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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질을 자랑하랴” - 是謂盜夸

기사승인 2019.01.07  16: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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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53

“만일 나에게 잠시 동안 지식이 있어서 대도를 행한다면, 오직 옳은 것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겠다. 대도는 심히 평평하지만 백성은 지름길을 심히 좋아한다. 조정은 벼슬아치가 심히 많고, 밭은 심히 거칠고, 창고는 심히 비어 있고, 무늬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차고, 물리도록 먹고 마시고, 재화는 남는다. 이것을 일컬어 도적질을 자랑한다고 하니, 도가 아니로다!”
- 노자, 『도덕경』, 53장
使我介然(挈)有知(也), 行於大道, 唯施是畏, 大道甚夷, 而民(甚)好徑(解), 朝甚除, 田甚蕪, 倉甚虛, 服文綵, 帶利劍, 厭飮食, 財貨有餘, 是謂盜夸, 非道也哉.

노자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지식의 폐해를 고발하고 있다. 벼슬아치가 된 사람들은 다스린다고 하면서 옳은 것을 버리고 있다. 벼슬아치가 많아지면 밭이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곳간은 텅 비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호의호식하면서 재물을 늘리면서 지식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백성들로부터 훔친 것이니 결코 자랑해서는 안 되고, 더더욱 올바른 길이 아니다. 이러한 정치가 만연한 세상에서 대도는 희미해지는데, 백성들은 어떻게 하든 벼슬을 얻어서 지름길로 질러가려고 한다.

ⓒGetty Image

공공연하게 도적질한 것을 자랑하는 정치의 현실 인식은 장자에게도 나타난다. “성인이 나와서 예의나 음악에 따라 몸을 굽혀서 천하의 형태를 바로 잡으려고 하였고, 인의를 내걸어 천하의 마음을 달래려고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애써 지식을 좋아하는 데 몰두하여 다투어 이익을 좇게 되었다. 막을 수가 없으니, 이것 역시 성인의 잘못이다.”<장자, “마제”편>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凍死者)가 얼어 죽을 때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백성들의 삶이야 어떠하든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면서 호의호식하려는 벼슬아치들을 노자는 비판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백성들을 단지 자기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라고 취급했던 예수님 당시의 성전지배자들과 같다. 또한 오늘날 인민들이야 어떻게 살든지 거짓과 억지로 자리를 보존하려는 정치인들이나 노동자들은 죽임을 당하더라도 이윤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자본가들도 역시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칭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성전을 둘러싼 지배세력을 숙청하려 하였다. 그러한 강한 의지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뿌리째 말라죽게 한 이야기에 잘 드러난다.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을 상징한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유대민중을 착취하는 구조의 정점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과 그로 인해 부와 권력을 유지하던 사람들은 저주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사회를 거룩과 세속으로 구별시키고 그에 따라서 사회적 신분을 수직적으로 결정하는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성전은 소수의 특권층과 거룩한 영역에 부합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사회적 특권과 경제적 부를 유지하고 강화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성전은 신분이나 성별, 종족, 정결·부정 여부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계층적 수직 구조의 실제적인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종말적 위기를 당하게 되었듯이, 삶의 열매를 제공하지 못하는 성전의 기능을 무효화 했다. 이 사건은 성전이 대표한 당시 사회의 수직적 위계질서와 성속의 높다란 벽을 허물어 버렸음을 의미한다.

“성전에서의 상행위 금지는 성전을 매개로 하는 유대의 지배체제, 나아가서는 그 지배체제를 매개로 하는 로마의 지배체제에 대한 공격행위입니다. 제물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을 몰아낸 것은, 지배체제의 민중에 대한 구체적인 착취와 수탈의 구조를 부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당면하게 될 수난의 전초적 사건이 되고 있으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걸어 온 길의 절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됩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은 경제적 활동 자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을 착취하고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성전지배체제의 구조 속에 있는 사람들의 행위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강도들의 행위이고, 야훼 하느님의 평등공동체와 그 속에서 맺어진 관계를 산산이 부수어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거룩한 척 하는 사람들을 강도입니다.
이것은 성전을 통하여 하느님과 사람을 중재하려는 사람들, 그 직분과 직무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사람들, 실제로 지배력을 행사하고 백성들을 억압하는 사람들, 거룩이라는 명목으로 하느님을 독점하고 사람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사람들,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으로 자기의 탐욕을 채우며 재산을 불리는 사람들,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뿐만 아니라 후손들까지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꾸미는 사람들, 국민으로부터 나온 권력으로 억압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사건입니다.
성전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대인들만의 편협한 민족주의적 제의장소가 아니라 “모든 민족”(이방인들)을 향해 개방되었고, 성전제의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기도로 대치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집이냐 강도들의 소굴이냐”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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