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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객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기사승인 2020.10.27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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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道)의 나그네

풍류객은 동방의 구도자이자 사명자이다

변찬린의 풍류객이 출전하는 글이다. 원문에는 없지만 〈풍류가〉라고 명명해 보았다.

풍류가(風流歌)

나는 바람이 되고 싶읍니다.
나는 마파람, 새바람 하늬바람이 되게 하십시오
풍류(風流)의 멋장이가 되어 바람을 피우고 싶습니다.
나는 돌승(僧)이 아닙니다
나는 종교꾼이 아닙니다
절로 부는 바람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신령한 바람이 
되게 하십시오.
바이 머므른 바 없는 마음을 내는 풍류체(風流體)가 되어 피리구멍으로 
나들이하는 가락이 되게 하십시요.
저 석두(石頭)들이 굳게 고집한들 그 몸에 바늘귀만한 구멍이 없겠읍니까?
그 구멍으로 흐르는 바람이 되여 피리소리를 내겠읍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피리를 부는 무애한 풍류객(風流客)이 되게 하십시오.

어느 곳에 있든지 심금(心琴)을 타는 한량(閑良)이 되게 하십시요.
천하(天下)는 신비한 교향악단 입니다
인심(人心)은 이상한 악기입니다
몸마다 뚫린 구멍 마음마다 메은 거문고 줄
탁약(橐籥; 필자주, 풀무와 피리, 노자 제 5장)이 풍겨 내는 바람이 되어
신비한 악기를 연주하게 하십시오.
고요에 자리하신 고요시여.
숨결들이 뿜어내는 만유(萬有)의 합창과 교향악을 들으십시오.
암혈(岩血)로 부터 빈문(牝門)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나들이하며 노래하며 풍류체(風流體)가 되여 
천하(天下)를 주행(周行)하다가 어느날 드디어 고요에 도달하게 하십시오.(미주 1)

‘풍류’는 풍류선맥에서 발현되는 구도자의 통칭이다. 현재 학계에는 통용하는 ‘풍류’의 개념은 첫 출전인 『난랑비서』의 어원과는 많이 다르다. 이는 풍류객도 마찬가지이다. 풍류객은 조선후기에 중인이 풍류방에 모여 풍류를 즐기던 음악 애호가를 칭한다. 또한 1999년에 신은경이 한·중·일 삼국의 풍류에 대해 종합적으로 비교·연구한 『풍류(동아시아 미학의 근원)』도 종교적 언어로서 어원에 충실한 ‘풍류’보다는 예술분야에 집중되어 조명하여 어원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변찬린은 “풍교인 풍류도(風流道)도 타락하여 풍월도(風月道)가 되었고 술먹고 춤추는 행위를 풍류로 착각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술 잘 먹고 노래 잘 부르는 한량들을 풍류객이라 부르는 것도 풍류도가 자취를 감춘 이후 속화된 현상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변찬린은 ‘풍류’, ‘풍류체’, ‘풍류심’, ‘풍류객’ 등의 용어를 그 원의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소통이 가능한 사회적 언어로 재탄생시켜 풍류담론으로 새롭게 제안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풍류는 선맥에서 발현하는 “풍류체=선(僊/仙)”이라는 궁극적 인간을 말하고, 풍류심은 당대의 다종교적 언어와 간텍스트적 해석과 다학제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인식체계이자 실천체계라고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풍류객은 누구를 말하며, 그 종교적 속성은 무엇인가?

풍류객(風流客)은 문자그대로 ‘바람과 같이 흐르는 나그네’이다. 풍류심을 가진 도의 나그네이다. 풍류객은 도(道)를 찾아 벌레(辵)가 머물지 않고 머리(首)를 찾아가듯. 법(法)를 찾아 물(水)처럼 흘러가는(去) 구도자이다. 불교적 언어로 행운유수(行雲流水)하는 행각승이자, 성서적 언어로 ‘나그네’라고 할 수도 있다.

▲ 구름과 물처럼: 북한강 해 뜰 무렵(2020.10.25.) ⓒ필자

풍류객의 첫 출전인 위의 〈풍류가(風流歌)〉는 변찬린이 한가로이 읊조리는 노래가 아니다.  이해해 주는 도반(道伴)조차 한 명도 없는 절대고독의 구도의 길에서 토하는 성난 파도이다. 우주의 중심이 구도자의 심연의 뿌리를 관통하며 일어났을 ‘번개와 피와 아픔과 고독’의 생채기를 극복하고 부르는 평온한 마음으로 잠자는 한국인의 풍류혼을 일깨우려는 미세하고 미묘한 고백의 언어이자 역설의 언어이자 구도자에게 주는 연서(戀書)이다.

풍류객은 자기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고 인식하는 상황에서 탄생한 축 시대의 종결과 새 축 시대를 연결하는 인간형이다. 변찬린의 언어맥락에 의하면 풍류객은 새 한밝이라도 할 수 있다. 새 밝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역사시대와 영성시대의 가교역할을 하는 ‘새(間, 사이) 빛’이다. 간단히 말해 동방의 구도자이자 사명자이다.(2)

역사적 자아를 가진 구도자로서 풍류객은 영성우주의 탄생시점부터 무수한 윤회 과정을 거친 현존이다. 풍류객은 “일체가 내 자아의 전개, 내 정신의 편력, 내 의지의 노래”라는 자각과  “전역사와 전생명과 전의식의 총화”라는 인류 사유의 최전선에서 ‘나와 한국’, ‘나와 세계’, ‘나와 우주’ 더 나아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와 영성시대의 문명사적인 거대담론을 사유체계로 삼아 사색하고 명상하며, 기도하고 정좌하는 동방의 구도자이다. 풍류객은 우주를 품고 역사의 가을에 역사광야를 갈무리하는 ‘하늘님’의 도반이자 사명자이다.

촉루와 백골로 다져진 전역사(全歷史) 위에 정좌(靜坐)한다.
역사의 지층에 반짝이는 보배로운 화석(化石)과 유산이여
네안델탈인과 북경인과 크레마뇽인의 화석이여
아담과 요순(堯舜)과 단군의 숨결이여.
아슈바고오샤와 나아가라주나와 원효(元曉)의 믿음이여
장주(莊周)와 한산(寒山)과 도연명(陶淵明)의 노래여
백결(百結)과 처용(處容)과 온달(溫達)의 멋이여
세종(世宗)과 율곡(栗谷)과 충무공(忠武公)의 맥박이여
스피노자와 칸트와 쇼펜하우엘의 고독이여.
니체와 키엘케골과 파스칼의 사색이여
프라이드와 맑스와 말쿠제의 철학이여
볼르흐와 샤르댕과 제랄드허드의 미래(未來)여 
히포클라데스와 장중경(張仲景)과 이제마(이제마(李濟馬)의 인술(仁術)이여
코페르닉스와 뉴톤과 아인슈타인의 수학이여.
타골과 간디와 라다크리슈난의 범아(梵我)여
이차돈(異次頓)과 최해월(崔海月)과 김대건(金大建)의 피여.
본헤퍼와 슈바이쳐와 요한 23세의 기도여
단테와 섹스피어와 괴테의 시여
촉루(髑髏)의 산, 이성(理性)의 봉우리, 심정(心情)의 유곡(幽谷),
지성(知性)의 숲길, 의지(意志)의 바위, 배덕(背德)의 습지(濕地),
비하(卑下)의 유수(流水), 대도(大道)의 바다, 
피안을 노래하는 청조(靑鳥)여.
그 위에 찬란한 태양은 빛나고 신비한 달이 솟는 천지 사이에서
고인(古人)들의 은밀한 속삭임과 엄숙한 유언을 듣는다.
잠시후 러셀과 토인비와 발트(*필자주: 칼 바르트)와 싸르트르와 
틸리히와 함석헌(咸錫憲)도 촉루의 산(山)으로 돌아가
화석(化石)으로 묻히고 명증(明證)한 혼(魂)들은 대지(大地)의 비옥(肥沃)한
거름이 되고 그 정신은 조촐이 증발하여 운행우시(雲行雨施)하리라.
아! 비수(悲愁)의 가을은 저물어 가는가
야훼신(神)이 객혈(喀血)한 저 찬란한 신약(新約)의 일모(日暮)아래
낡은 시대의 막(幕)은 박쥐의 나래처럼 이 심연(深淵)을 덮고
적막한 대지 위에 가랑잎 딩구는 추성(秋聲)이여.
습기 눅눅한 동굴과 청태(靑苔)낀 고목(古木)밑에 앉아 
염염(炎炎)한 구도자들이 한기(寒氣)에 떠는 계절.
고금에 왕래한 선인(先人)들의 심정과 영원을 향해
기도한 경건한 심정을 우러러 내 겸손히 옷깃을 여미노라.
비탈진 낙목(落木)의 오솔길을 더듬으면서 
내 대도(大道)의 오지(奧地)를 향해 피묻은 의지로 구도한다
저 불인(不仁)한 하늘도 촉루의 산, 해골의 언덕을 보며
눈물 글썽하리니(3)

풍류객은 그리스도교, 불교 등 특정 종교에 주형이 찍힌 종파종교인, 철학자 등 특정 학파의 주구가 되어 버린 전문지식인, 특정 정치이데올로기와 정치인연의 울타리에 갇힌 향원정치인이 아니다. 교언영색의 정치적 선전과 현란한 종교적 구호에 민중의 종교적 심성이 황폐해 질 때 오로지 ‘묵여뢰’의 큰 소리와 ‘위무위(爲無爲)’의 큰 행동으로 인간의 ‘육비(肉碑)’와 ‘골각(骨角)’에 새겨진 창조적 심성을 일깨워 날개돋힌 자아로 비상시키는 풍류혁명가이다.

풍류정신을 내장한 한국의 위대한 혼은 실천 없는 깨달음, 지식이 없는 지혜, 행동 없는 신앙, 자율하지 못하는 방종과는 차원이 다른 창조적 영성을 발현하여야 한다. 이 영성적 에너지를 이벤트성 종교 행사로 자신의 사명을 낭비하거나 선동성 종교적 구호로 민중을 현혹하여서는 아니되며, 직업종교인에 의해 포박당하여 질식하고 있는 성인(교주)을 해방시키는 종교개혁가로서의 역사적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절대 풍류객은 타인의 ‘흑점’을 올무로 삼지 않고 사랑으로 포용하고, 자신의 ‘흑점’에 얽매여 ‘자포자기’하여 창조되고 있는 우주의 역사에 동참하지 못하는 우물쭈물을 벗어던지고 새 축 시대에 떠오르는 ‘동방의 빛’을 맞이해야 한다. 오로지 현존하는 나는 동방의 새로운 빛세계로 재창조될 뿐이다. 자신을 얽매고 있는 일체의 명예와 권력은 비상하는 풍류혼의 군더더기임을 직시하고 민중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 창조적 교양인으로서 거듭나야 한다. 종파종교의 그물에 갇힌 주구, 학파의 노예, 주의의 괴뢰라는 가면을 쓴 과거의 배우(俳優)의 탈을 벗어던지고 하늘밖의 하늘을 비상하다 역사의 광장에서 땀흘리는 참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변찬린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의 주형(鑄型)에 찍히고 교조(敎條)의 성(城)에 유폐당하고 
관념의 노예로 전락되고 변증(辯證)의 약장사로 장광설(長廣舌)하면 
그 혼은 죽은 반석이 되어 모세의 지팡이로 때려도 생수(生水)를 낼 수 없다.
새 ᄇᆞᆰ이여
그대는 날개 돋친 비존(飛存)임을 자각하라.
한 종교(宗敎)의 죄인(罪人), 한 사상(思想)의 괴뢰가 되지말라.
한 성인(聖人)의 고제(高弟), 한 주의(主義)의 주구가 되지말라.
한 당(黨)의 대변자, 한 이념(理念)의 기수(旗手)가 되지말라.
새 시대의 당당한 아들들은 대식견(大識見)의 날개로 비상하며
지혜와 도(道)의 산맥을 조감(鳥瞰)하고 지인(至人)의 도량으로
망망한 해원(海原)에 앉아서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우신(又新)한 일륜(日輪)을 본다.
대도(大道)는 대인(大人)의 길
소지(小知)와 소성(小成)과 소년(小年)과 소인배(小人輩)들은 
새 날의 잔치에 참여 할 수 없다
위조한 초대장을 들고 참여한다 하여도 대언(大言)을 알아듣지 못하여
스스로 물러 가리라.
새 밝이여
내 군더더기 말로 다시 이르노라.
한 우물안의 개구리, 한 계절의 쓰르라미가 되지말라
아침에 돋는 버섯,여름밤에 죽은 하루살이가 되지말라.
썩은 웅덩이의 미꾸라지는 북해(北海)에 잠긴 곤(鯤)의 꿈을 모르고
연못속의 이무기는 대해(大海)에 숨은 잠용(潛龍)의 뜻을 모른다.
지난 날 너와 나도 쑥대 무성한 폐원(廢園)에 앉아 나리친 소조(小鳥)였구나.
허나 이제는 역사의 성인(成人)
성인(聖人)의 알을 깨고 대곤륜(大崑崙) 을 덮을 대붕(大鵬)이 되어
저 가 없는 우주를 소요 하잤구나.(4)

풍류객은 대무(大巫)로서 온 우주를 살려내야 한다

▲ 한밝 변찬린의 종교수상록: 1988 유고출간

대무로서의 풍류객은 축 시대의 사유체계를 포월하고 해원시켜 새 축 시대에 상생시키는 한국의 창조적 영성이다. 한국인이 겪은 역사적 고난과 고통은 십자가의 상흔이고 보살의 불퇴전의 구도의 아픔이었다. 변찬린은 이렇게 말한다. “풍류의 하늘을 개천하여 대도를 이룬 단군의 후손들이 이 날까지 무교(巫敎)의 옷을 입고 온갖 외래종교의 하수구 노릇을 했고 바다처럼 낮은 자리에 처하여 온간 고난과 시련을 반만년동안 받아왔다. 그러나 낮은 자리에 처한 하수구와 바다가 모든 강물을 포용하듯 고난 속에서 연단된 백의민족이 선(僊)의 대도로서 인류를 구원할 빛을 발할 것이다.”라고 강조한다.(5)

풍류객으로서 한국인은 이데올로기의 분열과 차별과 투쟁의 낡은 문명을 화쟁과 해원의 문명‘굿’을 통해 새 축 시대를 개명하는 ‘동방의 빛’으로서 ‘풍류선맥’을 온 세계에 펼쳐 공간적인 동서(東西)와 시간적인 고금(古今)을 조화시키는 세계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독자들은 ‘나(I)’를 자신으로 이입하여 읽기를 바란다.

나는 대무(大巫)입니다.
무(巫)의 식성(食性)으로 성인(聖人)을 잡아먹는 대무(大巫)입니다
조므래기 샤아만이 아닌, 뜨내기 무당이 아닌, 신접(神接)한 새탄이가 아닌 
신시(神市)의 한사람 대무(大巫)입니다.
이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입니다
풍류체(風流體)가 되어 종교 아비를 삼키고 한국 심성(心性)의 오지(奧地)를 
개발하여 이 시대의 고뇌를 초극하고 인류의 고난을 극복하고
역사의 물음에 대답하게 하십시요.
세계사(世界史)의 네거리에서 살(煞)풀이 굿을 하지 않으면
전쟁(戰爭)은 끝나지 않습니다
사상(思想)의 골고다에서 해원(解寃)굿을 하지 않으면 이 땅 위에
평화(平和)는 없읍니다
살인(殺人)한 형제들의 속죄 굿을 하지 않으면 이해(理解)와 화동(和同)은
결코 없읍니다.
저 허공에 전운(戰雲)처럼 엉킨 원귀(怨鬼)와 무주고혼(無主孤魂)들의 한(恨)을
풀어줄 자 그 누구입니까?
백악관(白堊館)에서 크렘린궁(宮)에서 자금성(紫禁城)에서 북악산(北岳山)에서
모란봉(峰)에서 부란텐부르크문(門)에서 예루살렘에서 베트남에서 악령(惡灵)과 
사신(邪神)을 축출(逐出)할 자 그 누구입니까?
유일신(唯一神) 야웨와 유일신(唯一神) 알라의 불화(不和)를 제거하고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살(煞)을 풀 자 그 누구입니까?
힌두교와 모스렘 사이에 살기(殺氣)를 제거할 자 그 누구입니까?
자본주의(資本主義)와 공산주의 사이에 엉킨 증오를 없이할 자 그 누구입니까?
대무(大巫)는 새 날을 개명(開明)하는 한국인(韓國人)의 사명입니다.
화쟁(和諍)은 한국혼(韓國魂)의 저력(底力)입니다
내 조국(祖國)은 더러운 세계사(世界史)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하여 보혈(寶血)을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뜨거운 눈물과 깊은 신음과 임리((淋漓)하는 피로서 무(巫)의 굿을 하여
이 땅에 평화(平和)의 성대(聖代)를 개천(開天)하고 자유(自由)의 성일(聖日)을
개명(開明)하겠습니다.(미주 6)

풍류객은 장자적 상징(머리, 인격성전, 풍류심, 동방 등등)의 구현자이며 차자적 상징(지체, 건물성전, 종파심, 서방 등등)을 포용하는 대무(大巫)이다. 풍류담론은 새 축 시대의 사유체계와 실천체계를 새롭게 써갈 수 있는 풍류신화로서 자리매김하면서 풍류적 세계관을 펼쳐가는 새 문명의 담론이다. 그 중심에 ‘풍류선맥정통론’이 있다.

미주

(미주 1) 변찬린, 『씨알의 소리』(8), 1978), 61-62.; 변찬린, 『禪, 그 밭에서 주은 이삭들』, 가나안출판사, 1988, 138-139.
(미주 2)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새 밝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다음을 참고할 것: 이호재, 『한밝 변찬린(한국종교사상가)』, 문사철, 2017, 394-429.
(미주 3) 변찬린, 위의 책, 41-43.
(미주 4) 변찬린, 위의 책, 24-25.
(미주 5) 변찬린, 「僊(仙)攷」, 『甑山思想硏究』1979(5), 200.
(미주 6) 변찬린, 위의 글, 65-66.; 변찬린, 위의 책, 1988, 138-139.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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