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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명(미묘한 밝음)의 도(道)” - 是謂微明

기사승인 2018.09.10  20: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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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36

“거두려면(줄어들게 하려면) 베풀고(펴서 넓히고), 약하게 하려면 강하게 하고, 무너지게 하려(버리려) 하면 일으키고(등용하고), 빼앗으려 하면 베풀어준다. 이를 일러 微明(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묘한 밝음)이라 한다. 부드럽고 약함이 굳세고 강함을 이기고, 물고기는 연못을 떠날 수 없다. 나라의 利器(탐하는 그릇)를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 노자, 『도덕경』, 36장
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將欲去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强,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만물은 도의 작용에 의해 펴지고 움츠리며, 강해지다가는 약해지고, 흥하다가는 없어지며, 힘을 얻었다가는 다시 잃습니다. 도는 그 형체를 볼 수는 없지만, 만물은 도의 활동에 의해 모두 조화와 질서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이것을 보이지 않는 도의 미묘한 밝음(微明)이라고 합니다. 부드럽고 약함이 강합을 이기는 이러한 자연의 도를 떠나면 인간 사회는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굳세고 강한 인위적인 수단을 가지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물고기를 연못 밖에서 키우는 것과 같이 혼란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나라에 쓸모가 있는 착한 자에게 명예와 벼슬과 재물을 주는 것은 고기를 낚기 위해 쓰는 미끼와 같습니다.

▲ Getty Image

장자는 예법을 만든 성인이야말로 이익이 있는 그릇(利器)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성인을 따라 학문을 익히면 모두 명예와 재물이 따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벼슬이나 재물 등 이익이 있는 나라의 그릇을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 내었다 //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 두리번거리다가 /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 들었다 //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
​사람들에게도 /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 냄새 같은게  있다는 것을, //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나희덕, “길 위에서”

도를 따르는 만물과 자연의 이치는 항상 몰가치적입니다. 마치 성서에서 비유된 누룩이 누룩 자체로 보면 몰가치적인 것과 같습니다. 도의 작용에 의해 변화하는 만물과 자연처럼 누룩 자체를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 도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차선으로 우리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여 행동하며 살고 있습니다.

누룩 앞에 붙어서 한정하고 있는 것에 따라서 옳고 그름이나 선함과 악함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 “헤롯의” 누룩,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누룩을 말할 때, 누룩 앞에서 한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거나 적극적으로 권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굳세고 강한 것이 부드럽고 약한 것을 이기면서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부드럽고 약하면서도 자연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질 때에 세상은 부드러워져서 온 생명이 살 맛 나는 곳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단지 누룩은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전체로 퍼져 나가고, 가루반죽에 파고들어 그것을 다 부풀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양적인 교회 성장은 누룩의 속성처럼 몰가치적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누룩처럼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확장할 것이냐 하는 목표가 그 속에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누룩의 행위에 비유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반죽에 들어간 효모가 반죽을 부풀리는 것처럼 확장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가진 사람들이 반죽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 속에 들어가서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이미 부풀어 오른 반죽에서 누룩을 다시 분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반죽은 누룩으로 말미암아 이미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사람들을 율법이나 자신들의 권력, 지금으로 말하면 돈에 종속시키게 만들 것인지, 하느님 나라처럼 모든 사람이 더 나아가서 모든 생명이 온 누리가 부드러워 져서 살맛나게 만들 것인지. 어떤 누룩이 되든지 우리 앞에는 자본주의적 세상이 있고, 이미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작은 행동이나 기도는 허공에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발생장에 축적되고 형태공명을 통해서 우리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 퍼지고,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전달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내 마음의 씀씀이나 내 몸의 움직임이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서 형태발생장에 좋은 기억들을 축적하고 우리와 후손들에게 형태공명을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세력이 늘어날수록 악한 기억이 더 많이 쌓이고, 선한 세력이 늘어날수록 선한 기억이 쌓여서 미래의 시간과 공간과 생명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 함께 이루는 공동체적 삶의 모습이 미래의 세상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빵 이야기와 누룩” 中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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