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선교신학으로서의 토착화 신학은 토착될 수 없다

기사승인 2020.03.03  17:27:25

공유
default_news_ad1

- 변찬린의 선맥신학과 유동식의 풍류신학(2)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573.

유동식은 1975년의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 1983년의 「풍류도와 기독교」, 1988년의 『풍류신학으로의 여로』, 1997년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과 2006년의 『풍류도와 예술신학』에서 신풍류신학을 전개해 왔다. 무교문화론과 풍류문화론이 혼재한 가운데 풍류신학을 전개한다. 2008년의 「풍류신학」에서는 풍류신학이 통전적인 신학으로서 ‘한’의 신학으로서의 종교신학, ‘삶’의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 그리고 ‘멋’의 신학으로서의 예술신학을 주장하며 예술신학을 풍류도의 본체로 보고 있다. 무교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1)

한국 토착화신학, 문제 없는가

토착화 신학을 추구하는 신학자의 기본적인 사유구조 자체가 그리스도교 문화가 피선교국의 종교문화를 ‘계몽’해야 한다는 내면화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직 그리스도교 문화에 의해 한국 종교문화는 완성되어야 한다는 신앙적 영성(靈性)이 학문적인 지성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풍류신학은 무교, 유불선을 포함한다는 풍류도, 그리스도교와의 세 종교에 대한 범주적 구별이 명확하지 않고 선맥과는 단절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풍류신학이 신선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나 혹은 전적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아니고 모호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기인한다.(2) 유동식이 일본 유학 후 한국 종교의 원형을 연구한 업적인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에서 ‘풍류’가 제도종교는 아니지만 고대에는 무교로, 신라시대에는 화랑도에서 풍류문화가 표출되었으며, 고려시대는 불교, 조선시대는 유교라는 한국 종교사를 그리며, 그리스도교의 문화에서 한국 종교가 완성된다는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풍류도가 한국 무교에 의해 표출된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창조적 기제인 선맥은 무맥을 포월할 수 있지만, 수동적 기제인 무맥은 선맥을 포월할 수 없다. 이는 풍류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물음이다. 만약 풍류신학뿐만 아니라 토착화를 표방하는 신학이 그리스도교 문화를 통해 한국의 종교문화가 성취된다는 사유구조를 가지고 그리스도교 신앙과 한국의 종교성을 토착화시키려 한다면 미완성의 신학에 머물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풍류신학이 선교신학의 입장에 머물기에 한국 종교문화의 본령인 풍류와 신맥사상, 그리고 성서의 변화와 부활이 ‘이해지평’ 안에서 만나지 못한지도 모른다. 강조하지만 ‘풍류’의 역사가 『선사』에 기원한다면 당연히 한국의 선맥사상에 대한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풍류신학은 앞으로 한국의 선맥사상의 논지를 수용 혹은 반박 혹은 변론을 하면서 풍류신학을 재정립하여야 한다.

▲ 태백산 천제단 - 선맥의 상징적 고향

풍류신학은 한국의 지고신인 하늘님의 정체성 등 신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종교학의 질문이며, 토착화 신학의 첫 질문이기도 한 한국 고유의 하늘님 신앙과 이의 토착적 근대체험인 하늘님(지고신) 체험에 대해 막연히 성서의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다시 고려하여야 한다.(3) 윤승용은 “한국 민족종교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가 최고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 최고신이 인간에 내재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족종교에 동양의 전통종교에서 두드러지지 않았던 최고신의 도입은 서학의 유일신 관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러한 최고신 중심의 논의는 민족종교의 다양한 신관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장애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근대 한국 고유의 지고신 체험을 한 신종교는 개벽사상과 지상선경에 ‘완전한 인간’이 사는 한민족의 원형적 이상향, 즉 ‘원시반본(原始反本)’한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4) 이는 한국의 지고신과 그리스도교의 신관이 지향하는 종교적 속성이 다르다는 단적인 예이다. 풍류신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토착화 신학은 근대 신종교 사상을 신학적 사유 체계 속에 거의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특히 ‘풍류신학’이 ‘풍류부재’의 신학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한 풍류신학은 화랑도와 풍류도를 동일 지평에 놓고 비교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한국도교학회 창립회장인 도광순은 “풍류도라는 이름은 있었으되 화랑도(花郞道)라는 일컬음은 없었는데, 일본학자들이 화랑도(花郞道)라고 호칭하고 그것을 곧 무사도(武士道)라고 지목하게 되자 이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비판적으로 답습되고 있다. 그것이 「무사도」였다면 「사선(四仙)」의 존재는 의미 무색하게 된다”고 지적한다.(5) 풍류도가 화랑도(花郞道)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역사 왜곡이다. 풍류신학은 “현묘한 풍류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샤머니즘, 특히 한국적인 샤머니즘이었다”(6)라고 말한다. 이처럼 유동식은 무교와 선맥을 혼돈하고 풍류도와 화랑도 등의 역사적 조직을 통해 이해함으로 인해 오히려 궁극적 인간과 그 삶을 말하는 풍류의 사유체계를 곡해시키고 있다. 반면에 선맥신학은 한민족의 원형적 종교적 정체성인 풍류는 역사적 조직과 실체가 아닌 인간의 삶 자체에 담긴 창조성, 즉 풍류성이라고 말한다.

한국 종교의 지평에서 풍류는 창조성의 부호이고 무교는 수동성의 부호이다. 풍류는 ‘무류(巫流)’가 아니고 ‘선류(僊/仙流)’이다. 창조성인 종교적 기제인 선류가 수동성의 종교적 기제인 무류를 통해 그 창조성을 드러낼 수 없다.(7) 변찬린의 풍류는 인간과 삶에서 구현되는 창조성 그 자체이다. 풍류가 인간의 몸에 체화될 때 풍류체란 ‘신령한 몸’으로 탈바꿈하며, 인식체계에 적용될 때에는 다양성의 종교문화가 ‘풍류심’을 통해 회통하며, 삶에 적용될 때에는 자유자재한 ‘풍류객’의 형태를 가진다.

▲ 변찬린, 『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1965년 유고에서

1세대 토착화신학에 대한 비판

필자는 풍류신학이 온전한 신학으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른 학자의 주요 비평과 견해를 적어둔다. 정당한 비평의 바탕 위에 형성된 담론이 한국 신학과 학문을 풍성하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변선환은 “유동식의 풍류신학은 엘리아데의 비역사적인 우주종교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마음속에 열리는 비역사적인 신화의 세계만 알았지 땅 위에서 절규하는 민중의 한을 정치 사회적인 차원에서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풍류신학의 엘리트 성향을 비판한다. 이런 지적을 풍류신학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민중의 종교인 무교에 바탕을 둔 풍류신학이 왜 민중을 보듬는 ‘민중’신학으로 나타나지 않고 ‘엘리트’신학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이는 풍류의 지향점과 무교의 지향점을 올바르게 범주화하지 못한 풍류신학의 난맥상이다.

풍류신학은 한국 종교 지평에서 안착하기 위해 풍류에 대한 ‘멋진 한 삶’이 한국 종교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새롭게 개념정립을 하여야 한다. 김정은은 ‘한 멋진 삶’으로 구조화한 3.1적 구조의 삼위일체적 하나님과의 개념과 관계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즉 ‘한’이 아닌 ‘멋’이 풍류도를 대표하는 범주개념이 될 수 있냐고 반문한다. 풍류신학은 적극적으로 ‘ᄒᆞᆫ’사상, ‘ᄒᆞᆫᄇᆞᆰ’ 사상과 충분한 대화를 모색하여야 한다. ‘멋’이 어떻게 ‘한’국의 한보다 더 상위범주가 될 수 있을까?

김광식은 유동식과 윤성범의 토착화 신학의 노력에 대해 서구신학의 바탕 위에 한국적 전통문화의 유사점을 찾아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환원주의 신학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8) 이런 문제는 토착화 신학을 추구하는 신학이라면 ‘의심의 해석학’으로 고려하여야 하는 근본적인 지적이다. 토착화 신학은 그리스도교와 피선교국의 종교문화와 상응하는 해석학적 지평을 확보하여야 하는 쉽지 않은 학문작업이다. 우리는 이런 학문적 작업에 배타적인 태도나 제3자의 입장에서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종교적 권위가 학문(신학)의 사유를 제한하거나 억압하는 변선환과 서남동 같은 선구자적인 신학적 작업에 부당한 종교권위가 간섭하는 불행한 사태가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정통과 이단’이라는 중세기적 신학적 사유방식으로 21세기의 한국 신학이 전개되어서도 안 된다. 유일신의 사유체계를 연구하는 신학자 등 직업종교인이라면 창조주에 버금가는 넓고 깊은 열린 해석학적 지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김흡영은 풍류신학이 한국 종교문화에서 한국 신학의 근본적인 상징을 찾은 ‘복고의 해석학’의 공로는 인정되지만 풍류신학이 역사적이며, 실천적인 삶의 정황에 인식이 부족하며, 특히 “송천성은 풍류신학의 풍류는 한자용어이며 따라서 중국적 개념인 풍류(風流)가 어떻게 한국적인 것이냐고 내게(김흡영) 심각하게 반문한 적이 있다. “풍류가 과연 한국적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풍류신학은 대답해 주어야 할 것이다.”라는 요청이 있다.(9) 또한 한흥섭은 한국의 원시적 종교현상을 무교라고 했을 때 중국 무교와의 상관관계에 모호해질 수 있다는 점을 해명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토착화 신학자는 한국 종교문화가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에 동아시아 지평의 맥락에서 한국 신학의 정체성을 모색하여야 한다. 윤성범의 효와 성의 신학, 김흡영의 도의 신학, 박종천의 상생의 신학도 유사한 질문을 받을 수 있다. 풍류신학의 사유체계로 송천성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10)

신학자들은 풍류신학의 관점에서 성서해석에 적용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풍류신학은 조직신학적으로 신학체계를 정립하여야 온전한 신학으로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풍류신학은 한국 신학이 아닌 풍류를 통한 철학적 사색의 결과물에 불과할 뿐이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계의 장기 베스트셀러였던 유동식의 『한국 종교와 기독교』에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결정한 것을 무교라고 하며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고, 한국의 종교적 중핵인 풍류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성서해석에 적용되지도 않는 채로 ‘신학’이라는 이름을 붙여 종교계에 유통되어야 하는지는 필자의 비평영역이 아니다. 신학계에서 판단할 문제이다.

신학계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의 학자들도 비평에 가세하고 있다. 최치원 연구 전문가인 최영성은 다른 전공의 학자들은 풍류신학이 사료의 전거가 빈약하며 아전인수격의 해석이 있다는 비판하고 있다. 류병덕, 민영현 등은 한국 종교의 원형에서 선적인 전통을 발견하지 못하고 한국의 기층문화를 ‘덮어놓고 샤머니즘’이라는 관점으로 재단하는 무교문화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또한 권상우는 단군신화가 최남선과 유동식에 의해 무속화되어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고 반론한다. 즉 풍류의 전거에 대한 해석문제와 한국 종교문화의 본류가 무맥인가라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강조하지만 풍류신학은 한국의 선맥사상과 직접적인 대화를 하여야 한다. 선맥과 대화없는  토착화 신학은 특정 종교영역의 환원주의적 신학에 불과할 수도 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의 신선사상과 도교사상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빈약했지만, 1930년대 이루어진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이종은 역)가 1977년 출간되었고, 1984년 차주환의 『한국의 도교사상』이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특히 한국도교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한국도교학회가 1982년 창립되어 2019년 현재 ‘한국도교문화학회’에서 발간하는 『도교문화연구』 51집이나 축적되어 있다. 풍류신학은 한국 선맥사상, 풍류도, 유불도의 삼교관계, 근대 신종교 사상을 중심으로 다양한 연구성과를  참고하여야 한다.

토착화 신학이 선교신학적 태도를 가지고는 한국 종교문화에 토착화될 수 없다. 서구신학의 대리전을 펼치고 있는 한국 신학이 한국 종교 지평에 조화롭게 융합하기 위해서는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한국 종교문화를 성서해석과 상응하는 해석학적 태도를 가지고 연구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찬수의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에서 말한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천주교 연구든 개신교 연구든 호교론적인 시각은 함축적으로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교가 한국 안에 들어와 있는 한국의 종교임을 드러내야 할 때에는 한결같이 자기 종파의 민족적 태도를 내세워 그리스도교의 한국적 정체성을 밝히려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중략) 어찌보면 이것은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자 스스로 민족적인 감정에 호소해서 그리스도교도 한국의 종교임을 알리려는 선교론적 발상의 일환이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는 한국 안에 뿌리내리지 못한 외래종교임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1)

이로 볼 때 토착화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한 풍류신학도 결국은 선교신학의 한 방편이고 한국 종교문화의 중핵인 ‘선맥과 풍류와 지상선경’을 메타포로 하는 창조적인 풍류적 기제와 무교의 수동적 기제를 오해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창조성인 풍류(도)가 어찌 수동성인 무교에 의해 표출되는 종교문화로 수용될 수 있는가?

토착화 신학은 성서텍스트의 사유구조와 한국 종교의 사유구조를 중매시킬 수 있는 핵심키워드를 포착하여 해석학적 이해지평에서 융합시키고 포월시켜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이라도 유동식의 풍류신학은 변찬린의 선맥신학과 대화하여 새로운 담론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잠정적으로 한국의 토착화 신학이라는 한정된 범주에서 무교를 중심으로 한 유동식의 풍류신학, 유교를 중심으로 한 윤성범의 성의 신학, 불교를 중심으로 한 변선환의 ‘대화신학(?)이라고 한다면(미주 12) 풍류를 중심으로 변찬린의 선맥(僊/仙脈)신학이 종교 유형별 토착화의 역사를 주도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13)

다음에는 ‘새 축 시대와 축 시대의 원시반본(原始反本): 변찬린의 ‘ᄒᆞᆫᄇᆞᆰ’과 김상일의 신서학(新西學)’을 주제로 얘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미주

(미주 1) 유동식, 「풍류신학」, 『한국신학, 이것이다』, 한들출판사, 2008, 256-269.
(미주 2) 유동식,『風流道와 한국의 宗敎思想』, 연세대출판부, 59-71.
(미주 3) 한국의 지고신에 대해서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신이름마저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지고신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여전히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한 영역이라는 점만 지적한다.
(미주 4) 윤승용, 『한국 신종교와 개벽사상』, 모시는 사람들, 2017, 149-227.
(미주 5) 도광순은 유동식의 저술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신라의 풍류도와 도교」, 『도교학연구』6, 1990, 113페이지에서 본문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유동식의 『韓國巫敎의 歷史와 構造』의 82페이지에서 화랑도를 풍류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미주 6)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대한기독교서회, 1969, 24-25.
(미주 7) 이호재, 「한국 재래종교(在來宗敎)의 ‘구원’관」, 『신학과 교회』10, 2018, 111-116.
(미주 8) 김광식, 「토착화 신학의 해석학적 국면에 대한 연구」, 『省谷論叢究』16, 1985, 175-222.
(미주 9) 김흡영, 『道의신학Ⅱ』, 동연, 2012, 125-126.
(미주 10) 신은경, 『風流: - 동아시아 美學의 근원 -』, 보고사, 1999, 19-92.
(미주 11) 이찬수,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9, 150-151.
(미주 12) 김흡영, 『道의신학Ⅱ』, 같은 책, 119-132.
(미주 13) ‘잠정적’이란 교회교의학 모형, 정치신학 모형, 문화신학 모형, 구성신학 모형, 과정신학 모형 등 다양한 모형 가운데 문화신학 모형에 속하는 토착화 논쟁에 국한해 보았다는 의미이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