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지구 나이 6000년설’을 비판하면 징계대상인가

기사승인 2024.05.07  04:03:47

공유
default_news_ad1

- 창조과학과 유신진화론의 쟁점과 창조의 삼중적 의미

▲ 창조의 신비를 유사과학으로 증명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Getty Images

‘창조과학을 비판하고 유신진화론을 옹호해 왔다’는 이유로 고발된 서울신대 박영식 교수가 징계에 회부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4월 25일 열린 징계위원회에서는 의결이 보류되었다고 합니다.

창조과학에서 주장하는 ‘지구나이 6000년설’은 1650년 영국의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대주교가 ‘지구는 BC 4004년 10월 23일에 창조되었다’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연대기 계산이 정확무오하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도 반박이 가능합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채류 기간조차 430년(출 12:40, 갈 3:17)과 400년(창 15:13, 행 7:6)으로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셔는 430년을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셔 시대에는 지구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셔 보다 1세기 이전 사람인 칼빈 조차도 성경이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maore)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창 1:16)라고 하였지만, 달은 발광체(maore)가 아니라 반사체라는 당시 과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하여 창세기의 해당 표현은 과학적 오류라고 수용하였습니다. 그는 신적 기원을 가진 성경이 문자적 오류 때문에 손상을 받지 않으며, “하늘의 지고한 신비가 대부분 비천한 말로 표현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조는 과학적 사실일까요? 빌헬름 딜타이(1833-1911)가 처음으로 인문과학(Human Science)과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을 구분하였습니다. 인문과학의 대상의 인간의 삶이지만, 자연과학은 자연현상을 실험과 관찰을 통해 세운 가설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과학의 역사를 보면  하나의 기존 가설은 새로운 다른 가설에 의해 번복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자연과학적 진리는 번복 가능한 가설’이라는 것이 과학에 대한 과학적 정의입니다. 과학적 진리가 절대적이라고 맹신하는 것을 과학자들은 ‘과학적 미신’이라고 합니다.

신학은 어느 쪽에 속할까요? 존 맥쿼리(2019-2007)는 신학(theology)은 자연과학이나 인문과학과는 전적으로 다른 ‘신적 과학’(Divine Science)이라 하였습니다. 신학은 무엇보다도 연구의 대상이 신이고 신에 대한 인간의 신앙이며, 신에 대한 신앙은 계시와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계시와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고백적 삶’을 사는 것이 신학의 목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고백적인 삶은 하나님의 뜻에 전인적으로 응답하는 ‘생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저 유명한 구약학자 폰 라트(1901-1971)도 “창세기는 신앙 고백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계성서학회(ISBL)와 미국 성서학회(SBL)에서도 신앙고백을 과학으로 논증하려는 창조과학을 사이비 신학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국제과학과종교학회(ISSR)에서는 2017년 창조과학뿐 아니라 지적설계론조차도 “정상적인 과학도 정성적인 신학도 아니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사이비 종교가 있듯이 사이비 과학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새뮤얼 로보텀(1816-1884)이 시작한 국제지구평면학회(International Flat Earth Society)입니다. 이 단체는 한 때 학술지도 발간하고 국제학회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지구평면설을 추종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형용모순입니다. 영어(Earth)와 달라 지구(地球)라는 단어에는 원형을 뜻하는 구(球)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이가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1632)를 통해 지동설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경의 천동설과 반대되는 지동설을 수용하면 기독교 신앙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고 생각하여 그를 종신형에 처했으나, 지동설이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고백을 흔들어 놓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지동설이 반성경적이라고 반대하는 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 초판(1859) 이후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가장 그럴듯한 가설로 널리 인정되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더 이상 진화론을 부정할 수 없게 되자 일단의 신학자들은 창조론과 진화론을 수용하여 창조주 하나님이 생명의 진화에도 개입하신다는 ‘진화론적 창조론’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유신진화론’이라고도 합니다. 대표적인 신학자는 북경 원인(原人) 발굴에도 참여했던 고생물학자 테야르 드 샤르댕(1881-1955) 신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와 진화를) 통일시키는 것일까? 하나님은 부분적으로 물질에 스며드심으로써, 원소들이 되고, 그리고 물질의 중심부의 지켜보기 좋은 곳에서, 우리가 오늘날 진화라고 부르는 것을 조절하고 이끌고 계시는 것이다.”(<인간 현상> 1980, 영역 322쪽)

샤르뎅은 무에서 무기체인 물질현상이 생기고, 물질현상의 임계점에서 유기체인 생명현상이 생기고, 생명현상의 임계점에서 인간의 정신현상이 생겼으며, 정신현상의 임계점에서 공동정신(co-reflection) 현상이 출현했는데, 이 네 가지 현상은 하나님의 창조로 설명하였습니다. 이어서 이 네 가지 현상 자체 내에서 다양한 진화가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물질현상 자체 내의 무기물에서 아미노산이 생기고, 아미노산에서 단백질이 생성된 것은 진화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생명현상 출현 후 아메바, 원생동물, 무척추동물, 척추동물,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원인류로 이어지는 생명이 진화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의 정신현상이 창조되었고, 정신현상으로서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무차별적 무조건적 이웃사랑의 공동정신’이 출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라는 창조적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샤르뎅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만물의 통치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계속 창조되고, 만물의 완성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완성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는 참 신이요 참 인간으로 성육신하셨을 뿐 아니라 참 우주로서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동정신의 출현 이후 인류의 진화의 목표는 모든 인간이 공동정신을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진화의 정점(Omega Point)이라고 하였습니다. 샤르뎅은 이처럼 창조와 진화가 번갈아 일어났으며 창조와 진화의 마지막 정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정신의 실현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조과학은 최초의 원창조만 무모하게 과학적으로 논증하려고 하고 진화론은 우연적인 계속적인 진화를 주장하지만, 둘 다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성서가 강조하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사람의 실현을 통한 창조의 종말론적 완성’은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샤르뎅은 진화론의 우연성을 비판하고, 그리스도 출현 이후 인류의 진화의 목적은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를 본 받아 ‘공익(公益)만을 추구하는 공동정신을 실현하는 새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익을 추구하는 인간은 공익을 추구하는 인간보다 덜 진화된 인간이라는 신앙고백을 담아낸 것입니다.

몰트만(J. Moltmann) 역시 성경 천체의 가르침은 ‘창조와 섭리와 종말’을 포함하기 때문에 이를 창조의 삼중적 의미로 해석합니다.

1. 창세기의 원창조(creatio originalis)
2. 창조 이후 섭리하시는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
3. 종말에 가서 이루어질 새 창조의 완성(creatio nova)

현대신학에서 ‘계속적인 창조’를 주장하는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이 창조론과 더불어 섭리론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7세기 루터교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창조의 보존, 협동, 조정’의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이며, 계속적인 창조가 바로 진화의 신학적 의미라고 수용한 것입니다.

아울러 몰트만은 <창조 안에 계시는 하나님> 등의 저서를 통해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18) 말씀과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사람”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합니다. 우주적 그리스도가 바로 원창조(creatio originalis)의 근거이며,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의 원동력이요, 새 창조의 구원자(creatio nova)라는 통전적 창조론을 새로운 ‘창조의 신학’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창조의 삼중적 의미’는 진화론 뿐 아니라 창조론과 종말론까지도 창조론적 관점에서 통합한 것이므로 ‘유신진화론’이라기보다 새로운 ‘창조의 신학’이라고 해야 합니다. 제가 읽어 본 박영식 교수의 <창조의 신학>(2023)도 이런 배경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17세기에 지동설을 주장하여 종신형을 받은 갈릴레이와 달리 19세기에 진화론 주장한 다윈은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서울신대 당국은 박영식 교수의 <창조의 신학>을 유신진화론이라고 폄하(貶下)하여 징계에 회부하였습니다. 진화론 뿐 아니라 유신진화론 조차 거부하는 그들이 지동설도 거부하는지 물어 보고 싶습니다.

허호익(전 대전신대교수, 연세신학연구회 종신회장)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