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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구도의 문서이다

기사승인 2020.11.24  17: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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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향을 찾아가는 ‘도의 나그네’는 구도자이다

성경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구도의 문서이다

성경(聖經)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개방된 문헌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성경’은 다양한 종교경전을 일컫는 일반명사이다. 지역과 풍속과 문화권의 차이에 따라 성경은 해당 종교문화를  주도해 온 나침반의 구실을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서’(the Bible, the Scripture), 유교경전에서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장(儒藏)’, 불교에서는 ‘경율론’을 집대성한 ‘대장경’, 도교에는 노장사상을 포함한 ‘도장(道藏)’이 있다. 개방되어 있는 경전으로서의 성경은 이해관계자의 의향과 의도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축 시대에 탄생된 인류의 고전인 성경은 문자 경전을 중심으로 개별 종교 문헌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 불교 등 종파 종교가 고유의 신념체계와 의례체계를 형성하면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산시켜온 역사이다. 그러나 지구촌 사유가 합류하는 시대에 여전히 특정 종교만을 호교하는 닫힌 체계로 성경을 대하는 것은 구시대의 직업종교인의 발상에 불과하다.

종교는 창교자의 언행이 담긴 성경(신념체계)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른 종교문화와의 만남, 교섭, 융합이라는 변화를 거쳐 당대의 종교적 신앙인에게 의례체계로 재현되는 살아있는 종교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창교자의 언행과 이를 계승한 종교구성원의 언행의 괴리가 커지거나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외따로 떨어진 종교현상으로 변질되어 화석화되면서 사멸되는 것을 종교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성경에 전승되는 언행의 주인공은 완전을 향해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참 구도자는 믿음의 깨달음과 깨달음의 실천을 통해 성경의 삶을 현대에 되살린다. 참 구도자는 온화한 석가모니의 황금불상보다는 보리수아래 뼈골이 앙상한 구도의 모습을 자신의 길로 삼으며,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은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우상숭배하기 보다는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예수가 이 시대에 살아있음을 증명한다.(사진 1 참조) 참 구도자는 행동으로 자신이 신앙하는 구도의 경전을 ’성스러운 문헌(성경)‘으로서 역사 속에 살아 움직이게 하는 육화(肉化)된 존재이다.

▲ 사진 1: 고난과 고행의 두 구도자

이런 구도자의 전통은 카파토키야의 수도자, 프란체스코 등 탁발 수도회(Ordines mendicantium), 마테오리치, 떼이야르 드 샤르댕 등과 같은 예수회 수도단체, 그리고 엑카르트, 야콥 뵈메 등의 신비주의자, 스데반, 부르노 등 순교자 등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영성의 맥을 형성하고, 등신불의 역사, 소신공양하는 약왕보살의 전통과 피모대각(被毛戴角: 쟁기를 끌며 농부 일을 돕는 소)의 정진은 살아있는 종교역사로서 불맥을 형성하며, 또한 참 유학자는 살신성인하고 성과 경으로 실천하는 유가의 학맥을 계승한다. 또한 도가에서도 성인(聖人)은 피갈회옥(被褐懷玉: 옥을 품고 베옷을 입음)하면서 화광동진(和光同塵: 세속과 어울리는 성인)한다.

그러나 제도종교의 교권을 가진 직업종교인은 성경을 구도지침으로 실천하기 보다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신학과 교학의 호교론적 변증서, 기복신앙과 자본신앙의 교세확장을 위한 도구적 종교문헌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구도자로서 성서를 믿고 깨닫고 실천하는 종교문화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성서의 하나님을 신앙한다면서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의 역사적 과오와 예수그리스도를 ‘예수의 몸된 성전’인 교회를 영성상품화 하여 교회매매와 교회세습하면서 신성모독 하는 한국 교회의 현장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성서에 각인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구도(자)의 길과 정신을 추구하기 보다는 교리와 신학으로 치밀하게 짜인 ‘교회공동체’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예수를 믿는 척 하는 ‘원숭이 믿음’을 하고 있는지 되물어보아야 한다. 성서의 정신과 괴리되고 교리와도 상치되는 ‘교회매매와 세습’등의 종교현상에 대해 책임 있는 신앙적 실천이 뒤따르지 않고 교회혁신운동의 구호로만 요란스러운 것이 작금의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이는 구도의 정신을 내팽겨 치고 교권수호에 성경이 이용되는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다른 제도종교에서 쉽게 발견되는 종교현상이다.

성경은 구도를 위한 수행문서로서 읽고 실천되어야 한다

한국의 종교역사에서 구도자의 전통은 한국 종교의 도맥으로 고동치고 있다.(1) 멀리서 찾지 않더라도 근·현대에만 보더라도 동학을 비롯한 신종교는 주문과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전통이 계승되고 있다.(2) 또한 천주교의 피정제도, 불교의 하안거, 동안거 등의 수행제도가 제도화되어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개신교에서는 수행전통이 결핍되어 있다. 이를 한국 조직신학학회장을 역임한 김흡영은 세계 그리스도교의 신학전통이 로고스 신학과 프락시스 신학으로 분리된 역사이기에 이를 위해 동아시아의 진리와 수행의 합일을 지향하자고 주장하며 도(道)를 신학적 기호로 사용하여 ‘도의 신학’을 주창하고 있다. ‘도의 신학’은 교의학과 실천을 일치시키자는 ‘몸신학’과 ‘숨신학’을 회통시킨 수행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류의 고전인 세계 종교 경전은 권위의 근원을 ‘하늘(님)’과 법(法)과 도(道)등 절대차원에 두고 있다. 성경은 근원의 고향을 찾아가는 문서이다. 성서가 믿음의 길이라는 경향을 가진다면 아시아의 종교 전통은 깨달음과 수행의 길이라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새 축 시대에는 성경은 신학과 교학의 알음알이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만나기 위한 구도의 지침서로서 인식이 전환되어야 한다.

구도의 문서로서 성경은 믿음을 통해 입문하고 치열한 구도를 통해 깨달아야 하고, 깨달은 후에는 민중과 더불어 깨달음의 차원을 증언하는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는 것은 믿음과 깨달음과 실천이 삼위일체가 된 최고의 경지이다. 도가에서는 “공성불거(功成不居: 공적이 이루어져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라고 하며, 한국의 전통문화도 ‘음덕(陰德)’을 쌓으라고 한다. 불가에서도 수행승과 일반제가가 같이 하는 이류중행(異類中行)를 강조한다.

사실 믿음을 실천한 사람이 믿음의 문서를 이해하고 실천하고, 깨달음을 깨치고 실천한 사람이 깨달음의 문서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분리되었을 때 성경은 직업종교인이 ‘종교장사’를 하는 도구적 지식으로 전락하는 운명에 빠진다. 변찬린은 성경이야말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수행하고 수양하는 구도의 문서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이 깨달은 모든 종교는 심전개발을 위한 방법론이었다.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도 황폐한 마음밭을 갈아 옥토를 만들려는 인간의 피땀어린 구도였음을 잊지 말자.(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129)

그럼 구도란 무엇인가? 도를 구하는 과정, 도와 일치되는 여도합일(與道合一)하는 과정이다. 이론과 실천, 깨달음과 수행, 믿음과 실행, 지식과 행동, 머리와 지체는 호응하고 순응하여 공명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도(道)는 성서적 맥락에서 벌레같은 인간(욥25:6, 시22:6, 이 41:14, 잠언 12:4)이 머리인 예수그리스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변찬린은 1981년 9월 6일의 《성경강의》에서 요한복음의 ‘로고스’가 한국성서에는 ‘말씀’으로 중국성서에는 도(道)로 번역된 과정과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제가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동양에서 길 도(道)자가 굉장히 뜻이 깊은 글자입니다. (칠판에 글자를 쓰며) 길 도(道)자를 보면 이게 머리(首)를 뜻하고 책받침변(辵)은 본래 상형문자로 (칠판에 글자를 쓰며) 이렇게 쓰는데 이것은 뭐냐하면 벌레가 이렇게 앞으로 서서히  나가잖아요, 벌레가 무슨 목적을 향해서 앞으로 서서히 나가는 것 그런 상형문자입니다. 그러면 머리를 향해서 머리를 찾아서 나가는 것이 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뜻을 가진 어떤 경서를 봐도 내가 곧 만유의 머리며, 교회의 머리며, 우주의 머리라는 것은 성경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중략)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복음 1장 14절, 요한복음 1장 18절을 성경모임의 참석자가 읽고 난 후] 이런 성구를 보면 예수는 육신이 말씀이 된 글입니다. 이 말씀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의 순수한 말은 참 잘 된 말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피오라는 철학자는 그리스도를 끌어들여다가 로고스라는 말씀으로 대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로고스가 되었고, 서양 선교사들이 동양에 와서 이것이 도대체 동양에 무슨 개념이 있느냐? 그래서 말씀을 로고스라는 말을 도라는 말로써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 성경에는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도(道)라는 말씀이 우리나라의 말로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라는 개념은 여러분이 다 알지만 (칠판에 글을 쓰며) 그 ‘말’과 ‘씀’이라는 두 말이 합한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이라는 개념은, 이 ‘씀’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이것이 도에 말하는 체와 용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뭐 씀씀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을 쓰는데, 사용하는 그런 말이지 않아요? 그럼, 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말이고, 이 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체가 창조주가 되어 가지고, 이 만유를 용으로 되는 도와 체가 한 군데 합하여진 것이 말씀이라는 말이에요. 말과 씀이라는 말이 합한 말씀입니다. 로고스라는 말이 아무리 그것이 훌륭한 말이라고 해도, 여러분이 대학교에서 다 배웠겠지만, 로고스라는 그리스어의 개념은 우주를 관통하는 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에서 볼 것 같으면, 로고스는 우주를 관통하는 어떤 질서라든가 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구도자로서 변찬린에게 성경공부는 궁극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인격변화를 위한 부단한 구도의 과정 그 자체였다. 진리의 ‘복음’은 기복신앙과 자본신앙을 뒷받침하는 신학자료나 설교자료가 아니다. 말씀을 만나 인간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인격혁명을 통한 존재 자체가 탈바꿈하는 인간혁명이다. 변찬린은 성경모임의 참석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그 자리, 그것이 복음이에요. 사람의 근본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는 복음이라면, 그것은 가짜 복음이에요. 우리가 지금 그런 복음을 아직 접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차 예수가 오실 때에는, 사람다운 사람을 찾을 텐데, 우리가 지금 그런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구도자로서 성경을 읽는 자세는 진리를 향한 불퇴전의 마음과 사심이 없는 겸손한 태도이다. 진정한 겸손의 ‘말씀’은 온전한 진리를 세속생활의 낮은 자리에서 민중과 더불어 사는 삶 자체이다. 변찬린은 겸손의 겸(謙)을 이렇게 해석한다. 겸손의 겸(謙) = 말씀(言)+ 겸하다(兼)의 합성어이다. 말씀은 ‘말’과 ‘씀’이다. 경전의 말(내용)을 온전히 육화하여야 비로소 겸손해 진다는 말이다. “겸손은 구도자의 덕(德) 중 최고의 덕이다”라고 말하며, 진리를 체화하여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즉 ‘진리의 말’을 체화하면 누가 겸손하라고 하지 않아도 겸손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구도자에게 “교만과 나태”는 두가지 적이며, 맹자의 언어를 빌어 구도의 길을 포기하는 ‘자포자(自暴自)와 ’자기자(自棄者)‘에 대해서는 강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변찬린이 걸어간 구도의 길은 오늘날 종교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끼니가 없어 책을 팔아 삶을 영위했던 육신의 아픔보다 아무도 이해하는 자가 없는 절대고독의 자리에서 구도는 단행된다. 스스로를 ’산 송장‘이라고 하는 그의 구도적 삶은 구도의 처절함의 실상보다 오히려 정제되어 표현한다. 『성경의 원리』를 마무리하면서 이런 소회를 밝힌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2019, 572.

변찬린은 생전에는 지음(知音)을 거의 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30여년도 더 지난 시점에서 모 교수가 변찬린의 구도의 수상록인 『禪 ,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사진 2 참고)을 읽은 후, 2020년 3월 24일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토로한다.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놓을 만한 ‘권위’있는 평이라 생각되기에 독자에게 소개한다.

“한가롭지 않은 시절에 한가하게 책를 읽었다. 최근 한밝 변찬린 선생을 지인에게 소개받고 한밝의 시를 구해 읽었다. 마침 오늘 책이 도착했다하여 저녁 늦게 호기심으로 몇줄을 들춰보다가 단숨에 마지막 장까지 읽고 말았다. 1988년에 가나안출판사에서 발간한 시집이다. 읽고난 첫 느낌은 이제 유불선 삼교가 아니라 유불선기(儒佛仙基: 유교, 불교, 선교, 기독교) 사교를 다룰 시점이 되었다는 확신이다. 한밝선생이 그 일을 하고 떠났다. 한밝선생의 시를 보면 견성의 단계를 초월한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멜기세덱으로부터 이어진 선맥(僊脈)을 찾았다는 말은 그분의 경지를 암시한다. “제로에서 대폭발한 내 의식의 빛”, “내 머리골이 열리는 소리”가 견성이라면 “아알라야식 심층에 뿌리를 뻗은 기억의 나무에서 개화하는 인상의 꽃이여”, “오롯이 피어난 나의 꽃술에 당신의 馬陰(마음: 부처의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을 감추세요”, “妙(묘)의 門(문)이 열리면 발기되는 내 두상”은 대각의 소식이다. 기독교 역사에 대각을 이룬 분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사교회통의 초석을 놓고 신단수 아래에 정좌하여 새밝을 기다린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회통한 쾌거이다.”(3)

‘말’과 ‘씀’의 모임인 ‘성경’은 궁극적 실재까지 도달하여야 할 여정에 대한 파노라마이다.  우주적 파노라마인 성경은 믿음의 반석과 깨달음의 희열과 민중과 동고동락하는 실천의 문서로서 우리와 관계지워진다. 그 길을 축 시대의 단군, 예수, 석가모니, 노자가 보여주었고, 시대마다 이런 구도자적 전통은 위대한 종교인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 사진 2 변찬린, 『禪 ,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가나안출판사, 1988.

선택된 성서적 인간은 본향을 향해가는 도의 나그네, 즉 구도자이다

그럼 성서에서는 구도자의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우리가 전회에서 살펴본 풍류객(4)을 연상한다면 ‘바람처럼 흐르는 나그네’라는 어원에 충실할 때 성서적 인간은 ‘도의 나그네’, 즉 구도자로 은유될 수 있다.

인간시조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이 화염겸에 의해 막히고 나서 성서적 인간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 전까지 ‘바람처럼 나그네로서’ 존재의 아버지가 있는 본향을 향해 끊임없이 구도하는 나그네의 삶으로 묘사된다.

하나님과 첫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기 위해 구도자처럼 방황한다. 아브라함을 따라 이삭은 자연스럽게 동행하는 구도자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이십 년 동안 고난의 세월을 보낸 야곱은 안주의 생활을 하던 중 세겜성을 택한 실수로 디나가 강간을 당한 사건이 일어나지만, ‘벧엘로 올라가자’는 설교의 단골주제처럼 벧엘에 단을 쌓고 하나님의 언약을 재확인 한 후 다시 나그네처럼 유랑의 생활을 시작한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박스)

이처럼 예수가 말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마 22:32; 막 12:26-27; 눅 20:36-37)이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세상에 정주하지 않고 구도자 생활을 통하여 성서의 부활의 신앙을 내재한 조상으로 등장한다.

모세도 미디안 땅에서 구도자가 되었으며, 해방자로서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60만 명의 이스라엘의 민족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시켜 광야에서 40년 동안 시내 반도를 방랑한다. 이 고난의 여정에서 야훼신으로부터 이동형 성막과 십계명을 받지만 출애굽 세대는 광야에서 사멸하고 광야에서 새로 출생한 세대가 여호수아와 갈렙의 지도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정착한다.

불수레를 타고 우화등선한 엘리야도 구도자로 성서에 등장한다. 성서에서 한 인물을 소개할 때 반드시 그 족보를 소개하지만 엘리야에 대해서는 〈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사람 엘리야〉라고 한다. 그는 정착하는 삶을 살지 않고 과부집으로, 갈멜산으로 로뎀 나무 밑으로, 호렙산으로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는 ‘회오리바람으로(왕하 2:11) 홀연히 하늘로 사라진 구도자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아기 예수를 영접한 빈들의 목자, 예수는 물론이고 예수를 따라나선 민중들도 구도자로서 살았다. 사도 바울도 믿음의 대장정에 오른 구도자였다(고후 11:23-27).

다시 말하면 선택받은 성서적 인간은 구도자로 상징된다(시 119:19. 히 11:13-14). 변찬린은 “마귀가 권세를 잡은 세상에서 참 구도자는 정착할 수 없고 진리를 찾기 위해 구도자처럼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이래 구도자로서 평생 방황하는 나그네 생활을 했고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나그네의 생활을 했다”고 강조한다.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성서를 읽으면서도 ’편안하게 믿고 죽은 후에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성서의 정신과는 괴리된 신앙을 할 것인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것인가는 키엘케고르의 선택적 질문을 하지 않더라도 ’십자가의 고난‘은 성서의 전편에 흐르는 당위 명령이다. 과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큰 소리가 그리스도교인의 가슴에 고동치고 있는지는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고동치는 예수의 ’말‘이 나에게 권능이 되어 ’씀‘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재현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할 때이다.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5–40)

선택받은 성서적 인간은 정착하지 않고 구도자로 살아야 한다. 구약의 믿음의 나그네는 예수가 없는 상태에서도 본향을 찾아 정착하지 않고 구도자의 길을 갔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와 제자 등 소수의 구도자들을 제외하고는 교파와 교리의 성곽을 쌓고 황금 종탑을 달고 자본 십자가를 앞세워 기복신앙과 사후구원을 담보로 하는 건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건물교회에서 성가대의 찬미 속에서 구름 위에 보좌를 베풀고 앉은 예수께 영광을 올리는 죽은 예배를 탈피하여 십자가의 ’관계의 현장‘에서 베푸는 살아있는 예배를 하여야 한다.

참 구도자인 풍류객은 특정 종교와 교파의 신자나 신학과 교학의 노예가 아닌 절대 자유한 시공우주와 영성우주를 넘나드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자유자재한 바람(風)은 모든 구도자의 참 바람(願)이다. 성서에서 본향을 찾는 참 구도자는 이래야 한다.

동방 르네상스: 풍류선맥전통론을 중심으로 새로운 풍류담론을 제안한다

필자는 최근 6회에 걸쳐 풍류담론의 핵인 풍류선맥정통론을 중심으로 ‘풍류체와 풍류심, 풍류객’이라는 종교적 언어로 형성된 풍류 세계관을 한국인이 구현해야 할 실천적 과제로서 제안한다.

더 나아가 축 시대의 종파종교인의 호교론적인 낡은 종교담론를 극복한 바탕위에 고조선 문명의 원류인 요동문명과 한민족의 선맥을 재조명하여, 동방 르네상스라는 거시담론을 새 축 시대의 담론으로 세계 학계에 제시하도록 집단지성은 힘을 모아야 한다. 동방 르네상스는 다종교적 언어, 간텍스트적 해석, 다학제적 방법론을 활용하여 한민족의 축적된 의미체계와 실천체계가 집합한 새 문명의 초석이다. 동방 르네상스는 남북의 평화통일과 통일평화의 새로운 실체가 촉발하는 지구문명의 새로운 현재적 전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때이다.

미주

(미주 1) 윤이흠, 『한국의 종교와 종교사』 (서울: 박문사, 2016), 135-138.
(미주 2) 차옥숭의 저서인 한국인의 종교경험 시리즈를 참고할 것: 차옥숭, 『한국인의 종교경험:무교』 (서울: 서광사, 1997); 같은 저자, 『한국인의 종교경험: 천도교, 대종교』 (서울: 서광사, 2000); 같은 저자, 『한국인의 종교경험: 증산교, 원불교』 (서울: 서광사, 2003).
(미주 3) ( ) 속은 필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필한 것임.
(미주 4) 이호재, 〈풍류객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에큐메니안》, 2020. 10. 27.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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