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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한 것을 지키는 것이 강함이라고 하는데” - 守柔曰强

기사승인 2018.12.31  18: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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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51

“천하에 시작이 있으니 이로써 천하의 어머니가 된다. 이미 그 어머니를 얻었으니 이로써 이미 그 아들을 안다. 돌이켜 그 어머니를 지키니 죽기까지 몸이 위태롭지 않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여니 죽기까지 몸이 근심하지 않는다. 그 구멍을 열고 그 일을 성취하니 그 죽기까지 그 몸이 구원받지 못한다. 작음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 말하고, 연약함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고 하는데, 그 빛을 써서 그 밝음으로 돌아가니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는다. 이로써 항상 습(익숙함)이 된다.”
- 노자, 『도덕경』, 51장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爲習(襲)常.

노자는 장생술의 용어를 빌려 다스림의 도를 설명한다. 아들을 알고 어머니를 지킨다는 것은 자연의 도를 만물의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욕망이 들어오는 구멍을 막고, 마음의 문을 닫는다는 것은 精을 기르는 태도이다. 따라서 구멍을 막고 문을 닫는다는 것은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자연의 덕을 지키는 정치를 뜻한다. 반대로 욕망의 구멍을 열고, 일을 이루려 하면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한다.

ⓒGetty Image

자연의 도는 ‘작은 것을 보는 빛’이고, ‘연약한 것을 지키는 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작고 연약한 것은 정치적 상황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오히려 조롱과 억압과 죽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자는 나라를 다스리거나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 욕망임을 비판하면서 45장에서는 욕망이 가라앉은 고요함(淸靜)을, 48장에서는 줄이고 줄임을(損之又損) 말하면서 욕망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고 강조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정호승, “봄길”

노자는 처세술과 용병술뿐만 아니라 인의예지까지도 정치에서 빛나고 강해지려는 욕망으로 배우는 세상의 흐름에 반대하여 ‘연약한 사람을 지키는 것이 강함이고, 작은 사람을 보는(드러내는) 것이 밝음’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자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빛나고 강한 것만을 추구하고, 그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는 것을 성공이라고 한다. 그러나 노자는 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일 때 위태롭지 않고 오래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작은 것을 지키고 연약한 것을 지키는 일이야 말로 자기를 빛나고 강하게 하여 영원을 살게 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노자의 말로 표현하면, 연약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일이고 작은 사람을 드러내기 위한 일이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것은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 생명을 섬기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희생하기 위해서, 내가 대신 죽어 줄 테니 더 이상 죽이지 말고 학살을 멈추라고 항의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다. 그리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는 일을 비롯해서 나흘간의 치열한 활동을 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장면에는 두 가지가 중요한 상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어린 나귀(Pony; 조랑말)를 탔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나뭇가지와 겉옷을 길에 깔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예수님을 왕으로, 통치자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시편 118:25-27). 그러나 그 왕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을 이루는 왕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다윗 같이 더 많은 정치적 자유와 더 많은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메시아가 되라고 요구한 것이고, 이에 반해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온전한 생명,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정의, 풍요, 영원 등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가져다주는 메시아가 되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의 수난예고를 통해서 그 길을 제시하였고,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호산나!” 하고 외치는 무리의 함성 속에 있는 구원의 간절함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구원의 내용은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길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통치를 바라는 사람들은 어떠한 정치적 권력에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권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권력을 잡든지 여전히 소외되고, 인권이 침해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길은 권력자를 또다른 지배자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싸움으로 얼룩진 세상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그들의 싸움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는 어떤 구원을 희망하고 있는지,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메시아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는 다고 하면서 꿈꾸는 것은 무엇인지, 혹시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들어주는 환상적인 도깨비 방망이로 오해하지는 않았는지, 예수님을 팔아 부와 권력을 바라거나 그런 사람들을 지지하고 부러워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호산나! 구하소서!”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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