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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그렇게” - 民自化

기사승인 2019.02.04  19: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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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57

“바름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기만으로써 군대를 쓰는데, 無事로써 천하를 얻는다. 내가 그러함을 어떻게 알았는가? 이럼으로써. 천하에 꺼리고 숨기는 것이 많으면 백성은 두루 가난해지고, 백성이 이익을 얻는 근기가 많아지면 국가는 더욱더 혼란해지고, 사람(왕이나 위정자)이 기묘한 재간(지식)이 많아지면 기이한 사람이 더욱더 일어나고, 법률과 명령이 더욱더 밝혀지면 도둑이 많이 생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하기를, 내가 하려함이 없으니 백성이 스스로 교화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되고, 내가 일함이 없으니 백성이 스스로 부유해지고, 내가 욕심이 없으니(욕심이 없기를 바라니) 백성이 스스로 순박해진다.”
- 노자, 『도덕경』, 57장
以正治國,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 吾何以知其然哉, 以此, 天下多忌諱 而民彌貧, 民多利器, 國家滋昏, 人多伎巧(知), 奇物滋起, 法令滋彰, 盜賊多有, 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欲不欲)而民自樸

노자는 지식을 귀하게 여기는 정치가 가져오는 현실적인 혼란을 설명하고 비판한다. 바름과 거짓은 서로 모순이다. 그러나 천하는 바름과 거짓을 쓰지 않는 무사로써 얻어진다. 나라를 다스릴 때 인의와 예법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면서도, 전쟁을 할 때는 남을 잘 속이는 자를 칭찬한다.

규범을 따라 올바른 명분을 주장하면서도 전쟁에서 속이는 것을 귀하게 여기면, 백성은 남을 속이는 것을 배우려고 한다. 노자는 지식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일어나는 모순과 혼란을 지적하며, 지식이 늘어날수록 혼란이 심해지는 현실을 도가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새로이 나타난 학문의 성격을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자는 성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위정자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백성이 스스로 하려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위정자는 백성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고요함을 좋아하고, 일을 많이 벌이지 말고,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백성을 스스로 깨닫고, 바르게 살고, 부유해지고, 순박해 진다.

ⓒGetty Image

오랫동안 다스림을 받아온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구절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따를 때에 가능할 수 있음을 믿고 싶다. 살아 있으니 가능하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凍死者)가 얼어 죽을 때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평생을 배운 지식을 잘못 적용하고 사용하는 폐단을 사법농단 세력의 행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양승태를 비롯한 사법농단 세력은 자기들이 배운 법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속이면서 권력을 누려왔고, 지금도 그것을 놓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법 지식은 노자가 말한 기묘한 재간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기묘한 재간이나 지식으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알고 있다.

율법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자기들이 부활에 대하여 반대하는 주장을 하기 위하여 부활과 전혀 맞지 않는 시형제 결혼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시험하고 야훼 하느님의 율법을 농락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시형제 결혼법과 부활에 대하여 시비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존의 토대를 뒤흔드는 부활신앙 자체의 확산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부활신앙이 그들에게 위협적인 불온한 사상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저항하거나 봉기를 일으키려는 사람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예수님은 부활신앙과 출애굽 사건과 조상의 하느님을 연결하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을 말합니다. 부활신앙은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 그렇지만 당당하게 그 죽음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은 지금은 죽임을 당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반드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러다가 노예가 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고난과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의지와 섭리가 출애굽을 통해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와서 사건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은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살아야 하는 사람들, 지금 당장은 죽임의 위협 속에 있지만 진정한 삶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하느님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하느님, 이대로는 억울해서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의 하느님, 야훼신앙을 지키려다 죽임당한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죽더라도 다시 살아나야 하는 사람들의 하느님입니다. 생존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살아야 하는 사람들, 하느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하느님입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희망이 저항과 봉기를 통해서 새로운 부활의 삶이 열릴 것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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