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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축 시대의 장을 연 한밝 변찬린

기사승인 2020.01.21  17: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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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고운,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몰랐기에 홀대하고 무시하고 왜곡하며 시선을 주지 않았던 변찬린의 생애와 삶을 잘 알던 어느 지인은 후대 역사가 이렇게 평가할 거라고 말한다.

황무지와 같은 세계 심전에 ‘성誠의 종자種子’를 꽃피운 구도자 변찬린
그리스도교의 원효 그리스도교의 고운 최치원, 그리스도교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역사적 학맥을 계승하여 경전해석의 새 지평을 열어제친 종교 연구가 변찬린
번개와 피와 아픔과 눈물과 고독으로 쓴 『성경의 원리』가 낡은 종교의 그물에서 벗어나 건물성전이 아닌 인격성전으로 거듭난 영의 형제들이 새 종교의 씨앗이 되기를 외친 종교 개혁가 변찬린
세계 종교를 회통시켜 종교혁신과 인간생활의 변혁을 부르짖은 ‘새 교회’ 창시자 변찬린
새 문명의 자리에서 낡은 문명을 비판하며 역사 시대와 영성(靈聖) 시대의 가교역할을 자임한 문명사가 한밝 변찬린

카렌 암스트롱은 아직도 현대인은 축 시대 성인의 사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Beginning of Our Religious Traditions』라고 현대인의 사유체계의 한계에 날카로운 종교 비평을 한다. 이런 서구 지성의 문명비평은 2010년 『축의 시대(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라고 번역되어 국내에도 꽤 많은 독자층을 가졌다. 또한 레이몬드 찰스 제너Raymond Charles Jenner 는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의 여러 종교들이 서로 직접 대면하게 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야흐로 지구인은 지구촌 사회에 공존하며 종교의 다양함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자유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종교적 위상은 특별하다. 한국은 유교, 불교, 도교, 무교 등이 공존한 종교문화가 축적되어온 종교적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해방 후 유교와 불교 등 전통 종교가 근대종교로 재편되며, 천도교와 증산교, 원불교 등 신종교가 외래종교와 경쟁하며 ‘민족종교’로 자리매김하는 시기이다.

또한 한국 전쟁 후 사회의 아노미적 상황에서 통일교와 전도관 등 그리스도교 신종교의 교세 확장으로 그리스도교계와 반목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편 천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종교간의 대화에 허용하였으며 개신교에서는 교의학 모형과 토착화 신학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던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 지성인 사회에서는 유영모의 영성적 구도정신이 새 시대의 새 종교를 외치는 함석헌에 의해 한국 사회의 조명탄 역할을 하던 시기이다.

<30대 초반의 변찬린>

재건교회(1934-1985)에 뿌리를 둔 장로교 계통의 신앙으로 종교세계에 입문한 변찬린은 한국 근·현대사의 종교적 사건과 인물들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은 역사적 종교인이다. 그만큼 그의 종교적 생애와 경험은 한국 근·현대의 종교적 지형이 형성되던 파란만장한 시기와 일치한다.

지구촌의 종교적 사유가 합류된 시기에 태어나 새 축의 시대를 조감하며 한국의 세계사적 사명을 자각하며 새로운 종교적 패러다임을 인류 사회에 제시하겠다는 뚜렷한 역사적 자의식과 종교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32세 때 호를 ‘ᄒᆞᆫᄇᆞᆰ’이라 하고 한국인의 원형적 종교적 심성을 가슴에 품고 종교적 삶을 산다.

변찬린은 1972년(38세)에 8월 『씨알의 소리』에 통일을 염원하는 ‘불이의 법문 –구도자 한밝에게-’이란 헌시를 게재하며 첫 사회적 발언을 한다. 당시는 구도의 길을 가던 그에게 함석헌이 서대문 종교친우회(퀘이커)의 별채에서 생활하도록 배려해 주던 시기였다.

그는 1975년(42세) 때 새 축 시대을 예감하며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사유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웅대한 꿈의 일단을 드러낸다. 변찬린은 당시 유영모, 함석헌, 배용덕 등과 교류하며, 새로운 시대에 새 종교라는 웅대한 꿈을 가지고 구도의 길을 간다. 축 시대의 성인과 한민족의 근대의 신종교의 창시자를 문명사적인 유비 관계에 놓고 한민족의 인류사적 운명을 예감한다.

인류의 종교는 〈통일과 조화〉라는 깊고 높은 마지막 과제를 안고 고난과 고뇌속에서 〈새 종교〉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당위성에 부딪치게 된다. 종교통일과 조화의 큰 사명은 늙고 늙은 기성종교인 기독교도 불교도 유교도 조로아스타교도 마호메트교도 할 수 없고 할 수 없고 전혀 새로운 판 밖에서 먹줄 밖에서 홀연히 출현하여야 한다. 이 사명을 타고난 백성이 세계사를 깊이 천착해 보고 세계지도를 놓고 깊이 사색해 보면 동방의 한 약소국가인 한국 민족이 담당하게 되는 깊은 자각에 우리는 부딪치게 된다. 야스파아스가 석가와 노자와 공자와 소크라테스와 조로아스타와 예수의 출생을 동시대적으로 조망하면서 인류정신의 화산시대라 본 것과 같이 한국 오천 년 역사 속에서도 이런 위대한 정신의 화산시대가 있었으니 곧 수운과 증산과 나철과 박중빈과 김일부의 출현이다.(1)

그는 주저인 『성경의 원리』(1979)에서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고운,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에게서 자신의 역사적 학맥을 계승한다는 자각을 하고 새로운 경전해석과 새 문명의 대안적 사유체계와 생활체계를 역사에 제시한다.

일찌기 유·불·도에 의해 윤간당한 한국인의 심성은 마지막 때를 당해 맑스교와 기독교의 꼬임을 받고 세계의 갈보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더럽혀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원효같은 위대한 화쟁혼이 있었고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도 풍류의 얼을 고이 간직한 고운이 있었고 썩은 선비들이 사색당쟁의 개판을 칠 때도 퇴계와 율곡과 같은 사상의 거봉들이 정신의 산맥을 융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고운,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은 없는가?(2)

그는 충분한 학문적 지식과 다양한 종교경험과 종교체험을 통해 지지(知止)의 자리에서 바울이 다메섹 신비 체험 후 배운 지식을 쓰레기처럼 버렸듯이 “서양 신학에 오염되지 않은 무지하고 염담(恬淡)한 마음으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비경(秘境)인 성경의 산으로 입산하였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의 사유의 중심에는 늘 우주에서 인간의 값어치, 세계사의 지평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사명을 온전히 밝히고 실천하는데 있다. 이처럼 그의 새로운 성경해석체계안에는 서구신학을 극복하고 한국의 종교적 심성으로 새로운 문명담론의 패러다임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필자는 ‘한밝 성경해석학’이라 부른다.

그의 구도적 생애는 스스로 밝히듯이 ‘번개와 피와 아픔과 눈물과 고독’이라고 고백한다.  ‘번개와 피’로 상징하는 그의 용맹정진하는 구도정신과는 달리 ‘끼니가 없어 책을 팔아서 배를 채웠다’는 표현으로 알 수 있듯이 그의 구도생활은 ‘피와 아픔과 눈물과 고독’이 일상의 동반자였다. 그의 처절한 구도의 정신은 현대에 성행하는 기복신앙과 순종신앙과 자본신앙에 안주하는 그리스도교인에게 종교적 구도의 참 모습을 반추하는 방향타 역할을 할 것이다. 만일 이런 변찬린의 삶이 개인적인 구도의 장에서 펼쳐진 것이라면 굳이 세상에 알려야 할 필요가 없다. 그는 명확히 한민족이 지닌 냉전 이데올로기의 끝자락에 처한 한국의 운명과 문명전환기의 처한 인류의 앞날을 냉철히 인식하고 한민족과 인류동포에게 ‘피묻은 각서’를 썼던 것이다.

번개와 피와 아픔과 눈물과 고독 속에서 쓴 『성경의 원리』 상·중·하 세 권은 두 사이비 종교 (기독교와 맑스교)의 괴뢰로 전락된 이 민족과 세계 앞에 제출한 나의 피 묻은 각서이다.(3)

 

<『성경의 원리』 4부작, 한국신학연구소 개정신판 출간>

그는 『성경의 원리』가 단순히 한 권의 책으로 남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나님과 남모르는 약속으로 사심없이 쓴  『성경의 원리』가 현실에서 ‘새 종교’의 모태로서 작동하기를 바랐다. 이 책을 바탕으로 변찬린이 전개한 ‘새 교회’운동은 새 문명을 구현하려는 종교적 몸짓이었다.  그의 종교운동은 교회매매와 세습, 양적 성장에 갈 길 잃은 한국 기독교와 교회에 ‘인간성전, 인격교회, 인격공동체’를 주창하며, 한국 종교,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가 가야 할 길을 예시하고 있다.

『성경의 원리』가 새 종교의 새벽을 예고하는 예루살렘의 홰쳐 우는 닭소리가 되길 바란다.(4)

변찬린은 내세울 만한 학연과 지연 등 세속의 인연과는 거리가 멀다. 뚜렷한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가진 적도 없다. 그 스스로가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살았기에 이름없는 자각자(自覺者)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도 있다. 자신의 생애를 누구에게 남겨둘 꿈조차 꾸지 않았다. 그의 온전한 생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그와 같이 수십 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와 지인도 그의 깊고 넓은 사상을 제대로 증언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오로지 삶의 중요한 순간 순간 하늘은 그의 족적을 파편처럼 남겨 놓았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 남겨진 파편을 에큐메니안에 적어보도록 한다.

오로지 철저하게 이름 없는 민중과 더불어 새 문명의 꿈을 꾸며 그의 신념체계인 『성경의 원리』와 그의 행동체계를 ‘새 교회’운동이 역사에서 종적을 감춘 지 34년의 세월이 흘렸다.

변찬린이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것은 『성경의 원리』이다. 서구 신학의 해석학적 한계를 인식하고 그는 그리스도교 전래 200년 동안 ‘성경의 복음을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으로 유·불·도의 종교전통의 바탕으로 간텍스트적 해석, 다학제적 방법을 통해 ’성서를 성서로 해석한다‘는 원칙아래 새로운 성경해석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의 저술은 절판되었고, 그의 종교적 행적이 망각되던 중 그의 사후 30여 년만에 동서양 사상을 회통하고 낡은 문명에 대한 새 문명의 대안적인 사유체계를 제시한 종교사상가로서 조명한 『한밝 변찬린(한국종교사상가)』(2017)가 출간되자 학계는 상당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김상일(전 한신대 교수)은 2017년 12월 18일 《교수신문》에 “한국의 선맥과 기독교의 부활사상을 상호 교차적이며, 융합적으로 이해한 것은 변찬린이 세계종교계에서 최초라고 평가된다”고 말하며 “‘새로운 문명의 대안적 사유’로 호명한 이유는?”라는 제명으로 변찬린의 종교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원로 신학자인 서창원(전 감신대 교수)은 2018년 3월 『기독교 사상』에 “경전해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도한 변찬린의 ‘한밝 성경해석학’”이란 제명으로 “동방종교 심성에 근거한 변찬린의 ‘한밝성경해석학’과 독자반응 비평이 새롭게 주목받아 독창적 해석학으로 자리잡기를 기대한다.”라고 변찬린의 성경해석체계를 긍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서평이 쏟아져 나왔다.

필자가 변찬린 연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중국 유학 시절에 중국종교 연구를 하던 시기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당시 중국 종교계는 법륜공 등과 같은 민간종교의 확산과 그리스도교 신자의 폭발적인 증가로 특히 그리스도교 문화가 통치질서에 위협요인이 되지 않도록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종교를 관리하려는 중국 공산당은 통치질서의 테두리에서 5대 공인종교(기독교, 천주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를 관리하면서 이 외의 종교는 ‘사교’와 ‘이단’, ‘사이비’종교 등의 굴레를 씌여 장기적으로 근절시키려 한다. 그런데 이런 방법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한국 종교계에서도 ‘정통’이 ‘이단’을 감별하여 배척하려는 종교현상과 내적 맥락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한국 그리스도교를 연구하면서 경험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지구촌의 종교적 사유가 합류된 시기에 태어나 새 축의 시대를 조감하며 동아시아의 종교전통을 공유하고,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그리스도교 토착화 문화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남북분단의 냉전 이데올로기가 작동되는 한국 종교인의 사유체계는 인류 문명의 새로운 좌표를 지시하는 방향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한국의 토착화 신학은 이웃나라인 중국 혹은 아시아 국가에 경험 자료로 제공할 수 있지는 않을까? 혹은 서구 그리스도교의 해석학적 패러다임에 새로운 출구를 줄 수 있는 유효한 종교적 자산이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 착안하여 필자는 대학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한국 종교 역사의 지평에서 동서 문명의 융합 시점인 근대 신종교 사상과 한국의 독창적 사상가와 토착화 신학자, 특히, 변찬린, 유영모(1890∼1981), 함석헌(1901-1989) 등에 새 문명의 대안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학문적 가설을 바탕으로 연구에 열중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 종교의 주체적 심성에서 서구 그리스도교가 한국 종교 문화에 어떻게 안착시킬 것인가를 세계사적 지평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에큐메니안의 장기 연재를 시작하면서 특정 개인의 복고풍의 노래를 회상하거나 변호인의 입장에 서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제도 종교에 몸담은 적이 없었던 필자는 종교학자의 입장에서 한국종교의 역사와 문화란 지평에서 변찬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성경해석을 주제별로 엮어가려고 한다. 변찬린은 한국 종교와 한국 그리스도교의 주요한 인물과 사건과 담론에서 핵심적인 발언을 하고 있기에 주제별 구성은 다른 인물과 사건과 대비되어 변찬린과의 동질성과 차별성, 변별성이 드러날 것이다.(5)

이 글이 변찬린의 종교 사상과  『성경의 원리』가 학계에서 공정한 평가를 받아 한국 종교문화와 한국 신학계가 더욱 풍성하고 자유로운 담론을 형성하여 세계적인 종교와 신학담론이 한국에서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강조하건데 우리의 역사적 종교의 축적된 전통과 그리스도교가 제대로 ‘합류’하다면 우리의 성경해석과 토착화 신학의 경험이 아시아 국가는 물론이고 서구 신학의 돌파구로서 ‘신학 한류’, ‘종교 한류’의 중심지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음 글은 “풍류신학에 ‘풍류’는 있는가? : 한국 토착화 신학의 성과와 한계”라는 주제로  학자들의 논쟁을 중심으로 변찬린의 입장을 들어보기로 한다. 

이호재는 중국사회과학원의 중국종교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현재 자하원 원장이다. 관심 영역은 동서양의 종교사상 연구를 바탕으로 '새 축 시대의 영성생활인(靈聖生活人)’이라는 생활 프로젝트를 세계화하는데 있다. 주요 저서로는  『포스트 종교운동』(2018), 『한밝 변찬린: 한국종교사상가』(2017), 『인생지도』(2017)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한국 재래종교의 ‘구원’관」, 「함석헌의 ‘새 종교’론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 「변찬린의 새 교회론 연구」 등 수십 편의 국내외 논문이 있다.

 

미주

(미주 1) 변찬린, 「甑山의 解寃思想」, 『甑山思想硏究』 1輯, 1975, 76. 
(미주 2)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한국신학연구소, 2019, 9-10.
(미주 3)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11.
(미주 4)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11.
(미주 5) 필자는 변찬린의 생애와 사상, 성서해석체계를 ‘한밝 성경해석학’이라고 명명한 『한밝 변찬린(한국종교사상가)』(2017)과 그의 ‘새 교회’운동을 연구한 『포스트 종교운동』(2018)을 저본으로 하여 독자들이 읽기 쉽게 재구성하였기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각주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출간 이후 상당한 분량의 새로운 종교정보는 출처를 밝혀 학술자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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