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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빛 맛을 보았는가?

기사승인 2020.03.31  00: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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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구도자 다석 유영모와 빛의 전도자 한밝 변찬린

빛은 신과 종교체험을 상징하는 종교적 언어

빛은 세계 종교사를 장식하는 빼놓을 수 없는 종교 언어이다. 태양신, 달신(月神) 등 빛의 숭배 현상은 인류 종교 기원의 하나이며, 동아시아에서는 신(神)과 명(明)을 합해 신명(神明)이라고까지 한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타교는 빛과 어둠을 종교적 기제로 선과 악의 개념을 도입한 불을 숭배한 종교(拜火敎)이고, 네스토리우스교가 중국 당나라에 전파된 후에는 빛종교(景敎)로 불리웠다. 성서 텍스트도 빛인 하나님(요일 1:5)과 빛인 예수(요 8:12, 9:5), 빛인 성령(행 2:3)을 만나 ‘빛의 자녀’로 거듭나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종교문헌이다.

구도자의 종교경험도 신령한 빛을 체험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은 다반사이다. 종교경험은 일반적으로 영원의 찰나, 찰나의 영원와 같은 절정체험이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 현현한 야훼와 만나고,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빛의 경험을 한다. 유영모와 변찬린도 이와 유사한 빛의 체험을 한다. 유영모는 부르신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에서 “반작! 빛!(요한복음 1장 4절), 님을 대한 낯으로요, 말씀 체(體)한 빛으로다”라는 오도송을 하며, 1943년 2월 5일 북악산 마루에 떠오르는 해를 보며 종교체험을 했다. 이에 대해 변찬린은 ‘하나님은 영이다’라는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지지(知止)경험을 하고, 머릿골이 열리는 번개(ligjting) 체험을 통해 “번개와 피와 아픔과 고독”이라는 상징어로 자신의 구도 여정을 표현한다.

구도자는 겸손한 자리에서 완전을 지향한다. 겸손의 자리에서 유영모는 자신의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고, 빛 세계를 향한 구도의 행적을 적어놓은 것이 『다석 일지』이고 제자 박영호는 이를 『다석 전기』에 적어두었다. 반면 이름없는 자리에서 변찬린은 자신의 호를 한밝이라 하고, 온전한 빛 세계와 빛의 화신체인 발광체(發光體)를 증언한 문서가 『성경의 원리』이다.(1)

다석은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찾아가는 구도자로서, 한밝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전도자로서 맡은 바 사명을 감내한다. 다석은 빛깔세계에서 빛세계를 지향하니 ‘거룩한 밤’이 필요하였고, 한밝은 ‘큰 빛’으로 빛깔세계를 빛세계로 혁신하려니 부활과 변화의 도맥이 필요하였다. 두 구도자는 빛을 체현한 인간, 발광체가 탄생하여야 역사 시대가 종결되고 새 축 시대가 열린다는 문명관을 가지고 있다.

변찬린이 유영모를 찾아가다

1970년대 초반 함석헌의 배려로 서대문 종교친우회의 방 한 칸에 머물던 변찬린은 함석헌을 통해 유영모를 알았다. 36살의 장년 변찬린과 82세의 늙은 유영모가 만났다. 변찬린은 1976년 6월 17일에 그의 친구인 이향, 정희영 등과 함께 유영모를 찾아가 『다석 일지』에 기록을 남겨 놓았다(아래 오른쪽 사진 참조). 친구 이향의 증언에 따르면 첫 방문 때 큰 널판에 유영모가 꿇어앉은 모습을 회상하며 유영모가 각자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풀어주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두어 차례 이향과 함께 유영모를 찾아갔다고 한다.

<변찬린이 『多夕日誌』에 적은 자필: 1972년 6월 17일>

박영호는 『다석 전기』에서 유영모가 만난 인물 가운데 “양잿물에 식도가 타 관을 통해 식사를 하던 변찬린 등이 있다”고 적고 있다. 박영호는 필자와의 만남에서 유영모가 남을 잘 언급하지 않는데 변찬린의 구도심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몇 차례 되지 않은 유영모와의 만남을 통해 변찬린은 다석의 진지한 구도 정신과 신앙생활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하다. 1983년 변찬린은 다석의 어록을 모은 『제소리』가 세상에 나온 것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한다. 유영모를 방문한 1976년은 그가 제자들과 함께 <성경공부모임>을 하던 때이며 『성경의 원리』가 나오기 3년 전이다.

구도자는 역사적 공간에서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피할 수가 없다. 예수는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에 ‘부활’이라는 생명의 실상을 보여주었으며, 석가는 생노병사의 고해에 빠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이 출가의 동기가 된다. 두 구도자에게 죽음과 빛은 구도의 두 수레바퀴였다. 구도 공간에서 ‘죽음’은 ‘돌파’해야 할 종교적 기제였으며, 빛은 생명의 영광을 드러내는 보편적 기제로 작동한다. 다만 유영모는 빛의 구도자로서, 변찬린은 빛의 전도자로서 다른 종교적 심성을 띠고 역사적 광야에서 구도 행보를 펼친다.

다석은 21살 때 19살이었던 동생 영묵(永黙)의 급사로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입니다.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고 정신이 사는 것입니다. (중략) 몸은 죽어도 얼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몸을 참나로 생각하는 것이 멸망입니다”(2) 다석은 죽은 송장을 처리하는 잣나무 널판을 낮에는 정좌의 자리로, 밤에는 침대로 삼아 죽음 연습을 하며, ‘거룩한 빛’세계에 동참하려 한다.

그러나 하루에도 서너차례 죽음을 경험하고 난 후 나약한 육신으로 죽음을 일상처럼 달고 살았던 한밝에게는 삶 자체가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자신을 “산 송장”이라 하였을까? 그는 “인류의 사주팔자는 사망”이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은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이 극복하여야 할 창조적 진화의 한계상황이지 순응하여야 할 자연의 섭리가 아니었다.

성령을 따라 참 생명의 진리로 자유한 자들은 발광체로 변화 받아야 한다. 발광체로 변화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죽으면 영혼이 천당 가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비성경적 피안종교(彼岸宗敎)는 죽은 자들의 종교이다.(3)

빛깔세계에서 빛세계를 올라가는 저녁의 구도자

유영모는 저녁과 어둠의 구도자이다. 그는 빛세계와 빛깔세계, 얼세계와 물질세계, 절대세계와 상대세계를 구별하지만(유영모의 언어맥락에서 전자와 후자는 상응하는 표현임), 빛깔세계에서 어둠에서 환히 보이는 빛세계로 ‘하늘의 길을 곧장 곧장 가려한’ 구도자이다. 온 우주에 ‘가온찍기’를 하고 ‘빈탕한데 맞혀놀이’를 하는데 저녁과 어둠만한 도반(道伴)이 어디 있을까? 세간에 알려져 있듯이 1922년, 32세의 유영모가 정주 오산학교 교장에서 물러날 때 배웅나온 함석헌에게 “어두움이 빛보다 크다”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저녁이 거룩을 닮아서 저녁을 좋아하게 되었”기에 다석이 다석답다. 김흥호는 1974년 10월 3일 『다석 일지』의 ‘다석혼적음(多夕昏積陰)’ 풀이에서 “류영모가 제일 사랑하는 것은 잠이다. 류영모는 하루에 4시간 깊이 잤다. 이 잠이야말로 하늘로 통하는 시간이다”라고 말한다. 밤의 어둠을 사모하다 못해 거룩한 잠을 통해 빛 자체인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진다. “잠을 자면 자란다”는 말은 어두움을 사랑한 다석다운 발상이다.

빛깔로 이루어진 물질의 상대세계는 불교에서 말하듯 허상의 세계이다. 명예와 권력과 자본으로 이루어진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세상의 빛과 물리적 에너지로 만들어진 태양계의 물질 세계는 참다운 빛이 아니고 영원과 비교할 때 찰나에 불과한 빛깔세계에 불과하다. 빛깔을 빛으로 착각하고 상대에서 절대를 찾으려는 것이 인류문명이다.(미주 4) 그래서 유영모는 허상의 빛깔세계에서 얼의 나라인 빛세계로 가기 위해 동서양의 경전공부, 선도수련, 일일일식의 단식(斷食)과 해혼이라는 단색(斷色)을 하며 극한의 수행을 한다.

동생 영묵의 죽음이 젊은 유영모에게 빛깔세계의 덧없음을 인식하게 된 계기였다면, 늙은 유영모가 주체적으로 정한 1956년 9월 20일 사망예정일은 배수의 진을 친 빛을 찾는 구도자의 실존적 결단의 기간이다. 죽음과의 대결이다. 이 날을 전후하여 빛에 대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스스로 정한 사망예정일 하루 전날에는 ‘환빛(영광)에 참여해 달라고 기도하고, 사망예정일에는 빛인간 곧 ‘햇사람’으로 ‘온 오늘’을 살게 해달라고 한다. 빛깔세계에서 빛세계로 가기 위해 “빛드러 숨길 막지 말고 숨길로 들어가는 빛을 고디 보오”라는 것은 다석의 일관된 구도태도이다.(5)

유영모는 물질계→생명계→정신계→얼(靈)세계를 지향하며 얼세계는 절대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6) 그런 입장에서 “땅에서 온 몸은 죽어 땅에 덜어지고 우에서 온 얼은 들리어 하느님께로 올리운다”(7)고 얼나를 강조한다. 얼세계는 대광명이다. 종교적 인간은 얼세계 즉 빛세계로 가야하는 것이며, 참빛은 “광명이상의 형이상학적 빛인 영원한 빛입니다. 이 빛으로 참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8) 하늘나라로 가기 위해 빛의 화신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유영모는 ‘ᄒᆞᆫ읗님’, ‘한우님’이라고 되뇌이며 끊임없이 ‘우로 우로’ 빛세계로 올라간다.

잣나무 널판의 발사대에 정좌하여 얼의 몸을 곧추세우고, 선도수련을 통해 모은 빛연료를 분사하면서 빛과 숨이 내려온 길을 거꾸로 용솟음치며 빛세계로 가려 한다. ‘빛보다 어둠이 더 크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와 거짓 빛으로 형성된 빚진 세상은 빗으로 깨끗하게 빗어내는 참빗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 참빛은 바로 “생명의 빛이요 성령의 빛은 얼빛이다”라고 한다.(9)

그런데 거룩의 밤을 통해 빛세계를 그토록 찾던 유영모가 다른 맛은 다 보았는데 왜 빛 맛을 보지 못하였다고 했을까?

이 세상에서 다른 맛은 더러 보았습니다만, 이 빛 맛은 못 보았습니다. 빛 맛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맛도 소금 맛도 볼 수 있는데 빛 맛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번 보았으면 하는 게 이 사람의 마음입니다.(10)

생명의 빛은 인간의 마음에 비치는 진리의 빛이고 찬란한 정신문명의 얼 빛이다. 빛은 하나님처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이 불가형언성(ineffability)이라 빛이라고 표현할 뿐이다. 하물며 빛깔을 빛으로 착각하는 빛깔의 상대세계에서 빛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암호이다. 빛의 암호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내면의 빛(inner light)을 체험한 후에야 겨우 얼세계의 문턱에라도 도달한다.

그동안 제나를 버리고 얼나로 거듭나야 하고, 생각과 말씀으로 거듭난 다석만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이는 빛깔세계에서 빛세계로 직접갈 수 있다는 다석의 발언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빛의 화신체인 참사람만이 빛세계로 갈 수 있다. 영광을 받을 하나님과 영광을 드릴 하나님의 빛의 자녀가 있는 나라가 빛세계이다.(11) 빛세계는 반드시 죽어서 가는 영광의 나라가 아니다. 유영모의 종교적 발언을 ‘몸나, 얼나’라는 이분법적 도식과 ‘생각과 말씀’에 치중한 해석이 타당하다면 다석은 여전히 이원론적 구도체험을 벗어나지 못한 미완의 구도자에 불과하다. 우주합일의 구경각의 종교체험을 하였다는 것은 변호론적인 해석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측면에서 유영모의 ‘얼나’는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빛인간’의 체현은 유영모 구도의 종착점이다. 그는 빛깔세계에서 부패하고 썩지 않는 몸과 맘을 만들어 하나님에게 바칠 거룩한 산 제물(롬12:1)로 바치기 위해 금욕생활과 수도생활을 한다. 썩지 않는 몸을 만들기 위해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하고 죽은 다음 사라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 드릴 영광의 몸, 즉 신령한 몸(고전 15:44)이 되기 위해 ‘빛’이 되어야 한다.

종교적 인간은 허상의 빛깔세계를 실재세계로 착각하는 빛깔인간, 죽은 후에 영혼이 피안세계에 가 하늘나라 간다는 거듭나지 못한 ‘못난이’, 그리고 살면서 죄악의 뿌리를 끊고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는 빛인간으로 구별할 수 있다. 빛 자체인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빛이 되어야 비로소 빛세계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 나의 빛과 하나님이 빛이 교류되어야 한다. 광명을 보고 절대로 탐진치에 탐닉하지 않고, 성통공완(性通功完)하면 살아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

君可見光明(군가견광명) 네가 빛을 보고
殘生切痛悔(잔생절통회) 남은 나날 통회하면
是方纔昇天(시방재승천) 지금 바로 하늘에 올라
申命炎烈然(신명염렬연) 영생의 불꽃을 태우리 (필자새김)(12)

썩지 않는 소금의 몸을 만들기 위한 구도자로서의 유영모는 모범을 보여주었으나, 빛의 몸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빛인간으로 탈바꿈하지는 못하였다. 죽은 후에 얼나만이 빛세계의 영광에 참여한다. 과연 몸나는 땅에 두고 얼나만이 빛세계에 간다는 것은 진실일까?

빛인간으로 존재론적 탈바꿈을 하여 영광의 나라에 참여하는 사건은 역사 시대의 완성이다. 탐진치로 이루어진 죄악의 소멸과 세속적 권력, 탐욕적 경제, 속화된 문화로 만들어진 ‘소유’의 문화가 빛깔세계에서 없어질 때 ‘무소유’의 ‘참 빛’세계가 도래한다. ‘참 빛’세계는 ‘한읗님과 성신과 나’가 하나가 되는 궁극적 인간이 사는 세계이다. 다석은 말한다.

전 인류가 다 드러붙어서 마침내 바로 알어 내놓을 것이 「참 하나」일 것입니다. 승리(勝利)는 인류역사(人類歷史) 끝장(章)에 보입니다. 참 빛을 맞아서야 마칠 것입니다.(13)

끝내 유영모는 ‘참 빛’을 구도의 상징으로 남겨 놓았다. 빛깔세계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거룩한 밤을 즐긴 다석은 빛 맛을 남겨놓은 채 그의 치열한 구도 생애를 마감한다. 임종을 목전에 둔 늙은 유영모가 치매상태에서 한 마지막 한마디가 ‘아바디’였다.

(유영모) 선생이 운명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 “아바디”였다. 여기서 ‘아’는 감탄사, ‘바’는 밝다는 빛의 구현이며, ‘디’는 디딘다는 실천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14)

다음 회에는 빛의 전도자, 한밝 변찬린이 펼치는 ‘빛의 향연’을 들어보기로 하자.

미주

(미주 1) 다석과 유영모, 한밝(은 원래 ᄒᆞᆫᄇᆞᆰ)과 변찬린은 문맥에 따라 혼용하여 가독성을 도모한다.
(미주 2) 박영호, 『다석전기』(서울: 교양인, 2016), 45-46.
(미주 3) 변찬린,  『성경의 원리(上)』(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33.
(미주 4) 『多夕日誌』, 『多夕 柳永模 어록』, 『다석 마지막 강의』, 『다석 강의』등에 많이 보인다. 지면상 각주는 생략한다.
(미주 5) 김흥호는 ‘빛드러’를 빛이 들어온다는 뜻과 삐뚤어 잘못된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한다. 김흥호, 『다석일지공부 2』(서울: 솔출판사, 2001), 123.
(미주 6) 박영호 엮음, 『多夕 柳永模 어록』(서울: 두레, 2002), 131.
(미주 7) 위의 책, 192.
(미주 8) 류영모(다석학회), 『다석 강의』(서울: 교양인, 2016), 703.
(미주 9) 유영모는 ‘빛, 빚, 빗’으로 언어놀이를 한다. 박영호 엮음, 같은 책, 196,
(미주 10) 류영모(다석학회), 같은 책, 171-172.
(미주 11) 류영모, 『多夕日誌 第一卷』, 弘益齋, 1955년 5월 1일. 5월 2일, 5월 4일. 5월 8일, 『多夕日誌』는 일기형식이기에 연·월·일로 표기함.
(미주 12) 위의 책, 1957년 2월 12일. 『다석 일지』에는 선가적 사상이 상당히 보이지만 연구영역에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다.
(미주 13) 류영모, 『多夕 日誌 第一卷』, 1957년 6월 3일.
(미주 14) 김흥호, 「유영모, 기독교의 동양적 이해」,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서울: 솔출판사, 2002), 12.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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