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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과 죽음” - 出生入死

기사승인 2018.12.17  20: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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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50

“나옴은 태어남이고 들어감은 죽음이다. 살아 있는 무리는 열에 셋이고, 죽은 무리는 열에 셋이다. 살려고 애쓰다가 죽음으로 옮겨가는 사람이 열에 셋인데, 대저 어찌 그런가? 그것은 살려고 애쓰는 것이 심하기 때문이다. 대개 듣기에, 섭생을 잘 하는 사람(생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땅으로 다녀도 무소와 호랑이를 마주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도 갑옷과 무기를 의지하지 않는다. 무소는 그 뿔을 들이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는 그 발톱을 찌를 곳이 없고, 무기는 그 칼날을 댈 곳이 없다. 대저 어찌 그런가? 그것은 죽음의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 노자, 『도덕경』, 50장
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而民生生), 動之死地, 亦十有三>, 夫何故, 以其生生之厚(其生生也). 蓋聞 善攝生者, 陸行不遇兕虎, 入軍不被甲兵, 兕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瓜, 兵無所容其刃, 夫何故, 以其無死地

만물이 유에서 나오는 것을 태어난다고 하고, 무에 들어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도덕경 <40장>에는 도가 만물에 작용하는 전체적인 과정은 열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생하게 하고(生), 덕이 기르며(畜), 자라게 하고(長), 성숙하게 하고(育), 성장을 멈추어 안정을 시키고(享), 거꾸로 기운을 해치며(毒), 수명을 지키도록 보살펴주고(養), 다시 천지로 돌아가게 한다(復).

이 여덟 단계에 유에서 나오는 것(出)과 죽어서 무로 돌아가는 것(入)을 합하면 모두 열이 된다. 도는 이렇게 만물의 삶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활동하고 있다.

ⓒGetty Image

섭생을 잘 하는 자는 죽음을 도의 활동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잘 살려고 이익을 구하거나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잘 살려고 하지 않을 때 남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익을 구하면 사람이나 짐승이 서로 경계를 한다. 삶을 추구하지 않을 때 짐승이나 사람의 해침을 당하지 않고 도의 활동에 따라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려는 의도가 있으면 만물이 서로 덕을 나눌 수 없다.

땅에서 땅의 자양분을 먹고 태어난 인생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일 뿐이지만, 천지가 배려해준 수명으로서의 생명을 제대로 살다가 죽는 일은 사람마다 차별이 있다. 자기 생명을 잘 보호하고 육성하는 사람들은 능히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하는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이들은 청정하고 소박한 삶에 길들어 있어서 능히 자연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살려고 하는 욕망이 오히려 사는 길이 아닌 죽음의 길에 이르게 한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1941”,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

“옛 眞人은 삶을 좋아할 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 몰랐다. 유연히 왔다가 유연히 갈 뿐이었다.”<장자> “죽은 사람은 돌아가는 사람이다. 군자는 죽음을 쉰다고 말하고, 소인은 죽음에 굴복한다고 말한다.”<열자> “생사의 도를 넘어서면, 일체 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원효>

삶과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대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태도가 각양각색이다. 특히 자기의 임종을 스스로 알고 준비하고 편안하게 돌아가는 분들의 삶은 참 고결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일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삶의 과정에서 욕망을 떨쳐내기 쉽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의 미사(Cristes Maesse)’에서 유래했고, 이는 “그리스도의 미사(희생제사)”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생일을 제삿날의 의미인 희생제사로 부르는 것은 아이러니 하면서도, 그 속에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난 날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날을 제삿날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사용한 다는 것은 역설(Paradox)이면서도, 큰 의미가 담겨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과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사람과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임당한 예수님은 삶에서의 행동과 가르침도 그러하였다.

“예수님은 직접 자기가 이 땅에 온 목적이 섬김을 받으러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 섬김의 구체적인 내용은 희생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다른 사람들,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 섬기는 종의 모습과 태도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크리스마스, 즉 스스로를 낮추어 봉사자이며 종이 된 예수님의 섬김의 절정인 고난과 죽음은 그 자체가 그의 삶의 목적이 아니라 섬기는 행동의 결과였습니다.
사람을 섬기지 않으면 하느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함께 사는 사람을 섬기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람을 섬길 수 있는 내면적 근거를 확립하고, 인륜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섬기는 진정성이 확인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하느님을 대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그의 고난과 죽음을 초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갔던 길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의 잔을 마시고 그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불의한 일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을 위한 집사(섬기는 사람)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나는 무엇 하러 왔나?”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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