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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을 닦으면” - 修之於身

기사승인 2019.01.14  18: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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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54

“잘 짓는 사람은 뽑히지 않고, 잘 품는 사람은 벗어나지 않으니, 자손이 제사를 그치지 않는다. 몸에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이 비로소 참되고, 집에서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이 비로소 남고, 마을에서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이 비로소 오래가고, 나라에서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이 비로소 풍성하고, 천하에서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이 비로소 두루 미친다. 이럼으로써 몸을 몸으로 보고, 집을 집으로 보고, 마을을 마을로 보고, 나라를 나라로 보고, 천하를 천하로 본다. 나는 어떻게 천하가 그런지를 아는가? 이렇게 함으로써 그렇다.”
- 노자, 『도덕경』, 54장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修之於身, 其德乃眞, 修之於家, 其德乃餘, 修之於鄕, 其德乃長, 修之於國, 其德乃豊, 修之於天下, 其德乃普, 故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

다스리는 것(政)과 닦는 것(修)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잘 짓고 잘 품는 사람은 뽑히거나 벗어나지 않고, 오래갈 수 있다. 자기의 몸으로 그 이치를 닦으면 그 덕이 참되고, 천하에서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이 두루 퍼져서 온 천하에 미친다. 노자에게 있어서 닦는다(修)는 것은 다스리는 것(政)과 사대되는 개념이다.

닦는다는 것은 지식이 있는 자에게 이익과 벼슬을 베풀어 다스리지 않게 하고, 마음과 나라와 천하에 자연의 이치가 그대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개인과 가족과 마을과 나라와 천하에서 자연의 덕이 일어나면 비로소 자손들의 제사가 끊이지 않듯이 오래 갈 것이다.

ⓒGetty Image

다스리기보다는 닦을 때에 사람이나 사물을 바로 보게 된다. 물로써 물을 보는 이물관물(以物觀物)의 태도는 정치를 위한 지식을 버리고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이해하는 자세이다. 몸을 몸으로 보고, 집을 집으로, 마을을 마을로, 나라를 나라로, 천하를 천하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인의와 예를 배워서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와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이다.

어제 나는 신림동 어디에 사는
고향 친구 아들의 돌잔치에 갔다
친구 마누라는 국민학교 오학년 때
나와 한반이었던 그 여자아이였다
눈 밑에 점이 있어 동네 아낙들이
이름 대신 점백이라 불렀던 그녀는
역시 나와 한반이었던 내 친구와 함께
단칸셋방에서 살고 있었다

잔치가 끝나고 나는 제약회사에 나간다는
친구의 친구가 권하는 승용차를 물리치고
셋방살이 친구와 옷가게를 찾았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친구의 큰아들은 일곱 살이라 했다
가게를 나와서 친구와 헤어지고 나는
전철역으로 무거운 발길을 옮기면서
옛 동요 하나를 떠올렸다
학교가 파하면 동무들과 어깨동무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르고는 했던 노래 -

눈을 감아도 찾아갈 수 있는 우리집
목소리만 듣고도 난 줄 알고 얼른 나와
문을 열어주는 우리집
조그만 들창으로 온 하늘이 다 내다뵈는 우리집
- 김남주, “집의 노래”

전 대법원장 양승태가 피의자로 검찰에 조사받으러 가기 전에 자기가 근무하던 대법원 앞에서 자기의 일에 대하여 송구스럽다고 하였고, 여러 사람들이 조사받은 것에 대하여 참담하다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이 자기 부덕의 소치라 하였다. 그는 아직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송구스럽다는 것은 사죄의 표현이 아니고, 참담하다는 것은 억울하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을 하는 것 자체가 아직도 인민들을 다스리려 하고, 현재의 법관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양승태는 덕이 없다고 했는데, 부덕이 아니라 덕을 닦지 못한 것이다. 어렵게 자라서 권력의 자리에 앉아 다스리려고만 했지, 덕을 닦지 못했기 때문에 그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다스리기 보다는 닦으려 한 사람들 중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도 있다. 헤롯 안티파스에게 잡혀서 죽임 당한 세례자 요한은 성전 지배자들에게는 가시 같은 존재였지만,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사람, 참 예언자로 알고 믿었다. 그의 몸은 죽었으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면서 살아 있을 때보다도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예수는 스스로를 세례자 요한의 역할과 운명에 동일시하였다. 또한 그 역할을 하는 권위의 근거도 동일시하였다. 모든 백성은 참 예언자로 추앙을 받는 세례자 요한과 그와 운명과 역할을 동일시하는 예수를 기억하고 있다. 모든 백성의 뜻 속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

“예수님의 행동이 무엇에 근거하느냐는 물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들의 권위가 침범 당해서 손상된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너는 무슨 능력(권위)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하고 물은 것은 ‘너는 모세나 아론의 후예인 제사장도 아니고, 공인된 율법학자도 아니며, 또 백성들 가운데서 추대된 원로도 아닌데 어디서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소환장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냐?”
예수님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人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목숨을 내걸고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사람과 세력에겐 단호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에 죄목으로는 “유대인의 왕(INRI)”이라고 했지만,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 당하는 사람들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의 가르침과 그가 일으킨 사건 속에서 드러납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누구로부터 온 권위인가?”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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