온라인으로 신청서를 작성한 후 계좌[(국민은행)702301-00-007759 예금주: 생명평화마당]로 입금하면 된다.
자세한 사항은 생명평화마당 010-4548-3572 사무국으로 문의하면 된다. 온라인 신청 방법과 자세한 일정은 이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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