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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기사승인 2024.04.27  04: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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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와 산책하기 (35)

▲ 고흐, <몽마르트르의 카페 테라스> (1886, 캔버스에 유채, 49×64cm, 오르세미술관, 파리)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에 묻혔던 고대도시 헤라쿨레니움과 폼페이가 1738년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8세기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도시구조와 건축과 삶의 양식을 1700년 전 도시적 삶과 비교하며 고대인의 삶과 예술에 대하여 관심 갖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발흥한 계몽주의는 그리스도교가 존재하지 않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성기에 담겨있는 신화와 학문과 예술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상류층의 자녀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그랜드 투어>를 했다. 고대의 모범과 향수, 그리고 가장 완전하고 조화롭고 이상적인 예술 양식인 고전주의를 모방하려는 욕구가 예술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당대의 예술 양식인 로코코에 식상해 있던 프랑스 사회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런 예술사의 흐름을 신고전주의라고 한다. 미술사에서 신고전주의는 국가가 주도하는 예술 양식이다. 에꼴 데 보자르와 파리 살롱과 로마상은 신고전주의 화가의 꿈이었다. 단연 의미와 교훈을 담고 있는 역사화가 으뜸이고 풍경화와 정물화는 뒤로 밀렸다.

국가가 주도하는 미술이 갖는 가장 큰 약점은 개성의 상실이다. 이를 감지한 화가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번번이 살롱에 낙선하면서도 자신들의 예술 성향을 포기하지 않았다. 도리어 신고전주의를 비웃으며 신고전주의가 담을 수 없는 자연과 빛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몽마르트르의 카페 게르부아에 모여 미술 담론을 이어갔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라투르, 드가 등이었는데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인상파라고 불렀다. 인상파 화가들은 미술에서 개성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알게 하였다. 개성 없는 예술은 예술에 대한 수치이다.

미술사에서 빈센트 반 고흐만큼 개성이 강한 화가가 있을까? 하지만 그의 개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1880년부터 1886년 안트베르펜까지 그는 거듭되는 실패와 실연과 까탈스러운 기질과 싸우면서 자기만의 개성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좌절의 몸부림은 인생관을 어둡고 음습하게 하였다. 이때의 빈센트 미술은 진흙탕 속에 뿌리를 밖에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연꽃 순 같았다.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886년 파리 생활을 시점으로 어떤 화가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개성이 활화산처럼 용출하기 시작하였다. 불꽃 같은 정열이었다. 빈센트가 아니면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예술혼이었다. 시인 서정주를 빌려 말한다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고 할 수 있겠다.

사과는 사과고 복숭아는 복숭아다. 토마토는 감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한겨울에 꽃을 피우는 동백은 봄에 피는 화사한 벚꽃을 시샘하지 않는다. 개성 없는 예술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빈센트가 빈센트였듯이 인생도 그렇다.

최광열 목사(아리랑인문지식연구소 연구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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