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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골을 가르고 천둥 번개가 지나갔다

기사승인 2020.04.14  17: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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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구도자 다석 유영모와 빛의 전도자 한밝 변찬린(2)

다석은 1956년 11월 15일 강의에서 빛깔 세계에서 ‘빛 맛을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했다’고 말하며 빛 너머의 거룩한 밤을 사모하며 ‘빛의 구도자’로서 구도의 길을 갔다. 그럼 빛의 전도자로서 한밝은 구도의 길에서 어떤 행적을 남겼을까?

한밝은 그의 주저인 『성경의 원리』 4부작의 머릿글 마다 ‘번개와 피와 아픔(과 고독)’으로 저술했다고 고백하는 이 말은 그의 삶을 요약한다. 한밝은 ‘번개’가 번쩍하며 머릿골이 열리며 천둥 번개가 지나가는 종교체험을 한다. 번개가 머릿골을 쪼개는 찰나의 순간을 통해 영원과 같은 종교체험을 한다. 스스로 ‘산 송장’이라할 만큼 육신의 아픔으로 피골은 상접한 몸으로 사인이 폐결핵일 만큼 피를 토하는 일상에서도 눈의 광채에는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담은 채 대화할 상대가 없는 절대 고독의 삶을 살며 구도자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일상의 죽음과 더불어 산 한밝은 그의 호가 말하듯이 “눈부신 대낮”, “환한 대낮”, “솟는 해” 등을 메타포로 온 우주를 광명으로 가득 찬 진리의 세계를 선포하고 전도하였다. 진리의 나라인 빛 세계는 음부에서 죽은 자의 영혼이 ‘죽은 자의 하나님’과 사는 것이 아니라 빛 인간인 발광체로 거듭난 인간이 ‘산 자의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생명의 세계이다.

한밝은 “성경 속에 은폐된 참된 도리는 오직 하나 부활의 진리”라고 선언하며, 맹신적 부활신앙과 신화적 부활신앙을 비판하며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거듭난 발광체만이 빛 세계인 하늘나라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下)』(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541-542

선맥(仙脈)을 체험한 모세의 빛나는 얼굴

죽은 자들은 달같은 암체(暗體)이지만 산 자는 해 같은 발광체로 변화받는다.(중략) 모세도 시내산에서 발광체의 체험을 하였고 예수도 변화산에서 발광체의 영험을 하였다. 우리는 호지 않은 진리의 옷을 입고 찬란히 빛날 부활의 날을 기다리자. 예수가 재림하실 때 우리들은 발광체가 되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上)』(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72.

한밝은 “성경은 선(僊)의 문서”이며 “선(僊) 즉 풍류”라고 하면서 에녹과 엘리야의 변화의 도맥(道脈), 그리고 모세와 예수의 부활의 도맥을 풍류인 선맥과 이해지평에서 융합시켰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부활의 도맥을 계승한 모세와 예수는 빛 체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구약에서 선맥(仙脈)을 체험한 첫 성서적 인물로 모세가 등장한다. 모세는 구약 최대의 예언자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해방자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시내산을 네 차례나 오른다. 1차 입산 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2차 입산 때는 하나님이 준 십계명을 모세가 돌에 기록하고, 이를 이스라엘 민족이 동물의 피로 언약한다. 3차 입산 때는 하나님이 직접 돌에 쓴 십계명이 쓰인 석판을 들고 하산한 모세가 아론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야곱 족속이 범죄를 하는 광경을 보고 석판을 깨뜨린다. 4차 입산을 통해 다시 십계명을 받고 모세는 광채나는 얼굴로 하산한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다는 것은 변화체의 진리, 즉 선화(僊化)의 도리를 경험한 상징을 나타낸다. 성서에서 해와 같은 빛은 부활의 체험을 나타내는 표징적 기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대 예언자인 모세의 무덤을 알지 못하고(신 34 : 5-6), 모세의 시체를 두고 미가엘 천사와 마귀가 다툼을 벌이는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유 1:9). 더구나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논의할 때 변화의 엘리야와 부활의 모세가 나타난 사건(눅 9: 30-33)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변찬린은 모세가 빛의 체험을 통해 부활하였다는 해석을 통해 성서가 제기한 문제를 성서에서 답을 찾아 일관되게 해석하고 있다.(미주 1) 예수가 빈 무덤을 남겨두고 부활했듯이, 모세는 무덤을 찾지 못한다는 암유적 표현을 통해 구약의 모세와 신약의 예수가 부활하였음을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선화(仙化)를 경험한 후 천의무봉을 입은 예수의 사건

모세의 부활 사건이 감추어진 사건이라면 예수는 부활의 주인공이다. 예수는 버림받은 민중과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삶을 살았으며, 밤이면 남몰래 기도와 구도 생활을 한다. 구도의 정점에서 예수는 용모가 변형(μετεμορφώ, transfigured, 마 17:2, 막 9:2)하고 변화(ἕτερον, changed, 눅 9:29)되고 옷이 빛과 같이 광채가 나는 변화산 체험을 편집자의 관점에 따라 유비적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듯이 예수의 얼굴도 해와 같이 빛이 나고 옷이 하얗게 광채가 난다. 이런 종교적 현상은 예수가 죽음의 실존인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구도의 정상, 기도의 정상에서 변화의 신비를 체험한 것이다.

예수의 용모가 ‘변형’과 ‘변화’되었다는 논점은 기회를 보아 상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과연 옷이 해 같이 빛나고 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옷은 로마 군병에 의해 찢겨지는 겉옷과 “속옷은 위에서 아래까지 혼솔 없이 통으로 짠 것”(공동번역)을 입고 있었다. 속에 입었던 통으로 짠 옷은 선가적 용어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다. 천의무봉은 말 그대로 하늘의 옷(天衣)은 매듭이 없다(無縫)는 것이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天衣無縫)이라.(요 19:23)

우리의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빛으로 짠 옷이 천의무봉이라고 할 수 없을까? 불트만의 ‘비신화론’은 이런 해석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통으로 짠 옷’은 미래 공상영화에서나 나올 법 하지만 현대과학으로는 제작할 수 없는 옷이다.(미주 2) ‘통으로 짠 옷’을 ‘천의무봉’이라 함은 ‘끼워맞추기’식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이런 전통적인 종교적 언어를 사용한 해석을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혼합주의’라고 수용하지 못하고, 성육신한 하나님 아들만이 입는 옷이라고 우상화하는 것이 바른 독법일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천의무봉’이라는 옷의 속성은 선가적 용어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변찬린은 이를 적확하게 해석학적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만일 이런 해석학적 공간마저 허용하지 않는다면 편집 당시의 텍스트와 현대인과 소통하는 사유적 기술인 해석학은 설 자리조차 없을 것이다.

한밝은 전통적인 선가의 개념을 복고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선맥을 복원하여 역사시대의 종교적 인간과 영성시대의 새로운 인간존재를 유비적 존재라고 빛의 전도자로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낸다. 빛 세계에 갈 수 있는 발광체는 부활체이자 변화체로서 창조적 진화의 궁극적 인간이다.(3) 한밝은 동이족의 선맥으로 희랍적 이원화로 영육이 분열되어 ‘죽은 후 영혼이 하늘나라 간다“는 성서해석의 오류를 지적하며, 발광체가 존재론적 탈바꿈을 하여 풍류체가 되어야 하늘나라인 빛 세계에 갈 수 있다고 명확하게 밝힌다. 더 나아가 한밝은 『성경의 원리(上)』 2장 도맥론에서 역사적 “인간의 사주팔자가 사망”이라는 것은 타락한 인간실존의 피안 감성의 사유의 한계에 불과하며, 변화와 부활의 선맥이 성서의 본래의 도맥이라는 것을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석은 자신을 “얌전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독생자인 예수를 ‘한 나신 아들’로 부르기를 제안하며 성인(成人)이라도 얼나로 거듭나지 못한 ‘못난 이’는 거듭나야 함을 암유적으로 존재론적 탈바꿈을 언급하고 있다.(4)

빛은 자기희생과 십자가 고난의 상징

빛깔 세계에서 빛 세계로 온전히 가는 길은 발광체라는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이 빛 세계로 가는 충분조건이라면,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의 제자인 빛의 자녀들은 자기희생과 고난이라는 신앙생활로 빛깔 세계의 허상을 몰아내고 빛 세계인 진리의 세계를 밝히는 필요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물리적 우주는 빛 에너지를 사용할수록 엔트로피가 끊임없이 증가하여 파멸할 수밖에 없다.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근본 원인은 자본의 축적, 권력욕의 과시, 명예욕의 탐욕을 가진 종교적 인간이 빛깔 세계의 허세에 기인한다. 빛깔 세계는 타락과 무명으로 형성된 이원론의 존재기반과 가치체계에 기반을 둔 탐진치의 세계에 불과하다.

그럼 파멸할 수밖에 없는 물리 우주에서 죽음의 한계에 봉착한 종교적 인간은 빛깔 세계에서 어떻게 참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가? 이는 빛깔 세계를 참 세계로 인식하는 분별적 사고의 오류를 탈피하여 빛 세계를 직시하여야 한다. 빛 세계는 예수와 같이 발광체로 존재탈바꿈을 한 존재만이 갈 수 있는 진리의 세계이다. 죽은 후에 영혼이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은 성서의 진리가 아닌 희랍적 해석의 오류이다. ‘본태양’은 『천부경』에 출전을 둔 종교적 언어로 빛 세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下)』(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560.

예수가 세상의 참 빛으로 왔듯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의 제자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예수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성인은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아 고행을 한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이다. 시대의 빛으로 온 성인들은 왜 자발적인 고난과 자기희생의 길을 걸을까?

빛은 선맥의 체험을 발광체의 표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희생과 고난을 통해 빛의 자녀로 거듭남을 표현하는 상징어이기도 하다. 태양이 자기의 생명을 연소시키면서 빛을 발하듯이 빛의 자녀들은 처절한 자기희생과 고난의 구도 과정에서만 빛을 체험할 수 있다. 빛은 십자가 고난의 월계관이다. 변찬린은 1974년 9월 『씨알의 소리』에 진주가 모래를 삼켜 자기 살의 아픔을 견디면서 결정체를 만들고, 탄소가 고온과 고압의 고난을 견뎌 다이아몬드라는 발광체를 만들듯이 종교적 인간도 고난을 통해서만 인격의 질적 변화가 수반된다고 말한다.

▲ 「씨알의 소리」

혹자는 변찬린이 선맥과 변화와 부활의 도맥을 풍류적 심성으로 융합시켰다는 언설에 치중하여 역사적 의식이 결핍된 탁상머리의 구도자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변찬린은 영성우주와 시공우주의 경계인으로서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빛깔 세계의 허상을 폭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성장신학과 기복신앙과 자본신앙으로 무장한 한국 교회의 대형화 추세는 성서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빛깔 세계의 종교적 현상이다. 자기희생과 고난을 전제하지 않는 종교적 신앙은 세상권력의 탐욕, 자본신앙의 추구, 종교적인 허위의 가치체계로 이루어진 빛깔 종교의 허상에  불과하다. 태양으로 상징되는 부패 권력의 독재자, 태양과 별과 달과 만들어진 폭력 국가, 현대인의 우상으로 군림하는 허장성세의 스타, 독재 권력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장군의 별 등 빛깔 세계를 떠받치는 일체의 낡은 가치와 이데올로기를 청산해야 빛 세계가 도래한다는 선지자적 목소리를 낸다.

세상 나라의 통치자들과 군왕들은 자기들이 만든 권력 구조가 만세 반석 위에 세워졌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 낡은 사상과 이념과 도덕과 권력과 경제를 밑바닥으로부터 흔들어 모든 구조물을 무너뜨리는 큰 지진이 일어날 것이다. 낡은 하늘과 낡은 땅을 청산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 <개벽의 지진>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지구 물리학적인 지진과 더불어 정신 혁명, 심령 개조의 심진(心震)이 일어날 것이다.
- 변찬린, 『요한계시록 신해』(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112.

빛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친구(요 15:14-15)로 삼아 그와 같이 무소유를 지향하고, 사회적 약자의 빛이 되는 겸손의 자리에서 발광체로 탈바꿈한 완전한 인간으로서 빛 세계로 가야 한다. 빛의 자녀는 역사적 성인과 같이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는 보살심으로 고행하며 시대의 빛으로 빛깔 세계의 허상을 폭로하는 구도자로서 역사광야에서 실천해야 한다. 고난과 아픔은 빛의 자녀가 앓는 시대의 아픔이고 이런 간절한 구도만이 궁극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영성 에너지이다.

한밝은 요한계시록 제4장 5절의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을 메타포로 하여 인간을 창조한 말씀의 근본인 부활한 영생의 도맥을 발굴한 빛의 전도자로서 생명의 빛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역사광야에서 자기희생과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의 빛이 되어 궁극적으로 창조적 진화의 완성체로 변화하기 위해 ‘피와 아픔과 고독’의 구도해야 함을 그의 종교적 삶에서 증언하고 있다.

다음 회에는 유영모의 종교적 정체성에 대해 제자 박영호와의 최근 인터뷰를 포함해 기독교의 사유체계를 초월한 한국의 종교적 영성인 다석과 한밝의 종교사상이 세계 종교문화의 지평에서 시사하는 점을 중심으로 조망해 보려고 한다.

미주

(미주 1) 변찬린, 『성경의 원리(中)』(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311-318; 같은 저자, 『성경의 원리(上)』(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67-70.
(미주 2) 변찬린, 『성경의 원리(下)』(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541-542.
(미주 3) 이호재, 「변찬린의 풍류사상에 대한 종교적 이해 = 풍류도맥론(風流道脈論)의 영성(靈聖)담론의 가능성을 위한 시론」, 『한국종교』45, 2019, 325-355.
(미주 4) 대표적으로 박영호 엮음, 『多夕 柳永模 어록』(서울: 두레, 2002), 132, 136, 282; 류영모, 『다석 마지막 강의』(서울: 교양인, 2010), 459-469를 참고할 것.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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