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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신학’자 김흡영 교수가 한국신학과 세계신학의 나가야 할 길을 말한다

기사승인 2021.01.19  15: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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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학자의 물음에 신학자가 한국신학으로 답하다

이 인터뷰는 2020년 11월 18일부터 2021년 1월 9일까지 대면 인터뷰, 유선 통화와 이메일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밝힙니다. - 필자 주

종교학자: 교수님 반갑습니다. 아시아신학연합회 공동대표, 한국조직신학회장, 강남대학교 신학교수를 은퇴하신 후에도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의 석학교수를 역임하는 등 힘차게 일하고 계시는 김흡영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지금도 해외의 연구요청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큐메니안 독자들에게 간단하게 신년 인사 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김흡영 교수 근영

신학자: 에큐메니안 편집진은 칼럼 마당까지 마련해주며, 제 연구에 관심을 가져주셨는데 그동안 해외 논문요청에 매달리느라고, 글을 제대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캠브리지(Cambridge), 옥스퍼드(Oxford), 티엔티클락(T&T Clark), 블랙웰(Blackwell), 블룸스베리(Bloomsbury) 등 세계 주요 출판사들이 차세대 신학자들의 교육을 위한 핸드북을 만드는데, 그 교재들에 실릴 챕터(chapter)를 요청한 것들이었습니다. ‘도의 신학’과 한국신학을 소개하고 후학들을 지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호재 교수님께서 이렇게 독자들과 만날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에큐메니안의 편집진과 독자들에게 먼저 심심한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어려운 시절이지만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올해는 지면으로 종종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도의 신학’의 대선언: 한국 신학계가 서구신학의 대리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학자: 아주 기본적인 질문이지만 단도직입적으로 하나 여쭈어보겠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은 이도(異道)와 외도(外道)로 취급되는 상황이 한국 그리스도교계에서도 유비적인 역사적 상황이 벌어지는 듯합니다. 한국신학은 마치 서구 신학의 전시장 혹은 대리전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서구 신학과 서구 신학자에 의탁하지 않으면 ‘신학’을 할 수 없는지요?

신학자: 우리 민족은 산골짜기 지형 때문에 그런지 가진 것을 지키는데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상을 받아드리기도 힘들지만, 일단 받아드리면 끝까지 원형을 보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그렇고, 공산주의도 그렇고, 자본주의도 그렇고. 특별히 이미 근본주의화 돼서 우리에게 전래된 개신교는 더욱 그렇습니다. 주자학의 약점을 보강하려 양명학이 이미 나왔는데도 주자학을 끝까지 고집해서, 약삭빠른 일본이 양명학을 받아드리고 개방하여 순식간에 우리를 앞지르고 심지어 지배까지 하게 된 데에는 후기 조선 성리학자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학자들이 세계에서는 이미 도태되어가는 때 지난 낡은 신학들에 매달려 옹고집을 부리다가는, 성령께서 마련해 주신 이 땅의 위대한 선교 은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훼손하는 죄와 직무유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신학은 서구신학을 이해하려고만 애쓰는 학생 근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때때로는 오히려 그들의 홍위병이 되어 이 땅에서 살벌한 대리전을 치루며 서로 싸우며 교회를 갈라놓는 작태를 벌리곤 했습니다. 제가 바라기는 앞으로 후학들이 더 이상 이러한 서구신학에 주눅 들지 말고, 서구신학의 수련생이라는 자격지심을 넘어 자기 신앙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고백하는 주체적인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과 배짱을 가졌으며 합니다. 서구에서는 신학이 이미 지나칠 정도로 발전돼서 더 이상 창의적인 새로운 신학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21세기이지만 그들은 천여 년 이상 쌓아놓은 큰 업적들에 각주달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대단한 사상들은 우리의 정신문화와 동양 사상을 모른 채 형성된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고 지구촌적 상황에서는 한 쪽에만 쏠린 매우 부족한 것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정신 자원들을 이 땅에 베풀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신학자들에게 우리 땅에 숨겨놓은 이 미개발의 정신유산들을 개발하여 위기에 접한 세계신학을 구하고 발전시켜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지금부터는 서구신학자들은 신학할 것이 그리 많지 않고, 오히려 신학을 개혁하고 개발하여 서구신학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글로벌 그리스도교를 이끌어 나갈 사명은 우리 신학자들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도의 신학’: 생태신학 등 세계 신학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다

종교학자: 세계적인 지구학자이자 생태신학자인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4-2009)의 제자인 메리 에버린 터커(Mary Evelyn Tucker)와 존 그린(John Green) 등이 교수님의 영문저서 『A Theology of DAO』를 소중하게 평가하고 서구 신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세계적인 신학이라고 평가한다고 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 『A Theology of DAO』의 겉표지

신학자: 20세기 후기 지구생태계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그 대안을 종교사상에서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그중에 중요한 연구가 하버드대학 세계종교연구소에서 메리 에버린 터커와 존 그린이 주도한 <종교와 생태계> 컨퍼런스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연구는 수년간에 걸쳐 모든 종교들을 망라하여 시도되었는데, 터커와 그린의 결론은 세계종교사상들 중 가장 자연친화적이고 생태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전통은 동아시아의 유교와 도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프로젝트가 가장 활발하던 때, 제가 마침 그 하버드 연구소에 있었고, 적극적으로 컨퍼런스에 참여하게 되면서 두 분과 깊은 교제를 맺게 되었습니다.

세계교회가 생태신학에 대하여 내놓은 문서들 중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이 현 프란체스코 교황이 2015년 발표한 회칙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 입니다. 이 회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주요한 인물이 뉴욕 시에 있는 포덤대학의 교수였던 토마스 베리라는 가톨릭 신학자입니다. 그 분은 20세기 후반에 생태위기를 가장 중요한 영성적, 신학적 문제라고 끌어올리는 데 큰 공한을 한 생태신학의 선구자입니다. 베리 교수에게는 두 부분의 애제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터커와 그린 부부였습니다. 베리는 앞으로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원은 결국 종교적 영성인데 그 중에서도 유교와 북미주 토착민들의 영성전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애제자 터커에게는 유교(성리학)를, 그린에게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토착 영성을 박사과정에서 전공하게 하였습니다. 그들 부부가 지금은 예일대학교 <종교와 생태학 포럼>의 대표로서, 세계에서 가장 앞장서서 생태학과 종교 분야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입니다. 이러한 동아시아 사상에 대한 이해와 배경 때문에 나의 『도의 신학』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학생들이 앞으로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추천해 주었지요.

종교학자: 그런 계기가 있었는지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세계신학계에서 핫이슈인 생태신학의 담론이 벌어지고 있는 담론현장에서 ‘도의 신학’등 한국신학자도 이 방면에 적극적인 발언을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신학자: 앞으로 생태신학은 서구형에서 이탈하여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에코-페미니즘조차도 서구적이란 한계를 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 ‘도의 신학’적 생태신학의 입장을 에코-다오(Eco-Dao)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세계학계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곳에서 논문 요청을 해왔습니다. 옥스퍼드의 윌리-블랙웰과 티엔티클락을 인수한 블룸스베리 출판사 등의 종교와 생태학 핸드북들에 제 챕터들이 실렸지요. 미국종교학회의 종교와 생태학 분야에서도 초청을 받아 발표를 했습니다. 서구학자들이 제 신학적인 입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와 같이 도와 관련된 유교와 도가 사상들이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라고 인식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앞으로 한국신학의 전망이 아주 밝습니다. 저는 총론적인 화두를 던졌지만, 앞으로 후학들이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각론과 더불어 더욱 발전시켜주었으면 합니다.

‘도의 신학’: 조직유학(Confuciology)과 그리스도교 신학(Theology)로 종교간 대화모델을 유형화하다

종교학자: 작년에 출간한 『왕양명과 칼 바르트』(예문서원)라는 책은 28년 전 미국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 박사논문을 거의 그대로 한국말로 번역한 책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신 정통신학자인 칼 바르트와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양명의 사상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교 신학(theology)과 대등한 개념의 조직유학(confuciology)을 도입한 것은 지금 보아도 선구적인 신학적 모델의 대화유형인 것 같습니다.

▲ 『왕양명과 칼 바르트』의 겉표지

신학자: 먼저 제 졸저에 대해 훌륭한 서평을 해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아우구스투스, 루터, 칼뱅, 바르트 신학에 매료되어 개혁신학 전통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해도 이들이 제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고 마치 영어 같은 외국어를 배우는 듯 했습니다. 유교같이 다른 전통이 몸에 밴 우리들은 우리의 전통을 신학과 더불어 같이 공부해야 하며, 그것도 단순 비교가 아니라 사상사적인 큰 틀에서 서로 대비하며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간의 대화에 앞장서온 GTU로 옮겨 본격적인 비교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맹자와 아우구스투스, 주희와 칼뱅, 왕양명과 바르트와 같은 식으로 사상사적으로 짝을 맞춰 전체적 패러다임을 비교하는 방법론을 개발했지요. 미국종교학회에서는 작년에야 비로소 『칼 바르트와 비교신학』이라는 책이 나오고 세션이 개최되었는데, 저는 그 서구신학자들보다 약 30년 앞서 한 것이지요.

제가 논문 쓰던 당시, 그리스도교와 유교간의 대화가 한스 큉과 줄리아 칭 등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방법론적으로 유가 사상을 신학의 범주와 개념에 맞춰 절충적으로 비교한 것이어서 체계나 학술 정밀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고도로 체계화되고 정밀한 현대조직신학과 전근대적 유교전통을 비교하자면, 그러한 조직신학 체계에 상응할만한 유학체계가 필요하다고 보고 개발해 낸 것이 신학(theology)에 대비된 조직유학(confuciology)이란 개념입니다. 곧 조직신학과 종교 간의 대화(또는 비교신학)의 새로운 신학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지요. 그러나 한국신학계에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작년에서야 비로소 번역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유교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전통들로 가득 찬 우리나라에서 신학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작업은 신학 현장이 불분명하고 막연한 서구형의 비교신학(comparative theology)이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의 조직신학/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학자: 근본적 상이성을 가진 왕양명과 칼 바르트를 통해 상생적 대화 모델을 제시하셨다면 1996년에는 근본적 유사성 속에 차별성을 가진 대화 모델을 종교학자 금장태 교수와 공동 연구한 『존 칼빈과 이퇴계의 인간론에 관한 비교 연구』를 통하여 ‘도의 신학’의 확장성을 입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의 신학”을 구상하신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신학자: 한국에 귀국해서 서울대학교의 유학자 금장태 교수님을 설득하여, 칼뱅과 퇴계 간의 대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장로교 개혁전통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칼뱅신학과 퇴계학을 위시한 한국유학간의 유사성에 기인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지요. 이 또한 한국신학계에서는 별로 주목을 못 받았지만, 해외 개혁신학자들로부터는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연구를 통하여 발견한 것은 성화론을 중요시했던 칼뱅이나 바르트는 형이상적인 이론신학보다는 삶속에 실천적인 ‘도의 신학’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바르트는 신학(앎)과 윤리(행위)는 서로 나눠져서는 안 된다고 고집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론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도(道)자는 머리 수(首)와 움직일 착(辶)로 구성되어, 어원적으로도 지행합일을 뜻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동안 세계신학의 가장 큰 문제는 이론적인 로고스신학(theo-logos)과 그를 비판한 실천적 프락시스 신학(theo-praxis) 간의 이원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행합일의 ‘도의 신학(theo-dao)’이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3의 글로벌 신학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로고스라고 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길(호도스, ὁδός), 곧 ‘도’라고 하셨지요(요 14:6). 크리스천이란 말이 나오기 전 사도행전에서는 교인들을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라 하였습니다(행 24:14).

종교학자: 도(道)는 국제적으로 ‘Tao’로 영역되다가, 최근에는 ‘Dao’로 번역이 되고 교수님의 영문 저서도 “A Theology of DAO”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경우에 중국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도(道)로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만큼 한국의 종교문화는 중국문화의 아류로 생각하는 의식이 팽배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세계 학문계의 실정이거든요, 그런데 ‘도의 신학’이라고 하면 외국인에게는 그럼 중국의 신학이냐는 오해가 있을 수 있고, 한국신학자에게는 이게 ‘한국신학’인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편견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신학자: ‘도의 신학’을 영어로 소개하면서, 바로 이점에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일단 한국성서신학에 대한 옥스퍼드 핸드북에서는 한국적 맥락이 분명하여, ‘Dao’ 대신 ‘Do’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창조론에 대한 티앤티클락 핸드북에서는, 그냥 ‘Dao’를 사용했습니다. ‘도의 신학’의 영어표기를 시작부터 ‘Theo-dao’보다는 ‘Theo-do’로 사용하려 했지만, 우선 후자가 일본의 ‘신도’와 혼돈을 가져 올 염려가 있고, 영어단어 ‘do’ 자체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 당시는 아직 중국신학이 떠오르기를 시작하지 못한 상태이었습니다. 세계신학에서 동아시아가 무시당하고 있어서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신학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어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tao/dao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단어에서도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된다는 취지에서, 최근 싱가폴에 있는 한 명문대학 저널의 요청으로 집필한 다석의 영성신학에 대한 논문에서는 한자 전체를 핀인(平音, pingyin) 같은 중국식 로마자화 시스템이 아닌 우리 한글 발음의 로마자화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동아시아에 대한 학술논문에서는 획기적인 일이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자가 중국 것이라고 믿는 현실에서(저는 그렇게 믿지 않지만) 한자의 로마자화는 중국 것으로 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겠지요. 우리 역사학자들이 하루빨리 한자의 근원에 대해 밝히고 세계적으로 그것을 인정받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도의 신학’을 창안했고 저는 한국신학자라는 사실은 이미 세계가 알고 있습니다. 제 업적들이 먼저 출판되어있는 상황에서 양심적인 학자라면 ‘도의 신학’이 중국신학의 아류라고 결코 할 수 없겠지요. 오히려 앞으로는 제 생각과 업적들에 대한 표절들이 문제가 되겠지요. 또한 ‘영어표기를 중국식으로 했다 해서 한국신학이 아니다’라고 하는 옹졸한 배타주의적 태도를 우리 학자들이 더 이상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수적 배타주의를 넘어서 중국이던 미국이던 좋고 필요한 것들을 품는 대승적 아량을 가져야 합니다. 앞으로 세계신학, 특히 동아시아 신학을 이끌어 가는 것은 우리 신학자들의 몫이니까요.

옥스퍼드 핸드북에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소개

종교학자: 개인적으로 한국신학자들의 저술과 김 교수님의 관점의 차이 가운데 감명 깊었던 대목 가운데 하나가 “신학적 사대주의와 식민주의적 근성을 극복해야 한국신학이 그래서 한국 교회가 바로 설 수가 있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한국의 사례로서 다석 유영모의 신학을 조명한 『가온찍기』는 그 부제가 “다석 유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이라고 할 정도로 상당한 공력을 들인 역작이라 평가됩니다. 그럼 유영모 이외에 서구신학의 전이해에 오염되지 않으면서도 성서를 한국의 종교적 심성으로 읽어낸 종교인들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 『가온찍기』의 겉표지

신학자:  2008년 세계철학자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는데, 준비위원회가 가장 한국적인 철학자를 내세우는데 애를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급기야 채택된 인물이 다석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었습니다. 다석은 세계신학이 반드시 주목해야 할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종교사상가이지요. 그래서 20여 년간 깊은 관심을 갖고 강남대 신학대학원에 과목을 설치하며, 연구에 천착하였지요. 그의 그리스도론은 2003년에 최초 영어로 출판되었고, 그 후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으로 『가온찍기』를 출판하게 되었지요.

다석은 워낙 자유스럽게 동서고금의 경전들을 넘나들며 종교사상을 득도하신 분이 돼서, 조직신학 등 서구식 신학교육을 통해 오히려 서구적인 개념과 체계에 익숙한 신학자, 신학생, 목회자, 그리고 신자들이 그 오묘한 동양적 생각들에 접근해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교량역할을 할 입문서로 그의 사상들을 좀 더 신학에 가깝게 체계화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도 너무 어렵다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 연구에서 제가 발견한 하나는 다석이 우리의 토착적 선도전통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건 다석학회 회원들을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이 무시했던 부분 같습니다. 그래서 다석 사상은 선도 수행자로서의 입장에서 더 깊이 조명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주역을 비롯한 동양생명사상들과 특히 선도에서 중요한 한 수행지침은 ‘수승화강(水昇火降)’입니다. 내려가야 할 물은 올라가고 올라가야 할 불은 빛이 되어 내려 쪼여줘야 나무가 자라듯 생명이 자랍니다. 다시 말해 오히려 몸은 올라가야 하고 얼은 내려와야 합니다. 몸나는 가라앉고 얼나를 뜨게 하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착오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혼비백산(魂飛魄散)을 말하는 것으로 생명이 아니라 사망의 길입니다.

교수님 앞에서는 변찬린 선생을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변찬린 선생의 중요성도 그가 성경을 우리의 독특한 가장 근본적인 영성이라 할 수 있는 선도의 시각에서 읽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기독교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개신교와 유교사상 간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성경이 우리의 삶에 깊이 흡수되어 있는 선사상과 맞물려 있다는 점도 크게 일익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길선주와 이용도 같은 한국기독교의 토착적 영성 개발자들은 선도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한국장로교의 개척자 길선주 목사는 본래 열렬한 선도 수행자였지요. 그러한 것을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푼 이가 바로 변찬린 선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늘나라(선경)에 이르는 선맥(僊脈), 곧 도맥(道脈)을 찾아내었지요. 이 성경해석은 ‘도의 신학’에서는 고마운 일이지요.

그러나 조직신학적으로 그를 받아드리기에는 갈 길이 멉니다. ‘도의 신학’조차도 꺼리는 현실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조직신학보다는 오히려 우리 성서신학이 먼저 해야 할 일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국성서신학에 대한 옥스퍼드 핸드북에서는 변 선생의 도맥 해석론을 소개했습니다. 변 선생이 한국성서학계와 세계성서학계에 소개된 것이지요. 이것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게 이걸 숙제로 밀어붙여주신 교수님의 공로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신학자는 세계 신학계에 공헌할 풍부한 한국의 종교적 자산을 개발해야 한다

종교학자: 개인적으로 뜻밖의 기쁜 소식입니다. ‘도의 신학’과 더불어 변찬린 선생의 『성경의 원리』가 “Oxford Handbook of the Bible in Korea”에 소개된다니 말입니다. 한국 신학으로서도 큰 경사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문명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습니다. 지구촌 사유의 합류시대에 천문학의 발달에 따른 거시세계의 확장과 이론물리학이 가져다준 미시세계의 발견에 따른 공간 확대의 혁명, 통신과 교통의 혁명으로 인한 우주가 축소되는 시간혁명,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결합 등으로 새로운 인간유형의 혁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즉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공지능, 포스트 휴먼 등 인간에 대한 개념자체가 탈바꿈하여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대임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새 축 시대’라고 제가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문명사적 전환기에 한국이라는 자리에서 학문하는 입장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신학자: 그런 문명사적 큰 그림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학자로서 앞으로 새 시대 신학의 매크로 패러다임은 한국에서 나와야 하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국의 예언자가 아니었습니다. 새 시대의 사상가는 기득권 문명을 지배하며 호령하는 곳이 아닌 핍박 속에 고통과 한이 맺힌 변방의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노자나 공자도 제국의 지배층이 아니었습니다.

지형적으로 태극을 그리고 있는 한반도는 태극기 이미지대로 새 시대의 핵, 블랙홀입니다. 동서양의 초대국인 중국과 미국이 만나서 각축하고 있고, 아직까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치열하게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리가 새 시대를 여는 사상이 나올만한 곳입니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이 그랬고, 공자와 노자의 춘추전국시대가 그랬습니다. 초강대국 미국과 초강대국 중국에서는 결코 새 시대를 이끌 수 있는 사상이 나올 수 없습니다. 초강대국으로서 기득권의 유지가 절대적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 끼여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고 항상 미래가 불투명한 지금의 한반도가 현실적으로 괴롭지만, 영적으로 그러한 사상이 나올 수 있는 최적지, 최고명당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세계를 이끌 신학은 우리나라에서 나와야 합니다. 저는 그저 그 길을 열기 위한 터를 닦고 있는 정도이지만, 앞으로 그런 신학자와 사상가들이 이 땅에서 나올 것입니다.

종교학자: 한국에서 세계적인 신학자가 많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적 소식은 상당히 반가운 말씀입니다. 특히 교수님은 회심 사건 후 유교인·그리스도교인·세계 속 한국인으로서 ‘신학과 동양 종교’ 그리고 ‘신학과 과학’이라는 두 주제가 결국 ‘신학, 동양 종교, 자연과학 간의 삼중적 대화’라는 명제를 가지고 신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런 문명사적 전환기에 처한 한국과 한국신학의 길이 나가야 할 길은 어떠해야 하는지요?

▲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 겉표지

신학자: 지금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COVID-19) 사태나 인공지능 시대에 거센 물결은 말과 지능 중심의 서구 문명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를 비롯하여 서구인들이 마스크 쓰기를 극히 꺼려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말로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고 정체성을 주장하는 문명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본래 입을 가리고 말이 아닌 덕으로서 이웃을 대하며, 자기 존재를 나타내기보다는 겸손하게 감추는 것을 오히려 미덕으로 받아드리는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서양인들은 물론이고 (이젠 우리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적 유산이 되었지요. 그러나 코로나 사태는 그러한 말 중심의 문명에 대해 자연이 이제는 입을 고만 닫고 잠잠하라고 전면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로고스)이 아닌 덕(道)이 중심인 문명으로 돌아가라고 말입니다.

또한 알파고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지능을 훨씬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출현과 더불어 초지능의 포스트-휴먼 또는 기계인간을 추구하는 트랜스휴머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초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의 출현은 플라톤 이후 순수지능만의 세계를 추구해 온 서구적 이상의 기계적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완성이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가져올까요, 멸망을 가져 올까요? 최근에야 유럽연합과 미국 스탠포드 대학 같은 곳에서 연구소를 설립하며 인간중심적 인공지능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서양인들에게는 정작 인간이 무엇인가를 규명할 수 있는 사상적 자원이 고갈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서구문화가 극단적 신중심주의로 흘러 인간존재에 대한 가치와 덕을 논할 수 있는 인간론적 공간을 상실한 것입니다. 인간론이나 휴머니즘에 대해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정신적 자원은 유교입니다. 그래서 20세기 말부터 과학기술의 시대에 있어서 유교의 중요성을 설득해 왔습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경기 이후 시카고대학의 한 웹저널에 도덕적 과학기술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그래서 테크노-다오(Techno-dao)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마침 유교의 본산지 안동에 있는 경안신학대학원대학 박성원 총장님이 이러한 아이디어를 받아드려 안동시의 후원을 받아 해외 에큐메니칼 네트워크 신학자들과 함께 콘퍼런스를 4년째 계속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계선교연합회(CWM) 및 세계교회연합회(WCC)가 인공지능 문제를 향후 장기간 다루어야 할 주요주제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세계교회 기관들이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콘텐츠는 유교를 비롯하여 우리의 정신자원에서 발굴해내야 할 것입니다. 곧 기독교 신학, 과학기술, 그리고 우리 사상 간의 삼중적 대화를 통해 과학기술 시대의 적절한 신학 및 사상 패러다임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후학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새 시대에 세계를 이끌어가기를 바랍니다.

종교학자: 세계신학계의 동향, 선생님의 극적인 신학여정, 그리고 유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폭 넓은 말씀을 더 듣고 싶은데 지면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에큐메니안」 독자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대담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해외에서 요청받은 주요한 글로 바쁘신 줄 아는데 많은 시간을 내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신학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새해에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에큐메니안」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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