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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체란 무엇인가? 창조적 진화의 완성체

기사승인 2020.09.29  01:4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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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류체는 역사시대와 영성시대의 가교담론이다

이 글은 필자의 「변찬린의 풍류사상에 대한 종교적 이해-풍류도맥론(風流道脈論)의 영성(靈聖)담론의 가능성을 위한 시론」, 『한국종교』45, 2019. 325-355의 일부 내용을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저본으로 사용한다. - 저자 주

종교적 인간은 영생(Eternal Life)을 꿈꾼다

인류가 공통적으로 공감의식을 가지는 한계상황은 무엇일까? 보편적인 종교적 기원에 대한 탐구는 종교학에서 포기한지 오래지만 개체의 죽음과 공동체의 사멸은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의 결정적인 한계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과학적 인간은 유전자 편집을 통해 생명형태를 조작할 뿐만 아니라 복제인간을 생산하고,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이 결합한 사이보그 등 제3의 생명체를 만들며 인간 생명의 영속성을 담보하는 과학적 유토피아를 약속하고 있다.

인류는 그리스도교의 사유체계에서 창조주가 인간을 창조하였다면, 창조된 그 인간이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영생을 꿈꾸며, 인간을 능가할 수도 있는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를 창조하려는 순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종교적 인간은 축 시대의 사유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로 인해 종교적 인간은 인류가 봉착한 생태계의 위기와 과학적 유토피아 사이에서 문명론적 고민을 하고 있다.

종교적 인간은 실존적 한계를 돌파하며 개체와 공동체의 영속성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개체로서의 인간은 불사의 욕망을 꿈꾸며, 공동체는 구성원의 동질감과 연대감을 확인하는 공동체 의례를 통해 문화공동체의 지속성을 유지한다. 무엇보다도 종교적 인간은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적인 상황보다는 영생을 추구하는 원초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엄밀히 말하면 영생에 대한 종교적 기제는 종교의 핵심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사진 1 참조)

▲ 사진 1: 변찬린 친필, 초록색 원안에 生과 死의 포월적 준거점은 永生임을 표현

문화공동체는 죽음이 삶의 단절적 사건이 아닌 삶과 죽음이 영속적 사건으로 죽음의례를 설계한다.(1) 유교적 인간은 관혼상제 특히 제사의례를 통한 종법체계의 계승과 확산을 통해 영속성의 기제를 확보하고, 불교적 인간은 연기체계의 단절을 통해 열반의 경지를 추구하며, 도교적 인간은 죽지 않겠다는 인간의 ‘불사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며 다양한 영생방법을 개발해 왔다.(2) 그리스도교적 인간은 ‘부활’에 대해 다양한 해석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 모든 종교는 구원의 기제를 가지고 있다. 구원의 기제를 상실한 종교는 역사 속에서 생존하지 못한다.

종교적 인간이 ‘종교의 시대는 가고 (초)과학의 시대가 왔다’는 소식에 위기감을 느끼게 만드는 강력한 도전자는 ‘성전매매와 성전세습’, ‘자본신앙과 기복신앙’에 경도된 종교 내부의 부패와 신자 감소라는 현상보다는 오히려 과학적 인간이 제시하는 생명의 영생에 대한 과학적 유토피아이다. 생명공학과 인공지능 등의 과학적 창조물을 통해 불사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과학적 유토피아는 마치 진시황이 자연물인 불사약을 먹고 영생을 추구하고 외단 등 인공물을 복용하여 장생을 추구하려던 유비적 현상이다.

바야흐로 축 시대의 깨달음과 이성적 사유와 믿음의 주춧돌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3) 이는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의 인간 가치에 대한 포기이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예수의 보살행에 대한 모독이며, 보리수 나무아래 피골이 상접하며 무상정각을 성취한 후 ’니르바나‘를 설법한 석가모니에 대한 모욕이자, ‘홍익인간 접화군생’의 풍류도맥을 계승한 동방의 후예들에 대한 경멸이다.

이런 문명의 전환기에 ‘풍류선맥정통론’을 거론하는 것은 복고풍의 한민족 지상주의를 부르짖는 종교적 선전이나 한가한 담론을 제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풍류선맥정통론은 종교적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실존적 담론이자 궁극적 인간을 지향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구도의 정점에 대한 동방 후예의 문명사적 대답이다.

풍류선맥정통론은 역사시대와 영성시대의 가교담론이다

과연 인류는 죽음을 극복하였는가? 죽음은 인간실존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자 운명인가? 죽은 다음에 영혼이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이 생명의 본질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선맥의 하늘을 개창한 고대 한국인이 전승하여온 종교적 영성이며, 『선사』에 연원을 둔 ‘풍류’의 정체성이자 근대 신종교의 동학, 증산교, 대종교 등 선맥을 중흥한 종교 창교자의 종교적 선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류선맥정통론은 종교적 인간 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풍류담론이 과거지향적인 담론에 매몰되어 있거나, 한국의 고유 종교사상의 정체성이라는 점에 치중하여 영성시대의 열린 담론으로서 자리매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이를 계승하였다는 신종교도 열린 미래의 담론으로 정착시키는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창적인 선맥의 영성을 토착화 신학자의 호교론적 담론으로 풍류도의 본질이 왜곡되었으며, 한국의 고유한 종교의 도맥이 화랑도 혹은 팔관회 등 조직문화로 계승되었다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의 종교적 영성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영성이다.

다른 한편 성서는 인류에게 제시된 “선(僊)의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희랍적 이원론의 해석에 의해 성서에 담긴 변화와 부활의 도맥이 충분히 발굴되지 못하고 피안 문서로 이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경전 텍스트에 제시된 다양한 영생의 차원을 종교적 인간의 ‘피안감성’과 ‘피안의식’에서 형성된 피안적 세계관은 역사시대를 죽음의 문명으로 만들어버렸다.

풍류(체)는 동방의 선맥과 성서의 부활과 변화의 도맥이 이해지평의 융합에서 만나는 ‘포월적 준거점’이며, 풍류선맥정통론은 종교적 인간의 가능성과 궁극적 가치에 대한 동방의 대선언이다. 풍류선맥정통론은 공간적으로 동방의 선맥과 성서를 포함한 경전 텍스트를 융합시키고, 시간적으로 과거지향적인 복고담론이 아니라 영성시대에 과학적 유토피아에 대응할 수 있는 가교담론으로 작동한다. 변찬린은 이렇게 말한다.

외래종교에 의해 윤간당한 〈한(恨)의 심성〉에 풍류도(風流道)의 거문고 줄을 다시 매어 심금의 올을 바르게 하면 하나님은 새 날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우리들에게 계시할 것이다.
번개와 피와 아픔과 눈물과 고독 속에서 쓴 『성경의 원리』 상·중·하 세권은 두 사이비 종교(기독교와 맑스교)의 괴뢰로 전락된 이 민족과 세계 앞에 제출한 나의 피 묻은 각서(覺書)이다. 성경은 〈선(僊)의 문서〉인데 2천년 동안 서양의 지혜는 이 도맥(道脈)을 발굴하지 못했다. 현묘(玄妙)한 풍류도(風流道)인 동방의 지혜는 낡은 하늘의 쪼각나고 흩어진 모든 종교를 구원할 수 있는 새 날의 대기(大器)이며 더럽고 추한 모든 종교싸움을 종식시킬 화쟁(和諍)의 신기(神器)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10.

이런 관점에서 변찬린은 “서양의 신학은 성경의 산에 입산하여 도라지와 더덕 몇 뿌리를 캐가지고 산삼으로 착각한 신학이었다. 도라지와 더덕은 산삼이 아니다. 산삼은 동방의 심마니들만 알고 있는 신비한 약초이다. 이제 성경의 산을 향해 하나님께 백일기도 드리고 영생의 산삼을 캐러 입산하자”고 권유한다. ‘영생의 산삼’의 한 뿌리는 변화와 부활의 도맥의 결정체인 풍류체이다.

궁극적 인간으로서의 풍류체

풍류도라는 동방의 선맥이 성서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까? 예수와 니고데모의 중생에 대한 대화는 워낙 유명한 성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3-9)

성서에서 ‘거듭난다’는 중생(重生, rebirth)의 의미는 무엇인가? 중생은 악인이 선인이 되거나 혹은 지난 과오를 회개하고 예수를 신앙한다는 의미에 불과할까? 도덕적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종교적 사례는 다른 경전 텍스트에도 많이 있다. 사서삼경, 대장경, 도장(道藏), 성서 등 경전 텍스트에는 중생과 유비되는 궁극적 인간형이 다양한 표현이 있다. 예를 들면 의인과 영체는  그리스도교적 용어이고, 신선(神仙), 진인(眞人), 지인(至人) 등은 선가적 표현이다. 또한 아라한, 붓다 등은 불교적 인간, 내성외왕(內聖外王)은 유교적 인간의 지향점이다. 심지어 과학적 인간도 인간과 공존하는 복제 인간과 사이보그 등을 통해 제3의 생명체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서의 ‘중생’은 종교적 인간의 존재탈바꿈에 대한 생명의 언어이다.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는 새로운 인간을 말한다. 이 선화적(僊/仙化的) 인간이 바로 풍류체이다.

변찬린은 『성경의 원리(하)』에서 부활한 풍류체로서 예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소 길더라도 그의 언술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기로 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568.

풍류체는 지구촌 사유가 합류된 우주 시대에 종교적 인간의 잠재적 가능태를 극대화한 새로운 인간 유형이다. 소위 ‘완전한 인간’이다. 궁극적으로 거듭난 인간은 제도, 사상으로부터 절대 자유한 새로운 실존이며, 생로병사의 윤회의 바퀴에서도 절대 자유자재한 영생의 존재라는 것이다. 풍류체는 종교적 인간이 절대 존재와의 합력(合力)을 통해 줄탁지기의 인연으로 선맥에서 발현되는 초인간이며 초인류이다.

변찬린은 동이족만이 알고 있는 종교적 기제인 선맥에서 유교적 인간, 불교적 인간, 도교적 인간, 그리스도교적 인간은 궁극적 인간으로서 ‘풍류체’로 회통시키고 있다. 풍류체는 종파종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인간이다.

이율배반적인 존재양태로서의 풍류체

풍류체는 영성우주와 시공우주를 자유자재로 현신하는 것은 물론 외모마저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활체의 예수는 닫힌 문을 열지 않고 출입하였고(요 20:19-29) 엠마오의 노상에서 두 제자에게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기도 하며(눅 24:13-35) 생전과는 다른 새 실재로 거듭났다. 한편 불신에 빠진 도마에게 살과 뼈를 만지게 하고(요 20:26-29)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 구운 생선을 먹기도 하며(요 21:10-14) 영혼만의 부활이 아닌 육신도 부활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존재형태로 인해 인문학으로서 종교학과 신학에서는 ‘신비’라는 용어로 해석하기를 주저하거나 금지하고, 비신화론의 영역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현상은 풍류체로 변형된 예수는 생전에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조차 알아보지 못했고(요 20:14) 제자들도 알아보지 못한다.(요 21:4) 즉 부활된 예수는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그야말로 초논리적 현상으로 자유자재한 존재양태를 드러낸다. 이럴 경우 인문학은 편리한 기제를 발동한다. ‘신비’로서 인간 사유가 불가능한 영역으로 남겨놓자는 칸트의 사유를 따른다.

그러나 선가에서는 인간의 변형기술과 초능력을 포함한 다양한 방술과 주술 등에 대한 종교적 테크닉이 채록되어 있으며, 불가에서도 붓다와 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은 차등은 있지만 사지(四智), 육신통(六神通) 등 초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성서에도 사울이 사무엘의 영혼을 초혼하기 위해 무당을 찾아가며(삼상 28: 8-19), 예수가 눈이 열려 하늘을 보며(마 3:16),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마 3: 17) 등 다양한 신통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있다. 특히 풍류체로 변한 실재를 직접 보고도 그 시점에서는 모르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다는 언급이 성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경전텍스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필자는 지면의 한계로 인해 다양한 종교텍스트를 인용할 여건이 되지 않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사진 3 참고)

▲ 사진 3: 선가와 도교에 대한 주요 기초 도서

그렇다면 요한신앙공동체에서 편집된 중생사건(요 3:6-8, 요 3:5)과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영의 몸(고전 15:44),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고전 15:49), 변화체(고후 3:17, 고전 15:51-52), 해와 같이 빛나는 발광체(마 13:43, 마 17:2, 골 3:4, 계 1:16) 등에 대해서는 동방의 선가적 언어와 다른 종교의 언어를 사용하면 훨씬 생동감있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변찬린은 그의 저술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다.

일부 신학자들은 고등비평을 성서해석에 도입하여 현대인의 사유체계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한다. 또한 ‘사두개파’ 형 신학자는 역사적 예수의 부활을 ‘불신’하며 예수그리스도 정신의 사회구원을 말한다. 반면에 ‘바리새파’ 형 신학자는 영화 미이라 식의 부활을 꿈꾸는 ‘미신’을 하고 있다. 풍류체는 역사시대에 살아있는 종교현상이자 궁극적 인간과 완전한 인간에 대한 축 시대가 남긴 인간 존엄의 예찬이다.

하나님은 영(요 4:24)이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고 대선언을 한 예수가 영과 육이 부활한 새로운 실존인 ‘풍류체’로서 새로운 차원의 차안의 세계에 갔기 때문에 ‘죽은 다음에 영혼이 하늘나라에 간다는 피안의식’은 성서텍스트의 맥락적 의미에서는 수용되기 어렵다. 만일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라면, 십자가의 고난은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불교의 (《묘법연화경》〈약왕보살 본사품〉에는 약왕보살이 소신공양(燒身供養)했다고 한다.

또한 에녹(창 5:24, 히 11:5)과 멜기세덱(창 14:18-20, 히 7:1-3)과 엘리야(왕하 2:11)의 변화의 도맥과 모세(신 34: 5-6, 유 9)와 예수(눅 24:1-53)의 부활의 도맥, 그리고 삼일 반만에 살아나는 두 증인(요계 11: 9-11), 그리고 예수의 죽음에 대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사건(마 17:3-4, 막 9:4-5, 눅 9:30-33), 그리고 천사장 미가엘과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두고 변론하는 사건(유 9)은 서구 신학에서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한 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변찬린은 “여러 고등종교를 분석해 보면 장생불사, 환골탈태 천의무봉 우화등선의 비의를 알고 있는 백성은 동이족뿐이었다”라고 단언한다. 이런 동방의 선맥은 고대 한국인으로부터 현재에도 살아있는 종교현상이다.

창조적 진화의 완성체로서의 풍류체

변찬린의 궁극적 인간에 대한 탐구는 관념적이거나 공상적이지 않다. 한평생 죽음과 직면한 그의 신체적 한계는 ‘번개와 피와 아픔과 고독’의 자리에서 죽음과 진검승부를 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들이다. 죽음과 배수진을 친 싸움에서 획득한 영생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동방의 선맥과 성서의 부활과 변화의 도맥을 대화시킨 ‘풍류체’이다.

그는 생명의 계통수를 나열하면서 공자, 붓다 등 성인은 시체를 무덤에 남겼으나, 예수는 창조적 진화의 완성체로서 무덤을 남기지 않은 변화체이자 발광체인 풍류체로 설명한다. 하지만 동이족의 선맥이라는 신화시대의 과거성 담론으로 회귀시키거나,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영역에 닫힌 담론으로 자리매김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역사적 인간이 새로운 인간(종)으로 거듭나는 창조적 진화의 궁극적 인간으로 자리매김한다.

동이족은 선맥의 종교적 유전자를 가진 민족으로서 창조적 진화의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초인간 탄생의 도맥을 계승하고 있다. 인구에 회자되던 ‘신선’이라는 선화적 인간은 성서 속의 에녹과 멜기세덱과 엘리야의 변화의 도맥, 모세와 예수의 부활의 도맥이 ‘풍류체’라는 창조적 진화의 완성체이자 영성시대의 ‘불사의 인간(Homo Immotal Spiritual Being)’으로 규정된다.

멜기세덱과 예수의 도맥(道脈)을 이은 산 자들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가지에서 분화되어 부활한 초인으로 회귀할 것이다. 잠시 후 비터에서 천둥 번개가 울려 인간을 새 품종(品種)으로 개량할 것이다. 볍씨가 방사선 동위원소에 조사(照射)되어 새 품종으로 탈바꿈하듯 썩어질 육(肉)의 종자(種子)인 우리들도 성령의 불에 조사(照射)되어 영생할 영(靈)의 품종으로 변화할 것이다.(4)

풍류체는 선사시대의 신화적 인간과 역사시대의 종교적 인간, 그리고 영성 시대의 궁극적 인간이라는 창조적 진화의 도식에서 나타나는 궁극적 인간이다. 풍류체는 종교적 인간이 지향하는 새로운 종(種), 호모 스피리투스 (Homo Spiritus)에 대한 변찬린의 ‘발명어’이다.

미주

(미주 1) 존 바우커, 박규태 외 역, 『세계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 청년사, 2005; 전남대학교 아시아문화원형연구사업단, 『동아시아인의 통과의례와 생사의식』, 전남대학교출판부, 2010; 한국종교학회, 『죽음이란 무엇인가』, 창, 2012.
(미주 2) 이호재, 「한국 재래종교의 ‘구원’관」, 『신학과 교회』 10, 2018, 116-135.
(미주 3) 필자는 과학자가 제시하는 과학적 미래설계를 존중하지만, 이 글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논지를 중점적으로 전개하고 있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미주 4) 변찬린. 『聖經의 原理(上)』 , 대하, 1979, 2.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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