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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학파를 결성하여 종교·신학한류를 시작하자

기사승인 2020.05.12  17:4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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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종교배는 열성인자를 낳고 이종교배는 우성인자를 낳는다

원효, 퇴계 등 한국의 위대한 종교인은 풍류의 심성으로 다양성과 통일성을 지향하는 경전해석을 한 전통의 모범이 된다. 우리가 조망하고 있는 유영모와 변찬린의 사유체계도 선교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보기론(補基論)에 불과할 터이지만, 적극적으로 평가하면 새 문명의 대안 사유가 될 정도로 넉넉하다. 그런데 한국 신학은 선교신학과 성취신학에 바탕을 둔 신학적 사유에 너무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한국의 창조적 영성이 특정 종교의 영성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만은 아닐까?라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종교다원주의 담론은 선교신학에 뿌리를 둔 전형적인 서구신학의 대리전

유영모 전문 연구서인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2002)에서 유영모의 종교관을 다양하게 평가한다. 정양모는 유영모가 폴 F 니터, 존 힉 등 서구 종교다원주의자보다 70여 년이 앞서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했다고 하고(98-99), 최인식은 “다석의 그리스도론은 개신교 신학자에게 ‘예수의 유일성과 그리스도의 다원성’이란 이율배반적 문제에 어떠한 해결점을 시사”한다고 지적한다(208-212). 또한 이정배는 “최근 김흥호 선생은 다석 유영모 사상을 기독교 서구에서 전개된 종교다원주의의 열매로 이해하는 필자의 시도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으며 다석이야말로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이해한 참다운 기독교 신앙인이었다고 주장한다”(261), 박영호가 다석의 종교관을 ‘일원다종교’라고 말하며, 유영모의 종교적 정체성을 ‘바른소리치김(正音敎)’라고 증언하고 있음도 상기해야 한다.

종교다원주의란 그리스도교만이 유일한 종교라고 인식한 서구신학이 다른 종교의 세계를 발견한 인식론적 대안 개념으로 형성된 서구신학의 담론이다. 길희성은 『포스트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에서 “서양의 전통적 신학은 근본적으로 종교 다원성이라는 것을 모르고 형성된 신학이다”(88)라고 신학적 배타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김흡영도 『도의 신학Ⅱ』에서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한국에서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서양 중심적 시각에서의 인식론적 논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34)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국 신학이 서구신학의 담론을 수입하여 소비하는 종교시장으로서만 작동되어서는 안 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유영모와 변찬린의 종교세계는 세계적 지평에서 논의되어야 할 담론이지 한국내 종교담론으로 한정을 지어서는 안된다.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서구신학 담론으로 한국의 창조적 영성이 소비되는 상황의 재연을 방지하기 위해 유영모 연구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을 몇 가지를 언급하려고 한다.

▲ 유영모 주요 연구서

첫째, 유영모는 특정 종교의 신앙인 입장에서 종교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바른소리치김(正音敎)’라고 하며, 혹은 ‘정음교의 신자’라고 말하듯이 경전해석에 자유스러운 입장에 있었다. 그는 성서의 신약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종교의 경전도 구약과 같다는 선이해의 관점을 수용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교인은 성경하면 신약을 주로 생각하는데 신약의 말씀도 구약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은 다른 종교의 경전도 다 구약성경과 같다고 봅니다. 조금도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이것을 믿습니다”(1)

그러나 그는 다른 종교의 경전은 선이해의 차원보다는 ‘정음(正音)’이자 ‘말씀’이라는 탈종교적 자리에서 경전해석을 하는 관점을 지닌다. 다시 말하면 유영모는 다양한 종교 경전을 특정 종교의 신앙서가 아니라 이를 깨달음으로 소화하여 실천적 구도와 수도의 도구로 삼고 있다. 동서양의 경전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서이다.

천년이 가도 만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말씀인 성경이나 불경이나 유교 경전은 ‘나간 만큼 나갈 말’입니다.(225)

우리가 유영모에게 배워야 할 점은 다양한 경전을 온몸으로 깨달아 회통하고 전체를 아우르면서 모두를 살리는 경전해석의 방법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유영모는 동서양의 문명을 포월하고 상생적 이해 지평을 융합하는 인식체계의 가온찍기를 확보한 것이다. 한국의 종교적 영성의 틀은 서구 문명의 사유를 포용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선언을 한 셈이다.

서양문명과 문화의 골수를 동쪽의 문명과 문화에다 집어넣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평생 말하는 것입니다.(310)

사실 그의 주장은 토착화된 한국의 다원적 종교전통에서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발언이다. 한국의 종교적 심성의 원형인 선맥의 풍류가 바로 이런 창조적 다원성이라는 인식체계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일부 신학자는 유영모를 연구할 때 복음의 선이해에 대한 위의 첫 발언을 과다하게 강조하고 있다. 길희성은 유동식과 윤성범 등 토착화 신학자의 선교신학 위주의 토착화 방법론 자체에 상당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2)

둘째, 유영모는 전통신학에서 삼위일체의 하나인 성령에 대해 상당히 열린 사유를 하고 있다. 성령은 단층이 아니고 다층으로 형성되었다는 ‘다층성령론’을 주장한다. 성령이 다층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에 기술된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도 상응하여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성령이 말씀을 그만두게 하면, 성령이 이 사람에게서 떠나갑니다. 우리가 ‘위’로 올라가는 생각으로만 인생을 산다면, 참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수 있는 경지에 가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발분(發奮)할 때가 있습니다. 의(義)를 존중한 나머지 침식(寢食)을 잊습니다. 이때 성령이 깃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령도 여러 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3)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교인의 독점물이 아니고 성령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체험이 가능하다는 ‘보편성령론’을 주장한다. 지면관계상 자세히 살펴보기는 힘들지만 유영모는 이미 탈 그리스도교적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을 살펴볼 때 유영모의 ‘바른소리치김(正音敎)’라는 종교적 정체성과 ‘일원다종교론’이라는 제자 박영호의 주장은 진지하게 새겨야 한다.

성령은 편협하게 꼭 기독교인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삼라만상에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는 언제든지 그 형태를 달리해서 두루 나타납니다. [중략] 만물의 영장으로서 곧이(貞)가 우리 마음에 있으면 성령을 얻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을 닫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 성령과는 상관이 없어집니다. 성령은 바로 우리의 정신적인 숨과 같은 것입니다.(4)

셋째, 유영모의 연구에 대한 학술적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유영모는 동학에 대해 『다석강의』에서 “최제우가 동학을 할 때 하느님만 보면 ‘조화무진 영생불멸(造化無盡 永生不滅)’한다고 말했습니다”(282)라는 말을 제외하면 다른 언급은 거의 없다. 또한 함석헌도 동학이 천주교의 반발로 일어나 민중을 깨우지 못해 실패한 종교라고 말한다. 동학에 대해 유영모는 거의 무관심하고 함석헌은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이 왜 동학에 대해 소극적인 인식을 하는가?라는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해석과 평가는 차후의 문제이다. 이길용은 「기독교에서 바라본 동학」에서 신학(자)의 필요에 의해 동학의 종교현상을 한국 종교역사의 맥락에서 이해되기 보다는 동학의 그리스도교적 해석에 역점을 두는 신학 연구 경향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5)

더불어 자신의 깨달음이 유영모 해석에 많이 반영된 김흥호의 『다석일지공부』가 유영모 연구의 1차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경계되어야 한다. 또한 박영호가 다석의 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몸나, 제나, 얼나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다석의 의도와는 상당히 다르다고 점도 유의하여야 한다. 필자는 다석 연구의 1차 자료는 『多夕日誌』 4권과 『다석 마지막 강의』가 가장 중요하며, 그의 전기는 박영호의 『다석전기』를 추천한다. 이외에 유영모 관련 자료는 박재순의 비판적 성찰을 참고하여 연구자의 엄증한 선별에 의해 이용되어야 한다.(6)

▲ 유영모 연구 1차 자료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고운,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은 없는가?”

학문적 사대주의와 식민주의에 매몰되어 한국의 학계는 독창적인 한국학의 담론으로 세계 지성계를 선도할 담론을 창출한 적이 거의 없다. 이는 서구신학의 대리전 양상을 띠는 신학계의 사정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변찬린은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고운,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등 한국의 역사적 학맥을 창조적으로 계승한다는 역사적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현실 인식은 역사적 지평에서 지극히 냉철하고 직설적이며 아직도 한국 그리스도계를 향해 외치는 유효한 발언이다.

더럽혀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원효같은 위대한 화쟁혼이 있었고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도 풍류의 얼을 고이 간직한 고운이 있었고 썩은 선비들이 사색당쟁의 개판을 칠 때도 퇴계와 율곡과 같은 사상의 거봉들이 정신의 산맥을 융기하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고운,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은 없는가?

 

▲ 변찬린, 『성경의 원리(下)』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9-10.

한국 토착화 신학이 전개되던 시기에 살며 이에 대한 많은 종교정보를 가진 변찬린은 1982년 『성경의 원리(下)』를 저술할 때 냉전이라는 세계 사상의 대리전을 펼쳐지는 역사의 현장에서 세계적인 신학사상이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한탄하며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국 종교신학계는 ‘사상의 황무지’라고 비판하고 있다.

히틀러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풀로센부르크 형무소에서 처형당한 본 헤퍼를 신앙의 영웅으로 추대하는 이 나라 신학자들이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강요당할 때 본 헤퍼같은 신학자 한 사람이 탄생하지 못한 정신적 빈곤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있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의 괴뢰가 되어 피비린 싸움을 하는 마당에 현존하면서 불로흐나 부버같은 사상가가 탄생하지 못하고 있는 사상의 황무지를 탄식하는 자각된 성직자가 과연 이 나라에 몇 명이나 있었든가?
- 변찬린, 『성경의 원리(下)』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9.

우리가 살펴본 유영모와 변찬린 등 제국적 학문담론에서 탈피한 종교인의 사유체계를 다시 사대주의와 식민주의의 안목으로 재단하여서는 안 된다. 이들의 종교관은 축 시대의 사유체계를 뛰어넘는 자리에서 형성되어 있다.

풍류학파를 결성하여 종교·신학 한류를 시작하자

그동안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이래 토착화 신학, 문화신학 등 한국 신학의 지평을 넓히고 확산하기 위한 신학계의 노력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토착화 신학의 큰 열매인 ‘민중신학’만이 김진호, 이상철, 김희헌 등 제3세대 민중신학자에 의해 명맥이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풍류신학’은 그나마 명맥이 유지되는지조차 불분명한 안타까운 실정이다. 문제는 이들 신학이 전혀 한국의 주류신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신학을 위한 선학들의 불타는 열정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잿더미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박종현 회장이 이끄는 한국문화신학회와 변선환 아키브의 신학적 작업, 《제3세대》의 신학활동 등이 한국 신학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기대를 가져본다.

한국 신학의 비극적 사건인 서남동의 해임과 변선환의 출교사태 이후에 창조적인 목소리가 그다지 들리지 않는다. 변찬린은 서남동의 부고를 듣고 서가에 꽂힌 『전환시대의 신학』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국 신학의 큰 별이 떨어짐을 안타까워했다. 비운의 신학자 변선환의 말은 아직도 갈 길이 먼 한국 신학에 던진 큰 외침으로 다가온다.

서구신학은 끝까지 특수적, 지역적인 것이지 에큐메니칼하고 세계적 보편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서구신학이 에큐메니칼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질적 타자로서의 비서구적인 것, 아시아적인 것에 의하여 매개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한국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한국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에 성실하게 될 때,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토착화에 성공하게 될 때, 한국 교회가 질적으로 성숙해질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세계 교회 운동에 크게 공헌하게 될 것이다.(7)

동이족의 종교적 원형인 한밝사상, 풍류사상, 그리고 서세동점의 시기에 토착화된 근대의 재발견인 동학을 비롯하여 한국 신종교 사상과 유영모, 김정설(범부), 변찬린 등 창조적인 한국적 영성은 세계 종교계의 문제의식을 뛰어넘는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한국적 영성을 새 문명의 사유체계의 원천으로 만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8)

필자는 한국 종교신학의 세계화 프로젝트로 종교(신학)계에 새롭게 풍류학파를 결성할 것을 제안한다. 풍류(=僊)는 한국의 독창적인 존재론, 인식론, 실천론을 담보하는 종교적 기제이며, 지구촌 사유를 아우르고 대안을 가진 독창적이고 보편적인 문화적 기호이다.(9) 이 프로젝트에는 신학자, 역사학자, 철학자, 유학자, 불교학자, 종교학자, 과학자, 천문학자, 이론물리학자 등 다양한 전공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과제선정부터 집단지성의 힘이 응집되어야 한다. ‘동종교배는 열성인자를 만들어내고, 이종교배는 우성인자를 만들어낸다’는 유전학의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현재의 학문의 방향은 다학제적이며 다종교적이며 간텍스트적이다.

뜻 있은 지성의 자발적인 동참을 촉구하는 바이다.

미주

(미주 1) 유영모, 『다석강의』 (서울: 현암사, 2006), 136.
(미주 2) 길희성, 「한국 개신교 토착신학의 전개와 문제점들」, 『종교·신학연구』(1), 1988. 352-354.
(미주 3) 다석학회, 『다석강의』, 현암사, 2006, 672.
(미주 4) 앞의 책, 672-673.
(미주 5) 이길용, 「기독교에서 바라본 동학」, 『대화를 넘어 서로 배움으로』, 맑은 울림, 2004, 473-504; 같은 저자, 「수양론적 시각에서 바라본 동학의 신이해」, 『동서 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 모시는 사람들, 2007. 223-254.
(미주 6) 박재순,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 한울아카데미, 2013, 15-21.
(미주 7) 변선환 아키브,  『한국적 신학의 모색(변선환 전집 3)』, 한국신학연구소, 1997, 278.
(미주 8) 변선환 아키브, 동서종교신학연구소, 『동서 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 모시는 사람들, 2007.
(미주 9) 이호재, 『포스트종교운동』, 문사철, 2018, 54-76.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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