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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움이 지극하기 때문에” - 和之至也

기사승인 2019.01.21  18:3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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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55

“덕을 두텁게 품은 사람은 갓난아기에 비유된다. 독충(벌과 전갈과 살무사)가 쏘지 않고, 사나운 짐승이 붙잡지 않고, 움키는 새가 가로채지 않는다. 뼈가 약하고 근육이 부드럽지만 아귀힘은 단단하고, 암수의 합을 알지 못하나 완전히 일으키니(자지가 성낸다), 그 정기가 지극하기 때문이다.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그 조화로움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항구함이라 말하고, 항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말하고, 생명을 더하는 것을 상서로움이라 말하고, 마음이 기를 따르는 것을 강함이라 말한다. 만물을 성한즉 늙으니, 그것을 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도가 아니면 일찍 그친다.”
- 노자, 『도덕경』, 55장
含德之厚, 比於赤子, 蜂蠆虺(毒蟲)不螫, 猛獸不據, 攫鳥不搏,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全作(脧怒), 精之至也, 終日號而不嗄, 和之至也, 知和曰常, 知常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物壯則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인의로 다스리려는 지식이 아니라 덕을 품고 있는 상태를 마치 어린 아기에 비유할 수 있다. 어린 아기는 지식이나 벼슬에 대한 욕망이 없지만, 생명활동을 튼튼하고 조화롭게 유지하고 있다. 아기는 지식이 없지만, 자연의 덕을 따르므로 삶이 안전하고 편안하다. 도와 덕은 갓난아기와 같이 부드럽고 유약하면서도 조화로움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인위적 규범에 대한 지식보다는 자연을 이해하는 지성은 중요하다. 조화를 아는 것을 오래 간다고 하고, 늘 오래 가는 것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한다. 오래 가는 것이 상서롭지만, 도가 아니면 일찍 그친다.

ⓒGetty Image

조화로움은 자연스러움의 극치이다. 조화로움을 아는 것은 우주의 영원한 질서를 아는 것이다. 자연의 조화로움을 아는 사람은 인간과 제반 사회의 관계 속에서도 조화와 평화를 이루려고 노력한다. 일체의 사사로움에서 벗어나 지극히 조화로운 세계를 이루어가는 사람을 聖人이라고 부른다.

지도를 펼치면 많은 산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강들의 이름도 있다.
그러나 산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강은 그렇게 불리는지 모르면서 흐른다.

우리 또한 산과 같지 않은가?
강과 같지 않은가?
인간들끼리 모여 살 때 편리상 쓸 뿐
내 이름이 곧 나려니 생각 마라.
때때로 강처럼 이름을 잊고
산처럼 멍하게 그런 게 무엇엇이냐고 물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우주의 일부로 머물라.
그래서 본래의 이름 없는 큰 존재로 살다 가라.
- 곽노순, “때때로 강처럼 이름을 잊고”

덕이 가득히 품은 사람의 상태는 이사야가 노래한 평화로운 하느님 나라의 모습과 같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이사야 11:8) 지극히 자연과 하나 된 삶의 모습은 현대인들의 각박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변의 사람들과 모든 생명들과 더불어 조화로움이 지극한 삶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 즉 진정한 삶의 모습이다. 자기 혼자만의 조화로움이 아니라 갈라진 관계들을 회복하여 이러한 조화를 이루려 한 사람들 중에 예수의 삶과 죽음도 그렇다.

예수는 삶과 죽음을 통하여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시고,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물어 원수된 것을 없앴다. 예수는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루게 하여 하느님과 화해시켜 조화로움을 회복하였다. 모두가 연결되어 한 건물을 이루는 데에 예수를 모퉁이돌이 되었다고 한다.

모퉁이돌(ἀκρογωνιαΐος)은 건물의 중앙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돌인데, 건물의 각 부분을 연결하면서 조화롭게 유지하도록 한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그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자기 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과도 조화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데 …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랍게 보인다.”(10-11절) 시편 118편 22-23절을 인용한 이 말은 유대 지배자들에게는 무서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 대한 가차 없는 파산선고나 다름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위의 전통적인 해석대로라면 “집 짓는 사람”은 유대 지도자들이고, “버린 돌”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예수님이고, “머릿돌”은 부활하여 승리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비유 자체를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반영하여 유대 지배자들의 만행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삶으로 본다면, 부재지주(유대 지도자들)는 집 짓는 사람이고, 죽임을 당한 소작인들이 버림받은 돌이고, 새로운 세상에서는 그렇게 버림받은 사람들이 주춧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버림받고 죽임당한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데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모퉁이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논쟁하고 있는 유대 지배자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에게 저항하고 있는 소작인들을 죽이는 일은 더 큰 폭력을 불러올 것이다. 소작인들의 저항을 보고 너희들의 폭력을 먼저 끊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죽인 소작인들은 너희들에게 버려진 돌이지만 오히려 너희들 보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다. 큰 틀에서 하느님의 하시는 일을 보아라. 놀랍지 않느냐?’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우리들은 화해를 위한 모퉁이돌 예수님의 향기, 평화를 위한 모퉁이돌 예수님의 이름의 정당한 발현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우리 신앙의 모퉁이돌, 우리 공동체의 모퉁이돌 예수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는 우리는 새로운 세상의 모퉁이돌,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공동체의 모퉁이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희생은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집을 만들어가는 공동체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버려진 돌과 모퉁이돌”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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