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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학자가 말하는 한밝 변찬린과 『성경의 원리』

기사승인 2020.11.10  16: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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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학자와 종교학자의 대화

이 인터뷰는 2020년 10월 22일부터 11월 3일까지 대면 인터뷰와 유선 통화, 그리고 이메일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 필자 주

종교학자: 오늘은 히브리 대학교(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에서 15년 동안 성서학을 연구한 조용식 박사님을 모시고 한밝 변찬린 선생(이하 ‘한밝 선생’)과 그가 쓴 『성경의 원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쁘신 데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서의 역사가 살아있는 이스라엘에서 15년이라는 장기간동안 유학을 가게 된 사정이 대단히 궁금합니다. 어떤 계기로 가게 되셨는지요?

성서학자: 제 학부 시절(1983-1987)의 캠퍼스(연세대학교 신학과)는 민중신학, 해방신학, 에큐메니칼 운동 등의 본산으로서, 제5공화국뿐만 아니라, 전통적 교리로 무장한 교회 권력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소위 '맞짱'을 뜨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인간의 지성과 이성과 현실에 토대를 둔 자유로운 성서해석에 큰 매력을 느꼈지요. 이어서 군대를 다녀와 대학원(同 대학원 신학과)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성서학(구약학)을 전공했는데, 다양한 성서해석 ‘방법론’을 배우면서, 결국 성서학의 출발점은 ‘언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이스라엘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종교학자: 제가 알기로는 1980년대라면 연세대학 신학과에 한태동, 유동식, 김광식, 서남동 등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이 계시던 때라고 알고 있는데 학문적인 복을 많으신 것 같습니다.  ‘서구신학의 안테나’란 별명을 가지신 서남동 교수의 『전환시대의 신학』은 저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2016년에 출간하신 김용기 장로의 평전인 『가나안 끝나지 않은 여정』(사진 1 참조)을 인터뷰를 앞두고 정독을 하였는데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이런 집필 과정은 한국 신학계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생각합니다. 어떠신지요?

▲ 사진 1: 조용식, 『가나안, 끝나지 않은 여정』

성서학자: 예, 맞습니다. 학부 때 한태동, 유동식, 김광식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복이었지요. 동서양의 철학과 역사와 문학을 넘나들던 한태동 교수님의 강의, 도인이나 신선 같은 모습으로 ‘풍류 신학’을 설파하시던 유동식 교수님의 모습, 칼 바르트의 사상을 부흥강사처럼 알기 쉽게 설명하시던 김광식 교수님의 명쾌함은 지금도 멋진 추억입니다만… 그러나 제 주요 관심사는 아니었습니다.

종교학자: 사실 다른 전공학자로서 신학의 분과학문이 너무 다양하여 혼돈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성서학은 신학의 하위 분과학문이 아닌지요? 이와 연관하여 설명을 해 주시면 인터뷰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성서학자: 그 당시에는 저도 몰랐고, 현재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신학’과 ‘성서학’은 전혀 다른 분야입니다. ‘신학자’는 인간의 사유체계를 위해서 성서를 사용하지만, ‘성서학자’는 성서를 위해서 인간의 사유체계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에서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구약학, 신약학 교수님들의 새로운 성서해석 방법론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제 관심사는 성서 그 자체였지, ‘신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 농군학교의 설립자이신 일가 김용기 장로에 관한 책은 한국 신학계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삽”이라는 모토로 살았던 일가 김용기 장로의 ‘성서해석’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더 나아가, 서구적인 방법론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유영모, 함석헌, 김교신 등 ‘한국인’의 성서해석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학자: 그럼 김용기 장로가 농군학교를 운영하는 기본적인 사상적 배경은 어떤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비롯된 것인지요?

성서학자: ‘학교’를 운영한 분이니까 ‘교장’이라는 호칭으로 알려져야 할텐데, 김용기라는 이름 뒤에 늘 ‘장로’라는 호칭이 붙는 것을 보면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가나안 농군학교는 설립할 때 이미 그 안에 ‘가나안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용기 ‘장로’는 교육생들의 종교와 상관없이 성경의 원칙을 거침없이 소개하곤 했습니다. 성경은 결코 ‘내세’만을 강조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성경에는 사실상 ‘땅에서’ 잘 살자는 내용이 절반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살면 잘 살지 말라고 해도 잘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분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수녀님들을 비롯해서, 심지어 원불교 교무들까지 앉아 있는 사진을 보면 경이롭습니다. 그런데 혹시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지금 의도적으로 김용기 장로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정신’이라는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 어떤 특정한 ‘그리스도교’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세운 ‘가나안 교회’ 역시 그 어떤 ‘그리스도교’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로서, ‘독립교단’이라는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교회입니다. 일가 김용기 장로에게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영생에 이르는 길이며, 그 길은 오직 ‘성경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자서전 격인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에서 첫 장은 ‘성경과 한학을 배우다’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선교사나 목회자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성경과 한학을 배웠고, 그의 아버지는 안동 김씨 가문의 일원으로서 정통 유학자였지만 마을에 들렀던 한 전도인이 놓고 간 쪽지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절을 보고, ‘멸망’과 ‘영생’이라는 단어를 한학의 ‘순천자흥 역천자망(順天者興 逆天者亡)’과 연결시키면서 ‘성경’을 받아들인 ‘자생적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성서학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내력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종교학자: 김용기 ‘장로’가 특정 교파와 교단에 속하지 않고 자신의 유학적 전통에서 성서의 정신을 실천한 ‘자생적 그리스도교인’이라는 것은 서구신학에 뿌리를 둔 교단신학이 주류인 한국 그리스도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그럼 한밝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성서학자: 한밝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일가 김용기 장로에 관한 책을 쓰게 된 사건이었고 이를 계기로 일가 김용기 장로와 교류를 했던 그 시대의 비주류 ‘한국인들’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여운형, 유영모, 함석헌. 이어서 이들 외에도 얼마나 더 많은 보석들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호기심의 와중에 어느 성서모임에서 한밝 선생의 역작인 『성경의 원리』(상·중·하)와 『요한계시록 신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밝 선생의 시 몇 수를 접한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었습니다. 언어의 유희, 심오한 은유, 깊은 사색과 고뇌,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분(참 하나님)에 대한 집념, 생명에 대한 그 뜨거운 사랑 등이 함축된 그의 시들을 보니, 한밝 선생이 어떤 인물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원리』를 다시 꺼내들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호재 교수께서 집필하신 한밝 선생의 전기(사진 2 참조)를 참조하면서, 본격적인 관심을 쏟게 된 것입니다.

▲ 사진 2: 이호재, 『한밝 변찬린(한국종교사상가)』

종교학자: 한밝 선생의 성서해석과 한국의 토착화 신학자들과 비교한다면 어떠한 점이 차이가 있는지요?

성서학자: 저는 한밝 선생의 성서해석이 ‘토착화’라는 개념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토착화(土着化)’라는 개념은 ‘뿌리내림’이라는 의미로서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심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하는 한 한밝 선생의 성서해석은 무엇인가를 ‘심는’ 작업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캐내는’, 아니면 무엇인가를 ‘줍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한밝 선생에게 가장 본질적인 일은 ‘밭에서 이삭들을 줍는’ 것이지 밭들을 갈아엎고 바나나 농장이나 오렌지 농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밝 선생의 작업은 한국의 토착화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봅니다.

종교학자: 당시 토착화 신학자들이 서구신학의 토착화를 추구했다면 한밝 선생은 성서에서 숨겨진 복음의 씨앗을 새롭게 발굴하였다는 의미로 이해를 하면 되는지요?

성서학자: 그렇습니다. 토착화 신학자들의 목표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토착화’라는 말 자체는 ‘밖에서’ 가져온 씨앗을 현지에 심는다는 것을 함의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한밝 선생의 작업에서는 씨앗 자체도 ‘자생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밝 선생의 궁극적 목표는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 아닙니다. 밭에서 주운 이삭으로 배를 채운 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산삼을 캐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성서의 엘리야가 로뎀 나무 밑에서 천사에게 음식을 얻어먹고 그 힘으로 사십 일 동안 광야를 지나 호렙산에 올라가서 ‘그분’의 세밀한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와 주변 인물이 모두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마리아는 천사 대신 ‘선녀’의 수태고지를 들으면서 ‘물레’를 돌리고 있지만 결국 한복에 갓을 쓰고 있던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소위 ‘토착화(土着化)’의 한계입니다. ‘십자가’는 한국 문화와 종교에서 영원히 ‘버내너(banana)’ 또는 ‘어륀지(orange)’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밝 선생은 ‘십자가’를 한국 문화와 종교에 심는 일(= 토착화) 대신 성서 안에서 ‘괘(卦)’를 캐냅니다.

종교학자: 아주 흥미로운 지적이신 것 같습니다. 한밝 선생의 작업이 기존의 토착화 신학자와는 달리 ‘성서의 밭’에서 진리의 이삭을 먹고 직접 영생의 말씀을 찾았다는 표현은 아주 상징적인 통찰력 있는 지적 같습니다. 제가 《에큐메니안》에 한밝 선생의 「성서와 역(易)의 해후」를 중심으로 성서와 역의 상관관계에 대한 썼습니다만 성서학자가 성서 안에서 ‘괘(卦)’를 캐낸다는 것은 어떤 맥락의 의미를 가지고 사용하는 건지요?

성서학자: 십자가는 ‘상징’입니다. 예수가 거기에 못 박혔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단어가 신학적 의미를 가진 것뿐입니다. 만일 예수가 조선 시대 죄수의 목에 채우던 ‘칼’을 쓰고 처형장으로 향했다면 성경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기록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에 칼을 차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 참조).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모습’을 조선 사람으로 바꿀 수 있다면, 십자가라는 로마 제국의 ‘도구’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십자가가 ‘고난의 상징’이라면, 바울 서신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정확한 표현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십자가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는 고난과 승리, 치욕과 영광, 죽음과 영생을 모두 포괄하는 ‘숙명(宿命)’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흉(吉凶)을 포괄하는 동양 전통의 상징인 ‘괘’를 언급한 것입니다.

종교학자: 네 잘 알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한밝 선생이 “성경은 선(僊)의 문서”라고 하면서 동이족의 신선사상과 성서의 변화와 부활의 도맥을 이해지평에서 융합시킨 연구에 대해서도 말씀을 듣는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제가 한밝 선생을 연구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토착화 신학은 복음을 한국 종교문화의 토양에 심는다는 선교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한밝 선생은 성서해석을 했다는 점이 크게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런 점은 신학계에서 어떻게 평가를 할 수 있는지요?

성서학자: 위에서 이미 한밝 선생과 한국의 토착화 신학자들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또 한 가지 본질적인 차이점을 언급하자면 한국의 토착화 신학자들에게는 한국의 문화와 종교가 그들의 ‘밭’이겠지만, 한밝 선생에게는 성서가 그의 ‘밭’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이든, 선교학, 목회학 등 실천신학이든, 토착화 신학이든, 그들에게 복음이란, 종묘장에서 길러낸 모종에 불과합니다. 그들에게는 성서가 ‘밭’은 고사하고, ‘종묘장’조차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종묘장이란 각 교파의 전통과 교리일 뿐입니다. 이것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상황이 아니라 현재 소위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상황입니다. 오늘날 ‘복음’이라는 단어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그 복음의 ‘진리’는 실종된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밝 선생의 성서해석은 그 내용 자체보다도 본래의 자리 찾기라는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종교학자: 그동안 토착화 신학자들이 말하는 서구신학의 복음을 ‘씨’로 보고 한국 종교문화를 ‘밭’으로 보면서 연구한 발효모델, 파종모델, 접목모델 등 다양한 신학모델과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한국 종교사의 맥락에서 볼 때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아직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안착되지 않은 ‘격의(格義) 그리스도교’ 현상이라고 저는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 중국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 불교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선불교라는 중국불교로 탄생한 역사적 사례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밝 선생의 성서해석 작업은 독창적인 한국 그리스도교를 지구촌에 보편화할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성서해석의 한 기틀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성서학자: 위에서 한 얘기의 연장선상에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 한국 기독교가 직면한 외적, 내적 ‘간격’들은 근본적으로 성서라는 ‘텍스트’와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간격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아직도 성서가 ‘넘사벽’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기독교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분들은 거의 2천 년에 걸쳐서 전 세계적으로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그토록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연구하고 분석한 단 한 권의 책이 여전히 ‘넘사벽’이라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무지요, 둘째는 교만입니다. 교계는 무지하고, 학계는 교만합니다. 교계는 성서의 메시지(진리)를 추구할 뿐 탐구하지 않습니다. 탐구는 치열한 지적 활동이지 헌신, 봉사, 희생 등의 구도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계는 무지합니다. 학계는 탐구할 뿐 추구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그 메시지를 듣는 것이지 인간의 이성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학계는 교만합니다. 그러므로 교계에도, 학계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시 한 수에도 지성이 묻어나고, 자신의 육체를 철저히 짓밟는 구도자로서 『성경의 원리』 4부작을 완성한 한밝 선생이 한국 종교사의 맥락에서 재조명 된다면 갑자기 이 간격이 확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 나아가 세계 신학계에도 충분히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밝 선생에게는 ‘독창적’이라는 수식어보다는 ‘당연한’ 또는 ‘사필귀정’의 성서해석이라는 수식어가 적합하지 않을까 합니다.

종교학자: 네 독창적이 아니고 ‘당연하다’는 표현이 상당히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성서의 진리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한밝 선생의 통찰과 맥을 같이하는 것 같습니다. 한밝 선생은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한다”는 해석학적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우리의 사유체계에 포월(包越)하여 성서해석을 하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은 유일신앙인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 대한 3부작을 출간하며 각 종교마다 다른 해석학적 패러다임으로 변화한 역사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서가 결국은 헬레니즘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의 교의학이라는 틀, 혹은 서구 철학의 사조에 의해 해석이 되었다는 한계가 보이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한밝 선생의 성서해석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성서학자: 저는 ‘헬레니즘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 교의학이라는 틀’ 자체는 한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헬레니즘을 비롯한 철학적 사조에 의해 성서가 해석되었다고 해서 잘못될 일은 없으니까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진리의 ‘탐구 영역’에서는 인간의 지적 수단이 필수적입니다. 문제는 서구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몇몇 철학 사조들이 진리의 ‘참고서 시장’을 독점했다는 사실이지요. ‘사유체계’의 차이란 적합성의 문제이지 우월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스인의 사유체계가 그리스도교 교의학이라는 틀에 적합한 때가 있었다면, 고대 동양의 사유 체계가 그리스도교 교의학에 적합한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가 언제인지는 그야말로 ‘신학자’들이 판단할 일이겠지만, 한밝 선생의 성서해석은 사실상 그리스도교 교의학이라는 틀을 초월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밝 선생이 학계에 몸담은 적은 없지만 그분의 방법론을 분류한다면, ‘신학자’가 아니라 ‘성서학자’에 가깝습니다. 그분은 특정한 사유체계를 위해서 성서를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위해서 적합한 사유체계를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유체계의 음성은 들리지만 그 음성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메시지를 전달할 뿐입니다. 즉, 한밝 선생의 성서해석에서 화자(話者)는 성서 자체이지 사유체계가 아니라는 뜻이며, 거기에 저는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종교학자: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에서 독창적으로 성서해석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학문의 자유인데, 한국 그리스도교는 독창적인 성서해석은 고사하고 교단신학과 조금만 벗어난 종교적 행위를 하더라도 신학자들이 ‘해임과 출교’등 신학적 자유를 억압하는 중세기적 마녀사냥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성서학자: 독창적인 성서해석이란 학문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의무이기도 하지요. 예수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또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저는 이 질문과 경고의 대상이 바로 여기 있는 우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해석이란 ‘그분’의 정체를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고백은 ‘들은 풍월’을 암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주장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창적인 성서해석이란, ‘희한한 소리’, 그저 ‘남이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성서를 보고, 만지고, 마음으로 듣고, 깨달아 ‘믿게 된’ 것을 말합니다. 보고 만지기 위해서는 ‘글’을 알아야 하고, 마음으로 듣고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인식의 체계’를 갖추어야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도자의 자세입니다. 저는 독창적인 성서해석에 대해서 ‘해임과 출교’ 등의 마녀사냥이 자행되는 ‘중세기적’ 풍토도 문제지만, 독창적인 성서해석을 빙자한 진짜 마녀들이 우글거리는 ‘근대적인’ 현실이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독창적인 성서해석’이란 어차피 출세나 부귀영화의 수단이 아니라 ‘도’를 깨닫는 구도의 과정일진대, ‘해임과 출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오히려 ‘해임과 출교’를 통해서 자유로운 신분이 되어야 독창적인 성서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웃음)

종교학자: 그만큼 교단에 소속해 있으면서 자유로운 신학적 사유를 전개하기는 너무 어렵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성경의 원리』 4부작을 개정신판으로 발간하며 한국 교회와 세계 그리스도교에 소개한다는 내용이 발간사에 있습니다. 성서학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의 원리』가 국내외 교계와 신학계에 가지는 가치는 어떨 것이라고 평가하시나요?

성서학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도 있고,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도 있듯이 『성경의 원리』가 제대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만 ‘발간사’의 당찬 포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내용을 잘 알아야만 『성경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용을 아는 것과 원리를 아는 것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원리』는 나침반으로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종교학자: 성서학자가 『성경의 원리』가 ‘성서해석의 나침반’이라고 하니 상당한 무게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인데요, 이스라엘의 성서연구 혹은 세계 성서연구라는 추세에 비추어보았을 때 한국 신학계의 동향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성서학자: 비평보다는 가능성을 말하고 싶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학이나 성서연구는 늘 ‘독창적 개인’과 ‘다수의 주류’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독창적 개인’ 쪽으로 기울어질 때 ‘개혁’이나 마녀사냥이 있었고 ‘다수의 주류’ 쪽으로 기울어질 때, ‘부흥’이나 타락이 있었지요. 오늘날 한국 신학계의 동향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힘든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창적 개인’과 ‘다수의 주류’는 서로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야말로 ‘때가 찼다’는 느낌이 듭니다.

종교학자: 장시간 인터뷰를 통해 한밝 선생의 연구 성과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평가를 해 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시의적절한 평론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익한 신학 정보를 듬뿍 주셔서 독자께도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서학자: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학문에도 적용되는바, 문제 제기는 사유의 출발점이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인터뷰의 질문은 오히려 제게도 큰 도움이 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종교학자: 더 많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지면 관계상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모시기로 하겠습니다. 바쁘신 데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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