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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우주론, ‘성경 즉 우주’

기사승인 2021.02.02  16:3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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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과학 혁명 시대에 성서를 읽는 한 방법에 관하여

1. 세계 경전은 초과학과 초종교 시대에 유효한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할 수 있는가?
2. 세계 경전은 ‘교학과 신학과 도학과 유학’에서 제시한 담론을 뛰어넘는 새 문명의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가? 
3. 세계 경전이 제시하는 궁극적 인간이 과학적 유토피아가 제시하는 인간형과 공생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인식공간의 확대와 체감시간의 가속에 따른 의식의 대폭발

1970년대 중반부터 새 시대 과학(New Age Science)은 뉴턴적 세계관을 대체할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으로 재편되고 있다. 우주에 대한 비밀은 과학적 가설과 검증, 탐사를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우주 과학은 인류가 속한 우주 공간이 139억 년 전에 빅뱅으로 시작하였다는 우주빅뱅설과 우주팽창설을 지지하며 공간과 시간이 확대되는 우주모델을 지지하고 있다. 평행우주론을 포함한 다중우주론과 같은 우주 천문학에 대한 입문서는 ‘브라이언 그린’의 『멀티 유니버스』 (박병철 옮김, 김영사, 2012)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를 참고하기 바란다

한편 미시세계에서는 양성자, 중성자, 하이퍼론, 쿼크 등 궁극적 입자의 검증과 중력, 약력, 강력, 전자기력 등의 원초적 힘에 대한 상호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통일장이론’ 등 다양한 가설 아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하이젠베르크의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모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기본으로 하는 코펜하겐 해석은 미시세계가 확률세계임을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괴델은 경험과학의 논리적 체계는 완전하지 않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불완전성의 원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s)를 통하여 과학이성의 한계를 수학적 공식으로 입증하였다. 경험과학은 실험을 통해 과학적 사실을 밝혀내지만, 거시과학과 미시과학은 가설-실험-입증의 단계를 거친다. 즉 과학세계는 이미 경험과학을 뛰어넘어 초논리적 근거에 따라 (초)과학세계를 펼치고 있다.

반면에 제도 종교인은 아직도 첨단 과학정보가 제공하는 ‘신의 은총(?)’을 소화하지 못한 채 초과학세계가 한껏 펼치는 세계에 동참하지 못한 ‘철’부지가 될 위기에 처해 있다. 기껏해야 종교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은 다르다는 ‘창조와 진화’의 이분법적인 사고연장에서 ‘초종교와 초과학’의 세계를 바라보는 방관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우주의 시간 역사의 축적과 공간 거리의 폭발적 확장은 인간의 사유마저 폭발하며 의식의 확대를 동반하여, 의식의 폭발과 비약을 가져와 새로운 사유체계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의식혁명은 인간혁명을 수반한다.’ 지금 지구촌에 우후죽순처럼 문명사적 거대담론이 돌발하는 것도 알고 보면 공간의 확장과 시간 팽창의 결과로 인한 ‘텅 빈 사유 공간’에 채워지는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주천문학과 이론물리학이 밝히는 인식공간의 확장, 시간의 가속화, 생명공학이 밝히는 유전자의 비밀, 나노공학이 규명하는 물질의 성질 등 우주를 구성하는 제반 여건은 ‘이기적 유전자’에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 인간의 탄생이 상상이 아닌 실재의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이다. 이로 볼 때 공간혁명, 시간혁명, 인간혁명이 동시다발적인 문명 전환기는 1차 혁명, 2차 혁명, 3차 혁명, 4차 혁명…, N차 혁명시리즈의 연속적인 혁명의 순간이 아니다. 또한, 분절적 인간에 의해 미래세계가 전개된다면 여전히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선과 악이라는 극복되어야 할 배타적이고 분별적이고 이원론적인 분절적 세계가 우주공간에서 확장되고 확산하는데 그칠 것이다. 유토피아는 영원한 이상이고 디스토피아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한밝우주역사관 : 영원한 우주 역사와 유한한 지구 역사

변찬린은 이런 문명사적 전환기에 초종교와 초과학의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상가이다. 그는 자신이 “낡은 세대와 새 세대를 잇는 가교(架橋)입니다. 역사 시대와 영의 시대를 잇는 대교(大橋)입니다. 마지막 때의 예언자이며 새 시대의 전도자입니다. 빛나는 후생들이여. 나를 다리삼아 이 허무의 심연. 무의미의 골짜기를 건너가십시오.”라고 선지자의 목소리를 낸다. 그는 분절적 세계관과 통합적 세계관을 뛰어넘는 “합즉진(合卽眞), 분즉위(分卽僞)”라는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는 ’포월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동시에 종파종교를 뛰어넘는 초종교의 자리와 과학적 유토피아가 제공하는 세계관을 뛰어넘는 초과학의 자리에서 궁극적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찬가를 부른다. 한 마디로 축 시대의 끝자락에서 새 축 시대의 새 노래를 부른다.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종말적인 징후는 가인의 안목으로 볼 때는 비극적인 현상이나 지인(至人)의 형안으로 열린 미래를 뚫어볼 때 이는 진화하는 노상에서 몸부림치는 이성수(理性獸)들의 추태이다.

새 밝이여
그대는 분명히 깨달으리라.
인간은 이미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지금 비로소 창조되고 있는 존재이며 올 자와 해후하기 위하여 <가고 있는 자>임을 잊지 말아라.
허무의 권을 탈출하여 <하나님 권으로 진입> 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각(覺)과 영(灵)은 분사되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은 사고의 껍질을 깨고 각의 새 땅과 영의 새 하늘을 개간해야 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향수에 젖어 복고조의 인간성 회복을 떠벌리는 철인은 열린 미래를 뚫어보지 못한 정신적 미개인이며 영적 야수들이며 심적 기아(棄兒)들이다.
닫힌 미래의 벽 앞에 서면 뒤를 돌아볼 방법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느냐?

새 밝이여
묻노니, 틀에 짜인 기준과 낡은 판단과 주입된 선입관념과 수직적인 사고방식
으로 네가 부르짖는 인간성 회복이란 그 무엇인가 ?
수학과 기계를 폐기하고 청산을 찾아 유유자적하는 것이 잃어버린 인간성을
찾는 길인가?
도시와 다방을 저주하고 수도원의 성역에 도피하여 검은 승복을 입고 죽은
신을 명상하는 것이 비인간화에서 해방되는 길인가?
장발을 하고 나신(裸身)으로 혼음하며 원시적인 환상에 젖어 환각제를 먹는
행위가 보다 인간적인 행동인가?
신화를 부활시켜 영웅 숭배의 찬가를 부르는 것이 사람다운 특성인가?

새 밝이여
그대는 대인(大人)이 될 가능태임을 명심하여 저 조무래기 철학자들과 갈보같은 신학자들과 절교하라.
그대는 열린 미래 앞에 서라.
뒤를 돌아보고 소금 기둥이 되지 말고 탈출한 애급을 그리워 하지말고 역사의 속도를 타고 앞을 향해 약진하라.
우리들의 영이 광속이 될 때 영의 시대가 도래하리라
과학은 백마(白馬)이다. 흰 말을 잡아타고 승리한 자가 되어 회귀하라.
기계(機械)를 영화(灵化)하라.
지인(至人)의 능력과 지혜로 수(數)와 대화하라.
- 변찬린,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가나안 출판사, 127-129.

필자는 변찬린의 ‘한밝 사상의 얼개‘를 『한밝 변찬린: 한국종교사상가』(2017)에서 ‘한밝우주역사관’이라고 명명하고  『포스트 종교운동』(2018)에서 ‘한밝문명과 한밝사상’으로 조명한 바 있다.(아래 사진 참고)[1]

▲ 필자의 『포스트 종교운동』 겉표지와 『포스트 종교운동』의 15쪽

‘한밝우주역사관’은 역사시대의 시간 단위가 아닌 과거의 영원에서 미래의 영원으로 이루어지는 창조단위의 역사관이다. 현대 과학은 우주 역사가 빅뱅으로 시작한다고 주장하지만, 빅뱅우주론은 현대과학의 관찰패러다임과 관측장비의 한계에 따른 우주관에 불과하다. 변찬린은 우주천문학이 밝힌 139억 년 전에는 영원의 하나님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되묻는다. 그가 말하는 “선사시대, 역사시대, 영의 시대”란 시대구분조차 지구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그의 시대구분은 민족흥망사와 왕조교체사라는 역사가 아닌 창조적 단위의 시간단위이다.

한밝우주역사론은 시공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주기로 하는 창조단위의 역사이다. 공간의 역사도 지구와 태양우주만을 전제로 한 역사인식이 아니다. 무한한 창조 세대의 우주역사 속에 유한한 지구역사라는 그의 시공인식 체계는 과학이 발견한 우주 역사의 시간단위를 뛰어넘는다.

우리는 이날까지 천동설의 사고방식을 탈피하지 못함으로서 지구만이 인간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 속에서 지구는 중심이 아니고 오직 한 점에 불과한데 우주적인 하나님이 지구에만 〈로고스의 씨〉를 심었겠는가? 하나님은 지구속의 하나님이 아니고 우주적 하나님이다. 따라서 지구 밖의 천체 속에서도 하나님의 농사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도 우리와 같은 〈인간의 씨〉는 이미 존재해 왔고 헤아릴 수 없는 수렴사업이 반복되었다. 그것이 지구 안인지 아니면 먼 천체의 어떤 마당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으나 하나님의 〈사람 농사〉는 계속되었고 또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중략) 우리는 지구 중심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떠나서 우주적인 안목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

*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 1:4

*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 1:9-11

이 성구에 나오는 세대는 고려 시대 다음 조선 시대가 도래하는 그러한 세대가 아닌 창조적 우주세대를 말하고 있다. 창조를 단위로 한 세대이다. 한 세대를 수렴한 다음 또 다음 세대를 파종하여 추수하는 창조의 단위로 구분되는 세대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대의 일을 저 세대가 기억함이 없는 것이다. 역사 안에서의 세대라면 왜 기억할 수 없겠는가? 우리는 사료를 통해서 고려시대와 조선세대를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중략) 우리는 지구별이라는 태양계의 제3 혹성에만 생명이 있다는 우물 안 개구리격인 좁은 생각을 털어버리고 우주의 광막한 대해를 향해 깨달음의 가슴을 열자.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418-420.

우리는 하나의 창조단위의 우주에 속해 있으며, 이 광대한 우주 속에서 지구의 인간으로서 살고 있다. 무한한 창조 세대의 우주 역사 속에 유한한 지구역사라는 관점에서 변찬린은 ‘성경’을 읽고 있다. 이렇게 읽을 때 비로소 세계 경전은 ‘초종교와 초과학의 시대’에도 현존하는 인간과 관계성을 가지고 재현성을 가진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문자성경은 하나님의 몸이고 비문자성경은 하나님의 마음 

‘성경우주론’은 ‘성경인간론’이 확대된 주장이다.[2] ‘성경인간론’이 문자경전으로서 인간의 실존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성경우주론’은 비문자경전으로 우주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인 경전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나와 인간, 나와 지구, 나와 우주, 나와 궁극적 실재를 원심적으로 사고하고, 궁극적 실재와 나, 우주와 나, 지구와 나, 인간과 나를 구심적으로 사유하여 지구차원이 아닌 우주속의 ‘만물의 영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세계 경전은 우주적인 나로 거듭난 ‘만물의 영장’을 지향하고 있다. 특히, 성서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만물의 영장이 되기 위해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 ‘만유’를 공부해야 함은 당위명령이기도 하다. 소우주인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닮는 성경뿐만이 아니라 우주마저도 품는 우주적 관점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어야 한다. 이런 지점에서 배타적인 분절적 세계관은 작동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형하신 존재로 이 세상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볼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성품과 심성을 창조하신 만물 속에 다 숨겨 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은 직접 알 수가 없지만, 창조하신 만물을 이렇게 볼 것 같으면, 그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심성이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자연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연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그런 집이 되는 것 입니다.(중략) 자연 속에 하나님께서는 나무 속에 혹은 꽃 속에, 새 속에, 물 속에, 바윗 속에 다 하나님의 성품을 감추어 놓고, 그 속에 하나님의 진리를 다 숨겨 놓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연이 완전한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성품이 감추어져 있고, 신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을 잘 관찰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중략) 자연의 숨겨진 언어, 이것을 좀 요새 철학적인 힘든 말로 말하면,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이 존재론에서 언어는 인간이 거할 수 있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3]

인간이 궁극적 실재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몸이라고 비유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성경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랄 수 있는 창조세계인 대우주를 감지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세계 경전이 말하는 ‘도와 로고스와 니르바나와 브라만’ 등 궁극적 실재는 인간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종교적 기제가 아니다. 여도합일(與道合一), 깨달음체험, 범아일여(梵我一如) 등의 종교체험은 통상 ‘신비주의’라고 불리는 종교적 인간의 탈바꿈 현상이다. 이처럼 신비체험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과학적으로 극대화한 인공지능과 차별화시킬 수 있는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이 궁극적 존재와의 교류를 통해서 구현된다.[4]

종교의 의례체계 가운데 참선과 기도, 명상과 묵상, 찬송과 범패(梵唄), 기수련과 요가, 탁발과 자비량, 설교와 설법 등은 다양한 종교문화가 발명한 궁극적 실재와 교류하기 위한 종교적 방편이다. 또한 불교의 참선과 성령체험, 그리고 주역의 “적연부동 감이수통(寂然不動 感而遂通)”, 그리고 유일신앙 속에 면면히 내려오는 유대교의 카발라, 바울과 에크하르트, 야콥 뵈메 등의 신비주의, 이슬람의 수피즘, 그리고 쿤달리니의 각성을 통해 일곱 계층의 차크라를 통과하며 우주적인 몸을 만드는 인도식 수행과 연정화기(鍊精化氣), 연기화신(鍊氣化神), 영신환허(煉神還虛)의 단계를 거쳐 기(氣)를 매개로 ‘몸으로서의 우주성’을 획득하려는 도교식 수행(사진 참고) 등도 다른 종교문화 전통에서 만들어진 궁극적 존재를 체험하기 위한 종교적 언어이다.[5]

▲ ‘일곱 계층의 챠크라’와 내경도(內經圖)

세계 경전은 대우주인 자연과 소우주인 인간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평화세계를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있다. 문제는 분절적 인간이 인식하는 ‘COSMOS’(‘우주’이자 ‘조화’의 이중의미)는 인간과 우주의 관계가 정복과 지배의 상극적 관계로 구현되고, 통합적 인간은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호혜적인 관계로 자리매김한다.

우리는 통합적 인간으로서 우주적 신성이라는 궁극적 실재와 인간이라는 소우주와 무시무종의 대우주는 분절적이 아니라 조화로운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몸은 문자성경이고, 하나님의 마음은 자연성경이라고 유비한다면 통합적인 관점에서 경전을 읽어야 한다. 몸과 마음은 분리된 실체가 아니고 통합된 하나의 ‘’(=몸+맘)이다.

이 성경이라는 문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편지입니다. 이 글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문화된, 활자화된 글로써 나타난 이 문서는 이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글로써 나타난 이 문자 배후에 하나님의 진실한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선과 교로써 나누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참선을 하는 것은 왜 참선을 하느냐? 서산대사 쓴 『선가귀감』이라는 책에 보면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참선을 이렇게 오래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의 마음을 직접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을 받는 그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0-12)

이것이 참 중요한 성구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모두 외워두시고,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목적은 당신 속에서 숨어 있는 어떤 도의 깊은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주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깊이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학은 부처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이 글로써 쓰여진 이 문서는 우리가 배워야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몸은 될지라도 그 문자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자면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는 그런 술어가 나오는 원인이 우리는 이날까지 성경을 볼 때, 문자화된 성경만 보는 눈이 있었지, 그 문자 배후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마음의 비밀이 무엇이냐? 성경 속에서 숨어 있는 불립문자의 성경을 기독교인들이 보는 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이 진리의 문서의 깊은 비밀을 알아야 하는데, 그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성경 66권에 있는 하나님의 도의 비밀이 풀리지 않는 사실을 여러분은 깊이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6]

‘종교의 시대가 가고 과학의 시대가 왔다.’ 혹은 ‘종교의 시대는 갔지만, 또 다른 대안으로 영성의 시대가 온다.’[7]는 공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종교의 시대가 가고 초과학의 시대가 왔지만, 초종교의 대안담론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적 인간이 펼치는 과학적 유토피아에 종교의 자리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새 문명과 새 세계의 패러다임은 문사철 등 인문학자들이 제시하여야 한다. 종교학, 신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세계관의 패러다임을 해석하고 미래담론을 제시해야 하는 학문으로 사회적 기능이 부여한 책무가 아닌가! 인문학자는 학제적인 융합적인 사고의 틀로 학문을 하여야 한다. 하물며 창조주를 신앙하는 신학자 등 그리스도교인은 창조주가 창조한 우주와 인간, 인간이 발견하고 발명한 과학 등 제반 학문에 대해 포용적인 사고를 하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지 않는가!

성경해석의 삼대선언은 새로운 경전해석의 패러다임을 요청한다

‘성경인간론’은 ‘성경해석자로서의 나’는 나의 실존적 문제가 담긴 문자성경을 누구에게나 해석할 권한을 돌려주는 해석학의 해방선언이며, ‘성경우주론’은 ‘성경해석자로서의 나’는 우주와 인간이 생태학적으로 인드라망을 형성한 비문자성경을 ‘우주와 공명하는 나’로서 신인합발(神人合發)할 수 있다는 발현성을 선포한다. 이는 성경해석자에게 ’초종교와 초과학의 시대에 성경해석의 근본적인 인식전환을 요청한다.

요약하면 변찬린은 성경해석의 삼대선언을 이렇게 말한다. ⓵ “성경은 특정종교의 전용문서가 아닌 대도의 문서”라는 초종교성(《에큐메니안》, 2020. 12.08), ⓶ “성경은 제도종교(기독교, 불교 등)가 아니”라는 초종파성(《에큐메니안》, 2020. 12.22), 그리고 ⓷ “성경 즉 인간(우주)”이라는 범인류성(《에큐메니안》, 2021. 01. 05; 2021, 02, 02)을 가진다. 이는 성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 경전에 적용되어 세계 경전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해석학적 준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새 축 시대의 구도자는 ‘유학, 신학, 도학, 불학’ 등의 해석적 전통을 해체하고 분절된 세계관이 아닌 통합적 세계관에서 새롭게 텍스트를 읽어내어야 하며 그 결과는 믿음과 깨달음과 실천을 일치시킨 구도자의 자세로 발현되어야 한다.

미주

[미주 1] 이호재, 『한밝 변찬린(한국종교사상가)』, 문사철, 2017, 229-252.; 이호재, 「한밝문명사가, 한밝선생」, 『포스트 종교운동』, 문사철, 2018, 15-53.
[미주 2] 이 글은 20121년 1월 5일자 《에큐메니안》에 게재한 〈성경인간론 = “성경 즉 인간”: 성경인간론과 성경우주론〉의 후속편이다.
[미주 3] 변찬린, 「성경강의 테이프」(1982. 05. 02).
[미주 4] 그러나 이 글의 주제와는 다소 벗어나지만 세계 종교는 신비체험도 다양한 층위가 있기에 더 섬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필자는 켄 윌버의 논의를 뛰어넘는 ‘영성(靈聖)종교학’의 담론이 필요함을 제기한다.
[미주 5] 내경도는 소우주와 대우주의 합일을 지향하는 도교의 대표적인 신체관으로 청시대의 석판화로, 융과 빌헬름에게 사사한 어윈 러셀(Erwin Russel)이 북경의 백운관에서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몸수련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미주 6] 변찬린, 「성경강의 테이프」(1981. 10. 04.)
[미주 7] 길희성, 『종교에서 영성으로』, 북스코프, 2018.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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