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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괘(乾卦)로 본 예수 소전(小傳)(하)

기사승인 2020.06.23  18: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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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과 성서의 해석학적 해후(3)

전 회의 「건괘(乾卦)로 본 예수 소전(小傳)」에서 첫 효를 잠룡이신 예수, 둘째 효를 현룡이신 예수, 셋째 효를 종일건건하신 예수로 소개하였다. 이번 회에는 넷째 효의 물을 얻으신 예수, 다섯째 효인 비룡이신 예수, 여섯째 효는 마귀와 가롯 유다라는 해석과 이런 글을 쓴 변찬린의 의도가 담긴 원문을 싣는다. 이어서 필자가 본 한국 종교문화 지평에서 역과 그리스도교의 대화에 대한 간략한 역사와 평가를 싣는다.

『건괘(乾卦)로 본 예수 소전(小傳)』(하)

4. 물을 얻으신 예수

건위천의 네 번째 효는 다음과 같다. 구사(九四) 혹약재연(或躍在淵) 무구(無咎), 상왈(象曰) 혹약재연(或躍在淵) 진무구야(進無咎也)(비약하는 용이 뛰어 솟았다간 다시 못 속으로 잠겨 힘을 축적한다. 허물이 없다)

용이 물을 얻지 못하면 날 수 없다. 잠룡은 깊은 못속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지만 때가 되면 솟아 올라 풍운조화(風雲造化)를 부린다. 예수가 노니는 물과 못(淵)은 민중의 마음 밭이었다.

예수는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고 유대교에서 외면한 버림받은 민중의 가슴속에 활화산과 같은 자유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3년 동안 온갖 기적으로 행하고 복음을 증거하면서 민중의 의식을 눈뜨게 하는 풍운조화를 일으켰다. 이 때문에 로마의 정치 당국에서는 예수의 행동을 주목해서 보았고 유대교의 종교 당국에서는 예수를 잡아 죽일 위계를 꾸미게 된다.

깊은 못을 얻은 용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다시 물속에 잠기듯 예수는 민중 속에서 높이 뛰어올랐다가 또 민중 속에 잠기는 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민중은 예수를 억지로 임금으로 세울려고 했으나 예수는 거부했다(요 6:15). 예수는 세상 권세를 잡은 임금이 아난 진리의 왕이었는데 민중은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직 민중들의 의식이 진리의 나라로 고양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는데 민중은 자유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로마의 정치적 압정에서 해방되는 정도의 자유만 알고 있었지 그 이상의 자유는 모르고 있었다.

인간의 궁극적인 자유는 사망과 죄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데 이 근원적임 본질적인 자유는 망각한 체 지엽적인 문제인 정치적 자유를 민중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사망과 죄로부터 자유하면 정치적인 자유는 스스로 해결되기 마련인데 타락한 심령을 개조하지 못한 민중들은 그것을 모르고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민중 위에 높이 나는 용처럼 풍운조화를 부리다가도 임금을 삼으려고 하면 다시 민중 속으로 내려와 그들의 마음 밭에 복음의 씨를 심는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가 마귀에게서 시험을 받을 때도 세상 권력을 다 주겠다는 유혹을 받았다. 인간적인 욕망으로 볼 때 임금의 자리를 거절할 자는 없다. 그러나 예수는 세상 임금의 자리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자신은 진리의 왕임을 천명했다(요 18:37-38) 세상 임금의 대표격인 빌라도는 진리의 왕인 예수에게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이것은 세상 나라 임금들은 진리를 모르면서 왕 자리에 있음을 뜻한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 권력과 폭력으로 인간을 다스리고 있으니 세상이 어찌 평화할 수 있겠는가.

예수는 진리의 씨를 민중의 마음 밭 속에 심어주기 위해 민중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했으나 그는 항상 민중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면서도 민중을 넘어서 초월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만유에 내재하시면서 초월하듯이 예수도 민중 속에 있으면서 항상 민중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고 하늘나라가 무엇인가를 교훈하면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5. 비룡이신 예수

건이천의 다섯 번째 효는 다음과 같다. 구오(九五)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 상왈(象曰) 비룡재천(飛龍在天) 대인조야(大人造也)(날으는 용이 하늘에 있다. 대인을 보는 자는 이(利)하다)

3년 동안 낮에는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며 밤이면 한가한 곳으로 나가 기도하던 예수도 십자가로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가이사라 빌립보 노상에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말했으나 알아듣는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예수는 고독 속에 홀로 길을 가고 있는 존재였다. 3년 동안 스승과 침식을 같이 한 열두 제자들은 예수의 심정을 모르고 있었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품에 돌아가는 승천하는 비룡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랐다. 예수는 자신의 용모를 변화시켜 햇빛보다 밝은 영광 속에서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서 별세를 의논하고 있었다(눅 9:28-33).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왜 예수가 변화 속에서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고 있는 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변화한 몸으로 부활체를 선험하고 있었는데 부활의 뜻을 모르는 제자들은 변화산에서도 잠에 빠져 있었다. 변화산에서 하산한 후 예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가 십자가에 달린 후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암시했으나 여전히 알아듣는 제자가 없었다.

예수의 공생애 3년은 쉬지 않고 일한 바쁜 생애였으나 예수는 한없이 고독한 인자였다. 그는 자기가 죽을 때가 된 줄 알고 제자를 시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탄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민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환호한다.

예수는 진리의 왕,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여 타락한 세상 나라 권력과 종교에 의해 정죄를 받는다. 예수는 자기의 죽음을 상징하는 성만찬을 베푼다. 포도주로 자신이 흘리는 피가 속죄의 피임을 나타내고 떡으로 자신이 진리의 만나임을 나타낸다.

유대교 제사장과 밀약한 가롯 유다는 은 30개로 스승을 팔아넘긴다. 올리브 산에서 밤새 기도할 때도 세 제자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수마(睡魔)에 빠져 있었다. 오직 혼자인 예수는 피같은 땀을 흘리면서 “이 죽음의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라고 피눈물로 간구한다. 이때 가롯 유다의 인도를 받은 대제사장이 보낸 깡패들이 예수를 잡아 로마의 법정에 넘겨준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와 종교가 유착될 때 항상 악을 행하게 된다. 예수는 로마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았으나 죽일 만한 죄목이 없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 했으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어리석은 민중들의 고함소리에 굴복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하고 빌라도도 자기는 죄 없다고 손을 씻는다.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피 값을 자기들과 자기들의 후손이 담당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로마 군병을 시켜 골고다에 끌고 나가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다.

아리마대 요셉이 파놓은 무덤 속에 예수의 시신을 옮겨놓고 로마 군병들과 바리새인들이 지켰으나 3일 만에 예수는 부활하여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예수는 부활 후 40일 동안 이 땅 위에 머물면서 제자들에게 복음전파를 부탁하고 구름타고 승천한다. 구름타고 승천하는 예수를 역에서는 등천(登天)하는 비룡으로 상징하고 있다.

잠룡으로 시작한 예수는 비룡으로 등천(登天)하여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구세주가 되었다. 그러므로 비천(飛天)이신 예수를 보면 구원받기 때문에 이견대인(利見大人)이 된다.

맺는말

건위천의 여섯 번째 효는 항룡유회(亢龍有悔)인데 이것은 마귀와 가롯유다에게 해당되는 것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주마간산격으로 건위천괘를 풀어 예수의 생애를 소고(小考)했다. 건괘를 가지고 사복음을 풀어보면 책 한 권의 분량이 될 것이다.

필자가 이런 유의 글을 쓰는 까닭은 겸손한 기독교 목회자들은 좀 더 다른 종교에 대하여 따뜻한 사랑을 품고 그들의 경전을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 종교문화지평에서 성서와 역의 대화역사와 그 과제

한국 종교문화의 지평에서 ‘역과 성서’를 대화시킨 작업은 그리 많지 않다. 정약용의 『주역대전』에서는 명시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천주교 서적을 통한 그리스도교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연세대 신학과 교수였던 한태동은 「역위(易緯)의 역사철학」(1970)에서 역의 역사를 소개하며 “팔괘와 만물과의 연계관계를 상수의 기초위에 놓고 재건”한 역위의 역사철학을 한비자, 소강절, 율곡, 한국의 비결사상인 정감록까지 그 유래를 고찰하고 있다. 1970년대에 재미 신학자 이정용은 그리스도교 신학과 역 철학을 선교신학적 관점에 다채롭게 해석한다.

한편 변찬린은 「성서와 역의 해후」(1978)라는 글을 발표하였고, 이정호는 성서와 정역적 측면에서 주역을 해석한 『주역정의(周易正義』(1980)를 발표한다. 또한 변찬린 사후 10여 년 지난 후 김흥호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주역과 다경전적인 해석을 『주역강해』을 통해 선보인다.(1)

2006년 구약학자 박신배는 역의 신학, 도의 신학, 천지인 신학 등을 포함하여 한국에서 태극사상을 언급한 신학을 『태극신학과 한국문화』에서 통합을 시도한다. 그러나 1977년 4월 18일에 변찬린이 삼태극과 태극 문양을 새 교회 운동의 상징적 표식으로 사용하며 그 종교신학적 의미를 밝힌 내용(2)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지면 관계상 자세히 살필 수 없지만 성서와 역의 간텍스트적 해석에서 변찬린은 “건괘를 예수”, 한태동은 천지비(天地否)를 “사복음에 적혀있는 예수의 생애”로 해석하며(3), 김흥호는 건괘와 수뢰둔(水雷屯)을 “예수 그리스도”, 화천대유(火天大有)를 “하나님”으로 해석한다.(4) 이런 다양한 관점은 해석자의 역 해석의 준거점에 의거해 다른 해석을 할 수는 있지만 해석체계에 일관성과 통합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비평적 관점에서 성찰해야 한다. 참고로 건위천의 상구 즉 ‘항룡유회(亢龍有悔)’에 대해 변찬린과 김흥호의 괘해석은 상반된다. 이글에서는 변찬린의 역 해석의 맥락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 변찬린, 『요한계시록 신해』(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87.

변찬린은 「성서와 역의 해후」에서 복희팔괘는 아담에게 주어진 생산괘이고, 문왕팔괘는 노아에게 주어진 패륜괘이며, 정역팔괘는 아브라함, 야곱, 요셉에게 주어진 부활괘라고 해석한다. 즉, “문왕팔괘를 전개시킨 64괘가 화수미제(火水未濟)로 끝나는 원인도 타락된 구약사가 미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변찬린은 강조한다. 역의 텍스트를 성서와 포월된 지평에서 융합시키는 변찬린은 건괘의 상구가 “항룡유회인데 이것은 마귀와 가롯 유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마지막 높은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이지 인간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변찬린은 〈성경강의〉에서 누가복음 17장 7절과 8절의 성구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라는 성구는 주인은 주인의 자리가 있고, 종은 종의 자리가 있다는 경구이다. 주인의 자리를 종이 대신할 수 없으며 종은 주인의 자리를 넘보며 실족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그는 “종교는 겸손의 도를 가지고 완덕(完德)에 이르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도인(道人)은 마지막 도의 자리를 남겨둔다. 마지막 도의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라고 말한다. 시조 인간과 마귀가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이 성서의 언어로 타락이기 때문에(5) 하나님의 자리인 상구에 간 항룡(亢龍)은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을 자처한 마귀와 가롯 유다라고 변찬린은 해석한다. 변찬린의 성서와 역의 상관해석은 다음에 또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한국 홍역(洪易)학회장인 이찬구(겨레얼 운동본부 사무총장)는 변찬린의 ‘성서와 역’의 간텍스트적인 해석학적 대화를 이렇게 평가한다.

변찬린은 “성서와 역(易)은 만날 수 없다”는 기존의 낡은 관념을 일거에 깨뜨리고 둘 사이를 해후시키고 중매시켰다. 역사적으로 역과 성서는 상고시대 동과 서를 대표하는 하나님의 진리체계였다. 다만 그 표현 양식의 차이로 서로가 다른 것으로 우리가 착각해온 것이고, 이것을 변찬린이 하나로 연결시켜 준 것이다. 특히 주역은 성언호간(成言乎艮)이라 하여 이 간방(艮方)을 중요시하는데, 변찬린은 이 간방(=한국)에서 훌륭한 지혜가 나온다고 재해석했다. 이 말을 토대로 복희팔괘, 문왕팔괘에 이은 제3의 정역팔괘의 출현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성서에서도 이 3괘도는 아담, 노아에 이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때부터 어머니(=땅)의 역할이 강조된다고 본 것이다.

혹자는 변찬린이 성서와 역의 대화를 시도한다고 ‘탁상머리의 구도자’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텍스트를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의 문서’로서 이해하는 변찬린은 역사시대의 창조적 소수자인 새 ᄇᆞᆰ(6)에게 “역사적 성인(成人)=성인(誠人)=성인(聖人)”이 될 것을 당부한다. 새 ᄇᆞᆰ은 역사적 지평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고, 경서를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계시키고 있다.

ᄇᆞᆰ이여
강가에 앉아 하도낙서(河圖洛書)가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말고
신구(神龜)와 우골(牛骨)을 태워 앞날을 문복(問卜)하지 말고
백운(白雲) 자욱한 청산(靑山)에서 천서(天書)를 찾지 말아라.
지금은 성인(聖人)없는 때
허나 낙심하지 말아라.
씨알이 익어 성인(成人)이 되었으니
이 성인(誠人)이 곧 성인(聖人)이 아니뇨?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혈하(血河)에서 역(易)을 얻고
균열(龜裂)된 포신(砲身), 녹쓴 병사(兵士)의 철모(鐵帽)에서
갑골문(甲骨文)을 읽고
시대를 예견하며 시산(屍山)의 골고다에서
기린(麒麟)을 보는 견자(見者)만이 
역사의 뜻과 암호를 정각(正觉)한 이 시대의 산 아들이다.
ᄇᆞᆰ이여
얼마나 많은 구도자들이 
경서의 미로(迷路)를 방황하다가 미쳐 버렸고
거짓 예언자(豫言者)로 전락되었고 뜨내기 점쟁이로 퇴화(退化)했던가?
헛된 욕심으로 시운(時運)의 산(算)가리를 잘못 놓고
혹세무민(惑世誣民)했던가(7)

변찬린은 성서와 역의 두 경전텍스트를 직접 대화시키는 방법을 통해 역의 부호에서 성서의 역사를 읽어내고, 성서의 역사에서 역의 부호로 해석하는 새로운 해석학적 지평을 개척하였다. 특히 성서와 주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완성된 제3의 역인 정역까지 성서해석에 적용한 것은 ‘역 해석사’에서 선구자적인 연구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미주

(미주 1) 김흥호,  『周易講解』 (서울: 도서출판 사색, 2003), 18-75.
(미주 2) 이호재, 『포스트종교운동』 (서울: 문사철, 2018), 263-264. 이에 대해서는 다른 회수에서 자세히 논한다.
(미주 3) 한태동, 「易緯의 歷史哲學」, 『현대와 신학』6(1), 1970, 54-55.
(미주 4) 김흥호, 같은 책, 건괘는 30-32, 화천대유괘는 271-282 참고할 것.
(미주 5) 변찬린, 『성경의 원리(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497-514.
(미주 6) 새 ᄇᆞᆰ은 변찬린이 창조한 인간형으로 역사시대와 영성시대의 가교적 인간으로 새 축 시대를 알리는 구도자이다. 이호재, 『한밝 변찬린(한국종교사상가)』 (서울: 문사철, 2017), 394-427.
(미주 7) 변찬린, 『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서울: 가나안 출판사, 1988), 160-161. 이 책은 충분한 교열이 이루어지지 않아 원문과 한자와 한글 등이 혼용되고, 일부 오탈자가 있다. 앞으로 인용시에는 원문을 기준으로 표기토록 한다. 한글과 한자가 병행되는 것은 한글세대를 위하여 적은 것이며, 원문에는 한자로 적혀있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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