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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심(風流心)이란 무엇인가?

기사승인 2020.10.13  17: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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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역사적 학맥 : 포함론-화쟁론-오증론-장자론

풍류심은 부드러운 바람과 같은 태초의 마음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496.

다양한 경전텍스트에서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아닌 절대적인 일심을 말한다. 일심의 자리는 분별과 차별을 떠난 근본적인 마음자리이다. 세계 경전은 이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노자는 백성의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 “무‘상’심(無常心)”, 장자는 다양한 논쟁을 잠재우는 “제물”론(齊物論), 『금강경』의 “머무른바 없이 내는 마음(應無所住而生其心)”, 『육조단경』의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의 자리, 공자는 시경 300수를 한마디로 정리한 “생각에 삿됨이 없다(思毋邪)”는 마음, 맹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인 “적자지심(赤子之心)”이라고 한다.

그럼 한국인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종교적 언어는 무엇이 있을까? 변찬린은 한국인에게 창조적으로 계승되어온 마음을 ‘풍류심(風流心)’(1)이라 부른다. 풍류심은 “현묘지도왈풍류(玄妙之道曰風流),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당대의 종교체계였던 유교와 불교, 도교의 체계를 포함(包涵)하고도 남음이 있는 넉넉한 마음이다. 동시에 접화군생이라고 하듯이 뭇 생명에게 생기를 주는 창조적 영성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풍류심과 풍류혼이 살아있을 때인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등은 선맥사상의 종주국으로서 이를 중화문명에 전파하는 주도적 위치에 있었으며, 남북국시대에는 당에서 나타난 다양한 종파불교가 신라에서도 재현되자 원효는 ‘화쟁론’으로 교판상석을 통해 통불교로서 정통 불맥을 세워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색당쟁의 틈바구니에서 퇴계는 “이기호발론”과 “성(誠)과 경(敬)”정신으로 성리학적 사유에 깊이를 더하여 ‘동방의 주자’라 칭송받으며, 율곡은 기일원론과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여 성리학의 사유를 확대한다.

그러나 이런 창조적인 풍류심은 외래사상을 ‘사대’하거나 ‘식민’할 때는 창조적 영성으로 발휘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고구려에서 발생한 도교문화가 중화세계에 편입되면서 역으로 수입되는 사실과 성리학의 논설을 표준으로 삼아 다른 종교문화를 ‘사문난적’과 ‘이설(異說)’로 재단하던 조선시대, 또한 현대에도 서구 신학자의 번역신학과 교단과 교파의 호교론적인 신학적 사유는 풍류적 세계관에 자연스럽게 흐르는 바람과 같은 마음에 억압적 기제로 작동한다. 이로 인해 성리학의 사유를 벗어나면 사문난적으로 정죄하던 조선시대의 부유(腐儒)가 득세하던 역사적 유비현상이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재현되고 있다.

장자론(長子論)의 탄생 : 한국의 역사적 학맥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풍류심

지구촌 합류시대에 풍류심을 가진 그리스도교인은 서구의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신학체계’로 한국의 풍류적 심성과 한국 종교문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선교론이고 독선적인 신학적 사유에서 탈출하여야 한다. 멋모르고 살던 과거의 주형에 찍힌 심령을 깨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역사 광야에서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로 나서야 한다. 한국의 풍류혼을 간직한 구도자는 일체의 고민을 안고 ‘십자가의 보살행’을 감행하여야 한다. 이런 주체적 종교적 심성이 풍류심의 발로이다. 변찬린은 처절한 종교경험이 바탕이 되어 목마른 구도심으로 서술한 『성경의 원리 (下)』를 퇴고하며 이렇게 소회를 밝힌다.

얼이 빠진 이 나라의 구도자들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교파와 교리의 주형에 찍혀 고정화되었고 우리들의 몸에 맞지않는 피에로 같은 서구신학의 옷을 입고 어릿광대의 춤을 추고 있읍니다. 교파와 교리의 주형에 찍혀 죽은 내 심령을 자각하던 날 저의 출애굽은 감행되었고 그날부터 시작된 방황과 고뇌와 모색과 초극의 가시밭길은 저를 현대의 광야로 퇴수(退修)시켰습니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572-573.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구의 수입신학과 선교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에 국한해서 표현한다면)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맞는 새로운 성서해석과 역사적 도맥을 계승한 토종 종교인의 탄생이다. 변찬린은 이렇게 말한다.

(중략)

더럽혀진 역사를 보면 원효같은 위대한 화쟁혼(和諍魂)이 있었고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도 풍류의 얼을 고이 간직한 고운(孤雲)이 있었고 썩은 선비들이 사색당쟁의 개판을 칠 때도 퇴계와 율곡과 같은 사상의 거봉들이 정신의 산맥을 융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고운’,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은 없는가?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9-10.

변찬린은 한국의 역사적 학맥과 도맥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마음은 환웅신화의 천지인 삼재가 원융무애하는 이화세계의 정신을 가진 홍익인간의 마음과 삼교를 포함하고도 남음이 있는 최치원의 포함론(包含論)과 종파불교의 난맥상을 교판상석한 원효의 화쟁론, 최수운의 불연기연론, 강증산의 해원상생론, 박중빈의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병진론竝進論, 김범부의 오증론(五證論: 문증(文證), 물증(物證), 구증(口證), 사증(事證), 혈증(血證) 등으로 계승되고 있다. 특히 안동준 교수(경상대)는 김범부의 “오증론은 국학방법론으로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특히 사증(事證)과 혈증(血證)은 자료가 인멸된 상태에서 어디서 접근할 것인지 잘 일러줍니다. 풍류의 흔적을 사증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샤머니즘 전통론인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혈증은 현존이며 풍류체로서의 자각이라고 보면 어떨까 합니다.”라고 제안한다.(2)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풍류심에 대한 중요한 지적이다.

풍류심은 선맥에서 발현하는 구도자의 마음이지만, 변찬린은 이를 학문의 방법론으로 구체화한다. 필자는 이를 변찬린의 “장자론(長子論)”이라고 명명한다. 장자론은 차자(次子)의 상징에 의해 가리워진 장자의 상징을 발현시키는 위계성位階性과 중층성重層性을 가진 인식체계이자 실천체계이다.(3) 장자론은 신체구조를 메타포로 하여 유교문화권의 제사의례와 성서의 제사의례에서 착안하여 창안된 종교체계이다. 인체구조를 보면 인식하는 머리와 이를 순응하는 지체로 구분되어 있듯이 머리조직인 장자가 역사시대에 먼저 나와야 하는데 지체조직이 먼저 나와서 진리가 순산되지 못하고 역산하여 죽음의 문화가 탄생하였다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이로 인해 장자인 생명 문화의 풍류적 세계관은 은폐되고 차자인 죽음 문화의 피안적 세계관이 역사시대에 펼쳐지고 있다고 변찬린은 말한다. 성서적 비유를 사용한다면 인류시조가 장자의 상징인 ‘생명과’를 따먹지 못하고 차자의 상징인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죽음의 역사이며, 불교적 언어를 빌면 인간의 무명으로 니르바나의 세계가 아닌 분별지의 세계가 펼쳐지고, 노자의 언어를 빌면 장자인 대도가 펼쳐지지 않고 차자인 인의(仁義)의 세계가 펼쳐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론은 역사시대의 인식체계와 실천체계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차자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죽음문명은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장자의 생명문명으로 탈바꿈하여야 한다. 이는 곧 인류문명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문명사적 대선언이다. 다시 말하면 차자의 “분즉위(分卽僞)”의 분열의식과 피안의식, 독선적인 의식은 장자의 “합즉진(合卽眞)”의 통합의식과 차안의식과 포용적인 의식으로 탈바꿈되어야 하며 이것이 종교적 인간의 실천체계로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텍스트로서의 경전은 ‘말씀’을 모은 텍스트로서 말(言)이라는 믿음체계와 씀(用)이라는 실천체계가 합성된 종교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경전은 온 우주의 진리를 표현하는 거대한 하나의 모자이크이며, 홀로그램이며, 만다라이다. 다원적인 종교적 상황에서 모든 경전은 호응적이고, 교차적이며, 오증(五證)을 통해 풍류심(체)를 자각한 구도자(해석자)가 행증(行證)으로 실천하면서 검증되어야 비로소 가치를 가진다. 강조하건데 장자의 상징이 주도하고 차자의 상징이 순응하면 포월적 상생의 풍류성이 발휘되지만, 차자의 상징이 주도하고 장자의 상징은 은폐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성전매매와 성전세습’과 같은 난맥상은 장자의 상징인 인격성전에 대한 자각이 없는(?) 종교인이 차자의 상징인 건물성전이 마치 ‘참 성전’(?)인양 오인하게 하는데서 발생되는 종교적 상행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내부의 이해관계자의 ‘침묵의 카르텔’로 인해 이런 신성모독의 관행이 자정되지 않음은 해당 종교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하나의 화석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서산대사가 『선가귀감』에서 신심(信心), 분심(憤心, 용맹정진), 의심(疑心), 대각(大覺)의 과정을 거친다고 말하듯이 변찬린은 성인(誠人=聖人)의 언행이 수록된 경전텍스트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입문을 통하여 ‘의심의 해석학’을 통해 종국에는 크게 깨우치는 단계를 거쳐야 하며 이는 반드시 실천으로서 검증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4) 필자는 풍류심은 오증론만이 아니라, 행증(실천적 검증)을 포함한 육증론(六證論), 더 나아가 온 우주를 회통하는 이심전심과 언어도단, 혹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말하는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아는’ 온 우주의 사유체계과 실천체계가 보편성을 가지는 영증(靈證)을 포함한 칠증론(七證論)의 단계로까지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찬린은 성서를 해석하는 입장에서 칠증이라는 장자의 마음으로 유·불·도의 경전을 ‘차자의 문서’라 하고 성서를 ‘장자의 문서’라 한다. 하지만, 이는 차자의 문서를 이해한 바탕 위에서만 장자의 문서인 성서가 바르게 해석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장자의 문서’인 성서와 ‘차자의 문서’인 유·불·도는 상보의 관계이지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이해지평의 관계성을 가진 문서라는 것이다. 동시에 유·불·도의 경전에도 장자의 언어가 있고, 성서에도 차자의 언어가 있다는 점은 당연한다. 깨달음에 대한 장자의 문헌은 불경이다. 선맥에 대한 장자의 언어는 한국의 풍류선맥정통론이다. 결국 경전에 대한 믿음과 깨달음과 해석과 실천의 주체는 ‘해석자’가 경전간(내)의 관계성을 읽어낼 수 있는 풍류심을 발휘하느냐가 관건이다. 문제는 풍류심을 가진 구도자로서의 장자는 시대를 주도하는 창조적 영성을 발휘하고, 예속된 종교권위에 ‘순응’하는 종교적 인간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차자에 불과하다. 이제 장자의 상징이 머리로서 작동되고, 차자의 상징은 호응하여야 할 때이다.(아래 도표 참조)

<장자적 상징과 차자의 상징의 예>

지구촌 합류시대 다원적 종교전통에 사는 한국인은 특정 종교와 교파와 종파의 자리에서 종교의 노예, 자본의 노예, 신(교)학의 노예라는 차자로서의 종속된 과거를 벗어던지고 구도자로서의 장자의 의식을 가지고 우주와 세계와 경전과 인간에게서 장자의 언어를 찾아나서는 장자문명의 계승자로서 자각하고 실천하여 새 문명의 기수가 되어야 할 때이다.

결론적으로 풍류심으로서 장자론은 현대적 표현을 빌리면 당대의 다종교적인 언어와 다학제적인 방법과 간텍스트적인 해석이 이해지평 속에서 융합되어 독창적이며 보편적인 기제로 작동하는 한국인의 의미체계이자 실천체계로 평가되어야 한다. 장자론의 체계는 포함삼교라고 하듯이 당대의 종교체계를 포용하여 다른 종교에도 생명을 불어넣은 의미체계이다. 한밝 경전해석학을 예를 들면 “성서를 성서로 해석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다종교적 경험과 간텍스트적 해석과 다학제적 방법이 융합되어 창조적 성서해석을 하고 있다. 또한 이런 경전해석은 다른 종교의 경전해석에도 적용을 할 수 있을 만큼 포용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

▲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4부작 초판본

풍류심의 ‘장자론’으로 해석한 『성경의 원리』

변찬린은 풍류심의 장자론을 통하여 믿음으로 입문하고 용맹정신의 구도심으로 철저한 ‘의심과 해체’의 해석학을 통해 구경의 깨달음을 저술로 남겨놓았다. 특히 장자론의 사상적 근거인 장자와 차자의 ‘도의 논쟁’에 대해서는 『성경의 원리 (上)』 제11장  「장자론(長子論 」에서 논증하고 있지만, 「선고(僊(仙)攷)」에서는 한국의 선맥을 중심으로 동서종교문화가 융합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주저인 『성경의 원리』 사부작에서 풍류심에 대해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사례 1) 성서에서 읽어낸 풍류심에 대한 성구와 해석

* 내가 그들에게 한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19),
*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이 성구에서 보듯 〈굳은 마음〉이란 곧 주형과 교리에 찍혀 고정화되고 돌처럼 경화된 화석심전(化石心田)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전이 돌밭 곧 굳어진 석심(石心)이 되었으므로 새 영 곧 성령으로 부드럽게 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부드러운 마음이란 자유한 마음, 바람같은 풍류심(風流心)을 의미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495.

멜기세덱도 에녹도 엘리야도 모세도 예수도 호지 않은 속옷을 입고 승천하였다. 우리들도 호지않은 천의무봉을 입고 성경 속에 숨겨진 변화와 부활의 도비를 발굴하여 산 자로 수렴되어야 한다.
찢겨나가지 아니한 성경의 속옷진리, 교파의 교리화 될수 없는 성경의 도맥과 도비(道秘), 주형화될 수 없고 규격화될 수 없는 성경의 참뜻을 대각하여 절대자유한 풍류체, 풍류심이 되어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자.
교파의 주형에 찍혀 소인이 되고 교리의 틀에 굳어져 규격화된 비소(卑小)한 속물(俗物)들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예수를 닮은 대장부가 되자. 대인이 아니면 자유할 수 없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542-543.

사례 2) ‘예수’에 대한 다종교적 언어, 다학제적 방법, 간텍스트적 해석의 용례

성서의 주인공인 ‘예수’가 『성경의 원리』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표현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5) 필자가 (마 3:17; 상 229)라고 표현한 것은 ‘;’ 앞은 관련 성구이며, 뒤는 『성경의 원리 상』의 페이지를 말하는 것이다. 아래 글은 특정 글과 문장을 취사선택했기에 관심있는 사람은 관련되는 부분을 직접 확인하고 문맥에 따라 이해하는 성숙한 태도를 가지기를 기대한다.

역사지평에서 “멜기세덱과 예수의 도맥(道脈)을 이은 산 자들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가지에서 분화되어 부활한 초인(超人)으로 회귀할 것이다(상 9)”라고 하면서 풍류체를 호모사피엔스의 다음 인종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번데기와 나비의 비유를 들어 존재탈바꿈을 설명하고(상 74), 숯과 다이아몬드의 은유를 통해 불변하는 진리체를 설명한다(상 74), 풍류체는 물질의 삼상법칙을 예로 들어 고체와 액체로 만들어진 신체가 기체로 선화한다고 해석한다(하 569). 「성경강의」에서는 풍류체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이용해 설명(6) 하는 등 다학제적인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또한 선가적(仙家的)언어로 시해선(屍解仙)으로 부활한 예수는 영화(靈化)되어 풍류체가 되었(마 27:59-61, 요 20:6-7, 요 3:8; 하 568)으며, 유가적 언어로 도성인신(道成人身, 상 276)하고 살신성인(殺身成仁, 상 82)한 도인(道人)이며, 예수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대효(大孝)(중 31)였으며. 인효(仁孝)는 까마귀가 전해 준 천사의 도리이고 천효(天孝)는 예수와 비둘기 성신이 전해준 도리임을 잊지 말자(중 61)고 말한다. 불가적 언어로 예수는 영안이 열린 천안통(마 3:15; 상229), 귀가 열린 천이통(마 3:17: 상229), 바다를 걷는 신족통(요6:19-21;상230), 다른 이의 마음을 읽는 타심통(막 2:8, 요 1:48-49; 상230), 인간의 운명을 투시한 숙명통(요4:16-19, 마 11:14;상231), 시해선(屍解仙)으로 부활한 누진통(漏盡通)(요 19:34, 요 19:23; 상231) 등 육신통을 한 신 실재이다.

예수도 불교적 윤회관이 아니라도 분명히 윤회 문제를 인정하고 있다.(마 11:13-14; 상490). 그러나 예수는 산 자가 되어 부활 승천했으므로 우리를 생사의 윤회 바퀴에서 건져 올려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기 때문에 윤회 사상이 성경에 부상될 필요가 없었다(상 500). 예수는 부활 후 닫힌 문을 열지 않고 출입하신 사건과 생선을 잡수신 사건은 서로 모순된 사건처럼 보이지만 신실재(新實在)로 변화하신 예수는 자유자재로 시공을 초월하여 그 진신(眞身)을 나타내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진리의 화신(상 154)이었다고 표현한다. 또 예수는 신학적 언어로 신성과 인성을 겸한 신인(상 224)이며, 영화된 예수는 우주적 예수 그리스도(상 237)이며, 하나님과 예수는 지구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우주적 하나님과 그리스도임을 깊이 인식하자(상 420)고 표현하다. 이처럼 예수에 대해 다종교적 언어를 사용하며 간텍스트적 해석을 하고 있다.

또한 성서의 언어로 예수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 롬5:14; 상213),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이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 요 1:14, 잠 8:22-31;상 215), 하늘에서 난 존재요 위에서 난 존재이므로 만물위에 계시는 분(요 8:23;상 216), 죄도 흠도 점도 없는 청정무구한 분(벧전 1:19; 상 216)이며, 하나님의 본체(골 1:15 외; 상221),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골 1:15-17; 요17:5 외; 상221), 하나님의 독생자(요 1:14, 요 3:16, 히 1:6; 상 222), 말씀이 육신이 된 자 (요 1:1, 요 1:14, 요 1:18; 상222), 위로부터 오신 자(요 8:23, 고전 15:47; 상 223)이지만, 다시 오시는 예수는 인간의 육신으로 오지 않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온다(상 223)고 말하고 있다.

한편 평화의 제사장으로서의 멜기세덱은 타락한 인간의 마당에서 보면 영원히 본체계(本體界)의 제사장이고 죄의 제사장으로서의 예수는 현상계(現象界)의 제사장이라 할 수 있다(상 82). 멜기세덱과 예수는 본래 하나인데 인간이 죽음의 존재로 전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살신성인하여 저주의 자리에서 피의 십자가를 지셨던 것이다(상 82)라고 하며 하나님을 〈산자의 하나님〉으로 천명한 첫 사람이 예수였다(눅 20:37-38; 중 86-87)고 독창적 해석을 하고 있다.

한편 참 성전이란 하나님의 화신인 예수의 몸이며(요 2:21 ) 성도한 인간의 몸이다(고후 6:16 ; 중 470). 현존하는 우리들은 베드로의 도맥을 이어받아 정각된 신앙고백 위에 산 인격의 유기적인 교회를 세워야 하며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탄생할 때 예수는 우리에게 천국열쇠를 주실 것이다(하 298). 예수는 왕들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의 머리이고(엡 1:22) 성도들의 머리이다(엡 4:15) (계 21)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예수의 이름도 새 이름이고, 신부인 예루살렘도 새 이름인데, 왜 하나님의 이름은 새 이름이라는 말이 없는가?(계 3: 12-13; 계 77)라고 “이름없는 신관”을 강조한다. 유대교에서 도망쳐 나온 갈릴리 어부들이 예수의 제자가 된 것처럼 낡고 썩은 기독교에서 탈출한 <이긴 자>만이 예수의 신부가 될 것이다.(계 284)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풍류의 심성으로 희랍적 이원론에 의해 해석된 성서의 진리를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한다”는 대 원칙아래 “성경이 선맥僊脈”이라는 포월적 준거점을 가지고 다종교적 언어, 다학제적 방법, 간텍스트적 해석을 ‘장자론’에 의거 새로운 성서해석을 한다. 변찬린은 세계 경전을 전면적으로 새롭게 해석한다는 원대한 학문적 계획은 『성경의 원리』의 풍부한 종교적 정보와 종교 체계를 볼 때 그 구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지구촌 합류시대 다원적 종교전통에 사는 한국인은 특정 종교와 교파와 종파의 자리에서 종교의 노예, 자본의 노예, 신(교)학의 노예라는 차자로서의 종속된 과거를 벗어던지고 구도자로서의 장자의 의식을 가지고 우주와 세계와 경전과 인간에게서 장자의 언어를 찾아나서는 장자문명의 계승자로서 자각하고 실천하여 새 문명의 기수가 되어야 할 때이다.

미주

(미주 1) ‘풍류심’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풍류심으로 쓴다.
(미주 2) 상기 글은 필자가 에큐메니안에 게재한 “풍류체란 무엇인가”에 대해 2020년 9월 15일 SNS상에서 안동준 교수가 제안한 의견으로 강조하여 할 부분이라 생각되어 독자들과 공유함을 밝힌다.
(미주 3)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할 것 :이호재, 『한밝 변찬린(한국종교사상가)』, 문사철, 2017, 311-333, 602-638.; 같은 저자, 「풍류심과 장자론」, 『포스트 종교운동』, 문사철, 2018, 62-71.
(미주 4) 변찬린, 「성경강의」, 1979. 5.27.
(미주 5) 필자가 이를 정리하다 보니 A4 10페이지 이상의 분량이 되어 간략하게 소개함을 밝힌다. 관심있는 독자는 그의 저술을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미주 6) 변찬린, 「성경강의」, 1981. 4. 5.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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