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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를 사용하는 인간, 탈주하는 인간

기사승인 2018.10.27  18: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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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철학과 기독교신앙의 관계 밝히는 학술대회 개최

10월 말 한국을 방한해 강연을 펼치는 미국 드류 대학교의 로버트 코링턴 교수와 모라비안 대학의 레온 니모진스키 교수가 10월31일에 이어 11월1일(목) 오후 5시에는 감리교신학대학 웨슬리 제1세미나 실에서 “현대철학과 기독교 신앙: 탈자적 자연주의의 관점에서”란 제목으로 국제학술대회를 갖는다.

▲ 로버트 코링턴 미국 드류대학교 교수(사진 왼쪽)와 레온 니모진스키 미국 모라비안 대학 교수(사진 오른쪽)

‘탈자적(脫自的) 자연주의’(ecstatic naturalism)란 미국 뉴잉글랜드 초월주의로부터 연원하는 종교적 자연주의의 한 형태이다. 이 학문적 흐름은 인간의 자아를 기호 사용자로 보고,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바깥으로 탈주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아간다고 본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탈자(脫自, ecstasy)의 운동은 자연에 편만한 자연의 운동임을 주장하며 탈주를 통해 자신의 영토를 벗어나는데에서 유목적 정체성을 주장한 들뢰즈의 철학과 일정한 접점을 갖는다.

자기를 벗어나게 해주는 공동체?

하지만 코링턴 교수의 탈자적 자연주의는 자기를 초월하는 계기를 해석자들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interpreters)로부터 찾는다. 자연은 철학적 자연주의의 맥락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기표이기 때문에 자연이란 기표를 통해 자연이라는 실재 자체를 모두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덕경』 1장의 표현을 빌려 서술한다면, ‘자연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자연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이란 자연이라는 기표의 개념적 규정을 벗어나는 측면들을 언제나 해석적으로 보완해 가면서, 의미를 확립해 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자연이란 의미의 총체성에 이를 수 있는 완전의 시간은 영원히 유보되어 있다고 본다. 바로 여기서 탈자적 자연주의와 신학과의 접점이 있다.

이 접경에서 탈자적 자연주의의 논리적 핵심을 과정적 범재신론과 구별해 내는 과제가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과정 범재신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혹은 ‘신’ 안에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탈자적 자연주의에서 말하는 자연과 의미상 중첩되기 때문이다. 코링턴 교수는 그래서 자연의 의미는 사중의 무의 계기들을 통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즉 실재는 삐딱하게 보여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자연의 기호학은 곧 자연의 마음을 읽는 과정임을 니모진스키 교수는 지적한다. 탈자의 계기들이란 곧 “초월적 창조성”의 계기들을 가리키며, 이는 실재를 모든 사물의 “되기”(becoming)에서 보았던 들뢰즈의 철학적 계기와 동일한 지점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한 내재성의 철학자인 들뢰즈는 자연 안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을 포괄하려는 탈자적 자연주의와 동일한 맥을 따라 나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들뢰즈와 코링턴 모두 내재성 안으로 함몰되어, 특정 개념과 이미지에 폐제(closure)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개념적 탈주를 통해 그리고 탈자의 계기를 통해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는 운동을 지향한다. 초월과 내재의 이분법 자체가 오히려 탈주와 탈자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자연 속에 깃들어 계시는 하나님

▲ 감리교신학대학교 장왕식 교수

이 학술대회에서 두 교수의 발표에 대한 논평은 감리교신학대학 장왕식 교수가 진행한다. 장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과정신학자로서 코링턴 교수가 탈자적 자연주의 맥락에서 비판하는 과정 범재신론을 신학적 관점에서 변증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탈주와 탈자의 계기들이란, 코링턴 교수의 표현대로, 자연을 개념적으로 취소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자연을 개념적으로 취소하는 방식은 하이데거의 존재의 표기법이기도 했다. 또한 하이데거가 사용한 용어, 존재(Sein)에 관해 하이데거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Only a God can save us)라고도 했다. 물론 하이데거는 철학자로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신으로 가리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로 언표하는 기표들은 언제나 존재를 드러냄과 동시에 은폐한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언어의 한계를 동시에 지적했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은 하나님의 존재양식이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일까? 자연철학자로서 코링턴은 ‘신’이라는 기표가 서구 역사 속에서 행사한 도착적 권력 때문에 비판의 일환으로서 ‘신’이라는 기표를 거절하지만, ‘신’이라는 기표 역시 부정신학에서처럼 God으로 표기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두 번째 논평자인 꽃재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 김성복 목사는 탈자적 자연주의와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발표에 대해 오히려 진정한 탈자적 자연주의는 신학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전개할 것으로 알려졌다. 탈자라는 말은 본래 고대 그리스어에서 “자기 바깥에 존재하기 혹은 서기”(to be or stand outside oneself)를 의미한다. 이는 곧 기존 자아의 경계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스스로 자기 바깥으로 나간다는 말은 일종의 논리적 모순이다. 내재적 초월(immanent transcendence)라는 말이 형용모순인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인 존재의 범위 안에 있다면, 모든 것은 이 존재의 경계 안에 내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면, 탈자(脫自)는 가능치 않은 것이다.

▲ 꽃재감리교회 김성복 목사

하지만 이 ecstasy는 ‘신비스런 느낌 가운데 느끼는 일체감 혹은 하나됨’의 감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 하나됨은 결코 내부로부터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바깥을 인식할 때 도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우리는 초월이라고 이름해 왔던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하느님으로 기표하건 God으로 기표하건 혹은 Gott라고 기표하건, 인간을 넘어서 있는 존재의 초월적 힘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을 넘어서 있으니, 인간의 인식능력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지평이다. 인간을 넘어서 있기에 인간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초월의 지평이 인간의 삶 속에서 끊임없는 감사의 은혜를 베풀어주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힘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탈자적 자연주의는 자연이라는 기표의 숭고함을 지탱하기 위해 하나님의 초월적 지평, 즉 선물(gift)을 필요로 한다. 삶은 곧 우리를 초월한 존재이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미국 철학은 뉴잉글랜드 초월주의의 전통으로부터 자연주의의 형태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래서 미국 철학은 종교철학적이다. 세계 선진국들 중에서 가장 종교성이 강한 나라가 미국 아닌가. 미국적 종교철학과 한국 신학과의 만남은 포스트휴먼의 기호적 위기 속에서 대안적 해석을 모색하며, 새로운 종교철학과 신학의 도출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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