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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된 정치인이여!” - 人之迷

기사승인 2019.02.11  17:3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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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58

“그 정치가 사리에 어둡고 어두우면 그 백성은 순박하고 정이 도탑고, 그 정치가 너무 자세하면 그 백성은 이지러지고 모자란다. 화여! 복이 거기에 기대어 있고, 복이여! 화가 거기에 숨어 있다. 누가 그 끝(한계)을 알겠느냐? 거기에 바름이 없는데, 바름이 다시 거짓이 되고, 착함이 다시 요사함이 된다. 사람(위정자)이 미혹된 그날이 이미 오래 되었다. 이럼으로써 성인은 두루 퍼져 있으면서도 나누지 않고, 날카로우면서도 가르지 않고, 곧으면서도 찌르지 않고, 빛나면서도 비추지 않는다.”
- 노자, 『도덕경』, 58장
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 其日固久, 是以聖人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燿

자연인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언행을 하게 되는 정치인들을 많이 보게 된다. 노자는 ‘바른 것이 다시 거짓이 되고, 착하다는 것이 오히려 재앙이 되는’ 지식의 혼란과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특정 세력의 정치인이 되면 억측과 거짓과 분노를 쏟아내는 모양이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같다.

정치인들이 손익계산과 주판을 두드리면서 이것저것 살피면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소신을 먼저 밝힌 다음 유권자에게 표를 구해야 한다. 먼저 표를 얻고 자신의 눈치껏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 사람들의 삶을 무시한 국가나 정치의 뜻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Getty Image

“많이 다스리는 정부보다 적게 다스리는 정부가 낫고 적게 다스리는 정부보다 안 다스리는 정부가 낫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불복종 中

“이 소설에서 형사 자벨은 찰찰(察察)하여 장발장을 결결(缺缺)케 하였다. 반대로 미리엘 주교는 민민(憫憫)하여 장발장을 순순(淳淳)케 하였다.”
- 유영모의 제자 박영호,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대하여
* 찰(察) : 살피다, 살펴서 알다, 상고하다, 자세하다, 조사하다, 드러나다, 널리 알려지다, 결백하다
* 결(缺) : 이지러지다(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없어지다), 모자라다, 부족하다, 나오지 않다, 빠지다
* 민(憫) : 민망하다, 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고민하다, 불쌍히 여기다, 가엾게 생각하다
* 순(淳) : 순박하다, 깨끗하다, 맑다, (인정이)도탑다, 크다, 짜다, (물을)대다, 흠뻑 적시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국시에 대하여 율곡은 44세 되던 해인 1579년(선조 12) 기묘(己卯) 5월에 대사간의 직을 사양하고 겸하여 동서(東西)를 타파하기를 진달하는 상소(사대사간겸진세척동서소; 謝大司諫兼陳洗滌東西疏)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심이 함께 옳다고 하는 것을 공론이라고 하고, 공론이 선 것을 국시(國是)라고 한다. 국시란 한 나라의 사람들이 꾀하지 아니하고도 다 함께 옳다고 하는 것이니, 이로움으로 해서 유혹하는 것도 아니며 위세로써 두렵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 삼척동자도 알 만한 것이 국시다.”

그런데 독재자들은 인심에 반하는 것을 국시라고 선전하고 강요한다. 자기의 정권연장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범죄자로 적으로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인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두루 퍼져 있으면서도 나누지 않고, 날카로우면서도 가르지 않고, 곧으면서도 찌르지 않고, 빛나면서도 비추지 않는다.”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학자가 종교적 의식을 상대화시킴과 동시에 사랑의 실천을 절대화하는 것을 보고서 예수님은 그를 극찬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언한 예수님이 그를 “하느님 나라에서 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계명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추상적입니다. 추상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들이 일어납니다. 똑같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는 전혀 다른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오류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공동체로 모입니다. 다름과 틀림, 차이와 차별, 선과 악을 구별하고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면 그러한 오류는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과 교회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우선 “사람과 사랑”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 줄 수 있는 사랑이 그 어떤 것보다 뒤에 있다면, 그 공동체는 쉽게 병들 수 있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은 그 아픔을 감당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덕목으로 사랑이 배제되지 않고, 어떤 원칙에 의해서 사랑이 무시되지 않아야 합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하느님 나라에서 멀지 않은 사람”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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