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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특정 종교의 전용문서가 아니다

기사승인 2020.12.08  16: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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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찬린과 변선환의 성서읽기를 통해 토착화를 다시 생각한다

성경은 해당 문명의 나침반 구실을 하는 ‘말씀모음집’이다

성경은 해당 지역의 종교문화와 문명을 형성하는 나침반의 구실을 한다. 일반적으로 성경은 불경과 성서 등 문자텍스트로 이루어진 경전과 문자경전과는 달리 전승되는 전통도 있다. 선가에서는 “선서무문 선어무사(仙書無文,仙語無詞)”라고 하는 무자진경(無字眞經), 불교에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선문(禪門)의 전통, 유대교의 카발리즘, 그리스도교의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엑크하르트 등 신비주의의 전통, 유교에서도 심법(心法) 전통 등이 성경의 일종으로 계승되고 있다. 즉 성경은 문자와 문자로 기록되지 않는 모든 경전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주로 문자경전에 대하여 언급한다.

성경은 해석을 통해 당대인과 소통하고, 실천함으로써 성경의 정신을 재현하는 개방체계이다. 성경은 인간과 공명하여 성경의 가르침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통하여 실체로 드러난다. 이처럼 성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경전도 당대의 편집과정에서 지역문화의 사유체계에 의해 재해석되어 그 지역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살아있는 종교 문헌으로 살아남는다. 성경은 이미 그 종교적 언어 자체에 축적된 역사의 의미체계와 행동체계가 훈습되어 있다.

성서를 포함한 세계 경전은 하늘에서 떨어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고려 말에 전래된 주자학만 하더라도 남송의 ‘주희’가 불교와 도교, 특히 외래 종교사상인 불교에 대응하여 유학의 우월성을 변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체계이다.(1) 따라서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이 성리학만을 연구하였다는 것은 ‘오류적 사고’이다. 이미 성리학이라는 종교체계에 도교와 불교와 차별되는 정체성이 내포되어 있다. 열린 체계로서의 성경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이 성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없으면 계시문서도 존재할 수 없고, 계시문서라도 인간의 ‘해석’과정을 통해 실천되지 않으면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성경이 특정 제도종교의 소위 경전으로 취급되어 특정 종교 권위의 ‘성경해석권’이 고착시킨 단절된 종교문화에 익숙하다. 그러나 이런 제도종교의 관습적인 성경읽기는 지구촌 사유가 합류하는 현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경읽기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독점적인 권위는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 시대적 당위명령이다. 특히 인류의 고전이라는 ‘권위’가 부여된 성경은 우리가 배우고 실천하여야 할 세계 윤리의 구심적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구도자로서 변찬린의 성경읽기는 현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말 그대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긴급성을 시사하듯 「유언시(遺言詩)」 마저 수록된 『禪房戀歌』(1972)의 후기에서 그는 옛날 성인들에게 배워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구도심으로 불퇴전의 성경연구에 전념한다.(2) 그에게 성경은 “도상의 구도자로서 아직 가인(假人: 인간의 허울을 쓴 거짓인간)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드디어 〈오메가점(點)〉에 도달할” 구도의 사다리로 종교적 황금율이 담긴 ‘말씀모음집’이었다. 이런 성경읽기는 배움과 실천을 일치시키는 수양의 방법으로 새 축 시대의 성경읽기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변찬린은 『성경의 원리』 사부작의 첫머리에서 교리의 도그마에 갇힌 성경의 진리와 작업종교인에 의해 왜곡된 그리스도교의 폐해를 혁신하고자 세계 종교계에 담대한 선언을 한다.

성경은 어느 특정 종교의 전용문서가 아닌 대도(大道)의 문서이다.(3)

물론 여기서 그가 말하는 성경은 ‘성서(The Bible)’를 말한다. 그의 종교적 선언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성서를 그리스도교의 전용 문헌에서 탈피시켜 탈종교한 자리에서 성서를 종교텍스트의 하나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한다. 이로 인해 낡은 현상을 보이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교리와 교파의 성경해석을 포월하면서 당대인과 소통하여 개방체계를 가진 문서로서 새로운 성경해석을 하는 돌파구를 마련한다. 그리고 성경을 그리스도교인만의 문서가 아닌 인류의 경전으로 되살려 놓는다.

둘째, 성서는 절대 존재를 찾아가는 지도로 자리매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뿐만이 아니라 세계 경전에도 있다는 선언이다. 그의 언설은 독백이 아니고 『성경의 원리』에서 다종교적 언어, 간텍스트적 해석, 다학제적 방법론으로서 당대인과 소통하는 언어로 해석해 내었기 때문에 가볍게 평가될 사안이 아니다. 이는 성서가 헬레니즘에 의해 해석된 틀을 포월하여 아시아의 종교적 언어뿐만 아니라 당대의 학문을 포용한 해석을 하여 이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셋째, 성서는 죽어가는 실존인 종교적 인간이 ‘선맥(僊脈)’을 통해 영생의 존재로 탈바꿈하는 문서로서 자리매김한다. 연재 글에서 수차례 강조하고 있지만 한국의 ‘선맥 사상’을 성서의 에녹과 엘리야의 변화의 도맥과 모세와 예수의 부활의 도맥을 이해지평에서 융합시킨 변찬린의 종교적 주장의 핵심이다. 완성된 인간인 풍류체만이 존재의 본향에 가는 창조적 진화의 완성체이다.

변찬린의 선언은 짧은 한마디이지만 외래종교와 사상을 수용할 때 필연적으로 봉착하는 해석학적 고민에 대한 돌파구이다. 종교학의 아버지인 막스 뮐러는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고 말한다. 외래사상이 전래될 때 배타주의와 포용주의와 다원주의는 삼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이 셋을 포월하여 조화시킬 수 있는 ‘포월적 상생’의 지점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다. 변찬린은 이를 “풍류심(風流心)”이라 한다. 풍류심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도 독창성의 남음이 있는 넉넉한 사유체계이다.

우리는 철마다 나는 오곡백과를 먹는 위장으로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듯 다양한 ‘말씀’을 소화할 수 있는 종교적 위장을 가지고 경건한 종교 생활을 해야 한다. 한국인은 다양한 성경을 소화하여 자신의 구도 에너지로 삼는 풍류의 마음은 종교적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며 종교 편식현상을 드러내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런 한국인의 성경읽기 전통을 오늘날 되살려야 한다.

변선환의 절규: 한국의 성경읽기의 전통은 계승되어야 한다

천주교 등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전래 되었을 때 한국의 성경읽기 전통을 계승하여 천주교(교리)와 성서를 이해하려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전통은 계승되지 못하고 서구신학을 배워온 직업종교인에 의해 그 전통이 단절된다. 이로부터 한국 그리스도교계는 서구신학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교단신학의 난립과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적 우월성과 배타성을 강조하며 다양한 선교적 구호아래 ‘신학의 토착화’에만 열중하여 토착화 신학이 전개되었다. 토착화 신학의 방법론에 대해 다양한 모델을 언급하지만 그 자체가 선교(학)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변선환은 이런 가운데 한국의 성경읽기의 전통을 되살리려한 신학자이다. 1992년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변선환은 감리교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의 주재로 열린 종교재판에서 ‘기소장’에 대한 ‘해명서’에서 말한 그의 신앙적 소신은 이를 대변하고 있다.

혹자는 인도 신학자 M. M. Thomas, Stanly Samartha, Raymond Panikkar의 신학을 힌두교적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며 정죄합니다. 그러나 희랍철학이나 독일철학을 사용하여서 만든 서구신학은 혼합주의가 아니고 유독 힌두교나 불교나 유교와 같은 동양철학의 범주를 가지고 복음을 재해석한 모든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적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는 이유를 본인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4)

 

▲ 사진 1: 변찬린(1934-1985, 사진 왼쪽)과 변선환(1927-1995, 사진 오른쪽)

필자는 세간에 알려진 변선환의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박아론과의 논쟁 등 여러 신앙적 소신보다는 오히려 위의 발언이 가진 역사적 무게감이 상당하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천주교 신학자인 한스 큉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론을 빌어 원시 그리스도교의 유다계 묵시문학 패러다임, 고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헬레니즘 패러다임, 중세패러다임, 종교개혁의 개신교 복음 패러다임, 이성과 진보에 정향된 근대 패러다임란 범주로 고찰하며, 오늘날은 탈교파 일치운동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 예견한다. 또한 개신교 교회사가인 아돌프 폰 하르낙은 역사 시대의 복음을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교, 가톨릭으로 발전해가는 그리스도교, 그리스 가톨릭 시대의 그리스도교, 로마 가톨릭 시대의 그리스도교, 개신교 시대의 그리스도교 다섯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미주 5) 이처럼 서구 신학자의 안목에는 그리스도교 문화의 역사에서 아시아의 종교전통은 변수로조차도 고려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온 역사적 발언이기 때문이다.

변선환 사후에 한국 교회와 신학계는 한국의 성경읽기 전통에서 괴리되어 서구신학이 만들어놓은 사유의 틀 안에서 서구 신학자의 목소리만이 주로 들린다. 한국인의 사유체계에서 한국인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되지 않은 성서가 어찌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변선환 혹은 그의 후계자들이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사부작을 보았다면 어떻게 평가할지 필자로서는 자못 궁금하다. 

장자의 종교(언어)와 차자의 종교(언어)는 상호 교차적이고 상호의존적으로 읽어야 한다

길희성, 김경재, 김승철, 김승혜, 김흡영, 류제동, 변선환, 손원영, 윤성범, 이명권, 이은선, 이정배, 이찬수(가·나·다 순)등 일군의 학자들이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를 대화시키며 서구 그리스도교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특히 변선환은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벗’이라고 표현하며 대화를 통해 ‘한국적 신학’을 토착화시켜야 한다는 상징적인 언설을 한다.

유·불·선 한국 종교는 어제 그리스도교 이데올로기의 적이었을는지 모르나, 내일을 향한 오늘의 그리스도교의 좋은 벗이 되었다. 유·불·선과의 대화에서 한국이 인간화되고 토착화한 한국적 신학이 형성되는 날을 고대한다.(6)

한편 이런 신학의 토착화라는 맥락과는 달리 변찬린은 성서적 언어에서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 문헌도 ‘하나님을 찾는’ 종교라는 관점에서 성서해석에 착수한다.

종교발생적으로나 인류문화사적으로 보아도 유일신교는 종교나무의 맨 윗가지에 핀 꽃이다. 종교나무의 뿌리는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이고 그 줄기는 다신교와 범신론이고 맨 윗가지에 유일신의 열매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의식 구조가 미개하고 정신연령이 저급할수록 심령 정도가 낮아 이에 비례하여 그들이 개천(開天)하는 종교의 하늘도 저급종교가 되는 것이다.(중략)(박스)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6–27)

이 성구를 볼 때 하나님은 인간 심전의 개발을 위하여 그들의 전통과 풍속과 지리적 여건과 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 선한 고등종교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날까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오해하였기 때문에 유·불·선을 배척하고 정죄(定罪)하였다. 유·불·선은 차자(次子)의 종교로서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이 전해준 고등종교이며 이들 종교는 참 하나님을 찾아가기 위하여 따먹어도 좋은 종교들인 것이다. 생명나무인 예수의 진리는 장자(長子)의 종교이고 여러 나무인 천사들의 다신교는 차자의 종교들인 것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202-204.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자’의 종교”의 ‘장자의 상징“과 ”‘차자’의 종교“라는 ‘차자의 상징’은 변찬린의 말법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미주 7) 장자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의 하늘을 개천하고 범신과 다신의 하늘을 개천한 다음 마지막으로 개천해야 할 하늘이 삼위신이 계시는 하늘인 것이다”라는 그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장자적 언어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차자의 언어도 이해하여야 한다는 전제가 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한 집안의 장자는 마땅히 집안의 구성원인 차자들의 형편을 알고 보살펴야 비로소 장자의 자격이 있다. 장자를 자처하면서 차자의 속내를 모르면 장자의 자격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세계경전의 ‘말씀모음집’의 회통을 통해서야만이 경전과 경전 간, 말씀과 말씀의 우월성, 차별성, 변별성이 드러난다.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불교적 언어가 우월성을 보일 것이고, 부활을 알고자 한다면 성서적 언어가 독보적일 것이고, 관계속의 윤리를 추구한다면 유가적 언어가 탁월할 것이다. 이처럼 장자의 언어를 추구하는 구도자는 ‘포월적 상생’을 할 수 있는 입각점을 가져야 한다.

하늘의 장자로 수렴될 자들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의 진리를 소상하게 알아야 한다. 만약 진리를 대각하지 못하면 그는 차자의 구원 곧 지체의 구원은 얻을 수 있을지라도 장자의 구원 곧 머리의 성조직(聖組織)에는 참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사고와 인식능력은 머리만이 할 수 있다. 지체는 머리의 명령에 순종할 뿐이다. 그런데 머리조직에 참여할 장자가 진리를 대각못했다면 이 무능하고 저능한 자는 머리 세포가 될 자격이 없는 자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中』, 한국신학연구소, 2019. 278.

축 시대의 직업종교인이 특정문헌을 특정종교의 권위로 내세운다면 새 축 시대의 구도자는  제도종교의 해석적 전통을 해체하고 성인의 말씀을 통해 구도의 길을 가야 한다. 구도자에게 성인의 말씀은 말(言)이라는 믿음체계와 씀(用)이라는 실천체계가 합성된 종교적 언어이다. 구도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영원한 현재의 자리에서 말씀을 절차탁마한다. ‘말씀모음집’인 성경에서 선가적(仙家的) 언어, 성서적 언어, 도교적 언어, 유교적 언어, 불교적 언어 등 모든 종교적 언어를 ‘’(=몸+맘의 합성어)으로 이해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구도자로서 구도의 열매의 구슬을 내놓으며 옛 성인의 작업에 동참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양한 경전의 말씀을 고르고 골라 성인을 초극하려는 구도자 변찬린의 몸부림을 직접 들어보자.

나로 하여금 성인(聖人)의 입에서 여의주를 빼게 하십시오. 성인들은 옛 뱀의 입에서 구슬을 빼었으나 나는 성인의 입에서 그 핵을 좌탈(坐奪)하겠읍니다
나의 장애는 성인입니다.
비약의 장에서 성인들은 내 발목을 꽉 틀어잡고 있습니다. 나를 장악하여 노예로 만든 고성들의 손을 화염검으로 내리치지 않으면 어찌 새 차원이 열리겠습니까?
종교의 성을 훼파하고 성인들의 문을 박차고 구름의 암층을 넘어 용들의 권세를 깨트리게 하십시오.
예수의 여의주인 사랑
석씨의 여의주인 자비
노자의 여의주인 현빈(玄牝)
공자의 여의주인 성인(誠仁)
이 진주를 빼어서 한 실로 꿰겠습니다.
저 아는 척 뽐내는 소인배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성인은 악마다〉라고 갈파하는 나의 대언을 알아듣지 못하고 나를 독설 죄로 고발하며 돌을 들어 정죄하는 저 종교꾼들의 노성을 들어보십시오. 성인의 머리를 디디고 그를 초극하지 못하면 어찌 새 하늘을 개명하겠읍니까?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여래를 만나면 여래를 죽이고,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이고, 노자를 만나면 노자를 죽일 때 새 땅에서 모든 고성들은 부활하여 한 형제가 될 것입니다.(8)

모든 종교문헌은 호환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종교문헌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유·불·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구신학에 의탁해 성서의 진리를 말하면 ‘독백의 선포’가 될 뿐이고, 성서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유·불·도를 말하면 ‘대답없는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다. 폐쇄체계로서의 성경읽기는 직업종교인와 제도종교의 권위주의에 의탁한 낡은 말법이고, 새 시대의 성경읽기는 개방체계로서 교차적이고 상호의존적 종교문헌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는 축 시대의 소통되지 못했던 성경의 말씀을 아우르고 어우러 아름다운 말씀교향곡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말들이 모인 새로운 소리로서 온 우주의 존재를 일깨우는 우주적 공연을 하여야 한다. 동방에 떠오르는 우주의 새벽을 맞이하면서 합창교향곡을 불러야 한다. 새 축 시대이다.

미주

(미주 1) 이용주, 『주희의 문화이데올로기』, 이학사, 2003,; 김미영, 《朱熹의 佛敎批判과 工夫論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1998.
(미주 2) 변찬린, 『禪房戀歌』, 사상사, 1972. 137-138.
(미주 3)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11.
(미주 4) 기독교대한 감리회 서울연회 ‘92 재판위원회, 『교리사건 재판자료 정리·서술집』, 月刊 온 세상 위하여, 2005, 380.
(미주 5) 한스 큉, 이종한 옮김, 『그리스도교 : 본질과 역사 (신학 텍스트 총서)』, 분도출판사, 2014.; 아돌프 폰 하르낙, 오흥명 옮김, 『그리스도교의 본질』, 한들출판사, 2007.
(미주 6) 변선환, 『한국적 신학의 모색(변선환전집 3)』, 한국신학연구소, 1997, 270.
(미주 7) 이호재, 〈풍류심(風流心)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역사적 학맥: 포함론-화쟁론-오증론-장자론〉, 《에큐메니안》, 2020. 10. 13.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사례 2) ‘예수’에 대한 다종교적 언어, 다학제적 방법, 간텍스트적 해석의 용례”를 소개한 바 있다. 변찬린의 저술을 한 번이라고 읽어 본 사람은 필자의 언설에 수긍할 것이라 생각한다.
(미주 8) 변찬린,  『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가나안출판사, 1988, 140-141.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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